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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93)화 (93/139)
  • 93화

    필리프가 초조한 표정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급히 이레네를 불러오라 명한 지 수 시간이 흘렀지만, 보낸 마차가 황궁으로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아직인가?”

    시종을 돌아보는 황제의 눈에 살기가 묻어났다. 선연한 분노가 드러나는 눈빛을 피해 고개를 숙인 시종이 소맷자락을 움켜쥐며 몸을 움츠렸다.

    “아무래도 조금 늦어지는 것 같습니다, 폐하. 저… 조금만 더 기다리시면.”

    나지막한 욕지거리를 뱉은 필리프가 창가에서 등을 돌렸다. 안나가 누운 침대 옆으로 다가간 그가 그녀의 이마 위에 손등을 얹었다. 무섭게 오른 열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폐하.”

    “괜찮아. 그냥 눈 감고 있어.”

    “…저는 괜찮―”

    필리프가 안나의 입술 위에 검지를 올렸다. 살짝 벌어진 입술 틈으로 뱉어진 뜨거운 숨이 손가락을 적셨다.

    “…괜찮아요.”

    자신을 안심시키려 뱉는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그녀 앞에서 가슴 속 불안을 내비치고 싶지 않아, 필리프가 억지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곧 이레네가 올 거야. 그리고 믿을 만한 의원 한 명을 불렀으니, 아무것도 걱정할 것 없어.”

    고개를 끄덕이는 안나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필리프가 손등으로 안나의 이마를 타고 흐른 땀을 닦아 주었다.

    “폐하. 카일 스피어스가 도착하였습니다.”

    “당장 들여보내.”

    여전히 안나에 대해 깊은 의구심을 품고 있는 주치의 마르크 헤밀에게 그녀의 진료를 맡길 수는 없었다. 필리프는 아쉽게 황궁의 주치의가 되지 못했던 카일 스피어스를 입궁시켰다.

    “폐하를 뵙습니다.”

    “인사는 됐고, 먼저 여자를 살피도록.”

    예를 표하는 카일의 말을 끊은 필리프가 침대에 누운 안나를 가리켰다. 커다란 왕진 가방을 침대 옆 테이블에 내려놓은 카일이 안나의 가슴 위쪽으로 올라온 이불을 걷어냈다.

    “모두 내가 부를 때까지 밖에서 대기해.”

    “예, 폐하.”

    필리프가 방 안 시종 전체를 물리고 안나의 맥을 짚는 카일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총명하고 강직한 사내였다. 실력은 황궁 주치의가 될 자격이 충분했지만, 실력만으로는 황궁의 사람이 될 수 없었다.

    “어떤가.”

    “열이 깊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 정도 열은 쉽게 견뎌낼 수 있겠지만, 지금 이분은 몸이 많이 약해진 상태이고 아이를 가진 상황이라…….”

    잠시 말을 멈춘 카일이 볼록 튀어나온 안나의 배를 바라보았다.

    “임신 중기라 함부로 약을 쓸 수도 없으니… 당장은 어찌할 방법이 없습니다.”

    “…방법이 없어?”

    필리프의 미간에 깊은 줄이 그어졌다. 그가 간신히 극렬한 분노를 억누르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지만, 카일은 다소 건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예, 폐하. 당장은 지켜보는 것이 최선입니다. 열이 떨어지도록 곁에 붙어 물수건으로 이마를 적시고, 기력이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의식이 있을 때 묽은 죽이나 수프를 먹여야 합니다. 만일 며칠이 지나도 열이 떨어지지 않는다면, 그때는 약을 쓰는 수밖에 없겠지요.”

    “약을 쓴다는 말은,”

    “예. 아이가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필리프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데, 가만히 누워있던 안나가 벌떡 자리를 박차며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힘주어 깨문 그녀의 아랫입술에서 핏방울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안 됩니다! 아이는, 아이를 지켜야 합니다.”

    “안나. 일단 자리에 누워서.”

    “절대, 절대 안 됩니다! 절대! 절대로!”

    필리프의 소매에 매달리는 안나를 억지로 침대에 눕힌 필리프가 카일의 귓가에 속삭였다.

    “일단 준비하도록 해. 그리고 당분간은 황궁에 머물도록.”

    “알겠습니다, 폐하.”

    “밖에서 대기해. 전할 말이 있으니.”

    “예, 폐하.”

    카일을 내보낸 필리프가 땀으로 흥건히 젖은 안나의 몸을 가볍게 들쳐 안아 침대 끝에 눕혔다. 흐른 땀으로 축축해진 매트리스 위에 도톰한 이불을 깔고 다시 안나를 침대 중앙으로 옮긴 후 미지근한 온도의 수건으로 얼굴의 땀을 닦아주었다.

    식은땀으로 젖은 옷을 벗겨내고 움츠러드는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정성스럽게 닦았다. 안나에게 자신의 잠옷을 입히고 다시 그녀의 어깨까지 꼼꼼히 이불을 덮어 주었다.

    끊임없이 시험하고, 확인하려 했었다. 믿을 수 없는 그녀의 말을 온전히 믿게 될 순간이 오기를 빌면서.

    “…필리프…….”

    눈을 감은 안나가 필리프의 이름을 부르며 더듬더듬 손을 움직였다. 그녀가 간신히 필리프의 손에 제 손을 가져다 대는 순간, 필리프가 안나의 손등을 움켜쥐었다.

    “그래.”

    변할 수 없는 사실, 속일 수 없는 진실. 그녀의 입으로 자신의 이름이 불렸을 때 느낄 수 있었던 특별한 감각.

    “필리프…….”

    다시 너를 놓을 수는 없다. 너를 잃었을 때 느꼈던 상실감을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다. 너는 내가 사랑했던 여인이다. 다시는 의심하며 시간을 흘려보내지 않을 것이다. 그래야 한다. 그렇게 믿어야만 한다.

    “그래. 안나.”

    만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너를 선택할 것이다. 설사 배 속 아이를 잃는다고 할지라도.

    “…아이를 지켜주세요.”

    절절한 목소리로 애원하는 안나를 바라보며, 필리프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당장 결정을 내려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폐하, 이레네 유모가 도착하였습니다.”

    방 밖에서 울리는 시종의 보고에 필리프가 잡고 있던 안나의 손을 놓았다.

    * * *

    거울을 보고 있는 것일까? 안나가 제 앞에 선 여자에게로 한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분명 자신은 몸을 움직이고 있는데, 마주 선 여자는 꼼짝을 하지 않았다.

    찰랑찰랑 윤기 있는 금발, 갸름한 턱선, 커다란 눈망울과 날카로운 콧날. 안나 스완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 그녀의 몸을 빌려 생활했었다.

    ‘왜 돌아왔어?’

    그녀가 물었다. 창백하게 굳은 그녀의 표정에는 이렇다 할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이곳이었으니까.’

    안나 스완의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스르르. 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았지만, 어느새 그녀는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아니, 너는 내 필요 때문에 소환된 것뿐이야. 역할을 다했으면 조용히 물러났어야지. 내 계획을 방해하지 말고.’

    안나 스완의 손가락이 얼굴을 스쳤다. 손끝 온도가 소름 끼치게 차가웠다. 마음을 진정시키려 깊게 호흡해 보았지만, 불안함에 심장은 점점 속도를 높여 뛰기 시작했다.

    ‘어차피 이 세계에서 너와 아이 둘 다 살아남는 방법은 없어. 실수한 거야, 넌.’

    안나 스완이 고개를 까닥거리며 비웃음을 뱉었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지만, 한 박자 빠르게 말을 뱉었다.

    ‘내 배 속 아이가 원래 있어야 할 곳은 이곳이야. 난 반드시 아이와 함께 살아남을 거고.’

    ‘정말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고개를 끄덕인 안나가 안나 스완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네가 지금 살았는지 죽었는지 확신할 수 없지만, 내 배 속 아이에 대해서는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난 이 아이가 누구를 닮았을지 짐작이 가는데, 너는 짐작이 가지 않아?’

    ‘…….’

    ‘만약 이 아이가 너를 닮은 아이라도, 내 모습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고 해도 난 아무 상관없어.’

    안나가 자신의 배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말을 이었다.

    ‘네 계획을 방해했다고? 사람을 도구로 삼아 이루고 싶었던 그 계획이라는 것이, 결국은 잘못된 상대를 향한 복수였어?’

    ‘난, 난 언니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어!’

    ‘네 언니는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갔던 이를 끝까지 지키려 했어. 친동생인 너에게 잘못된 복수를 시키면서까지!’

    ‘아니! 아니야! 언니는, 언니는…….’

    완전하게 무너져 내리는 안나 스완의 얼굴을 마주하니, 더는 그녀를 원망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녀의 잘못된 선택이 아니었다면 필리프도, 배 속 아이도 만날 수 없었을 테니까.

    ‘내 아이와 필리프, 두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거야. 나와 내 주변을 위협하는 자가 있다면 그저 지켜보고 있지만은 않을 거야. 그게 누구라도!’

    강해지는 것이 당연했다. 지켜내는 것이 당연하다. 천천히 제게서 멀어지며 소멸하는 안나 스완의 모습을 바라보며 안나는 다시 한번 배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 * *

    “유모.”

    “폐하.”

    필리프를 향해 고개를 숙인 이레네가 안나가 누워있는 우측 침대로 시선을 돌렸다.

    “왜 저를 부르셨습니까.”

    “그녀가 원했어. 상태를 봐 줘.”

    안나를 내려다보는 필리프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침대로 가까이 다가선 이레네는 말없이 안나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상태가 괜찮은지 꼼꼼히 살펴야 해.”

    “의원을 부르신 것 아닙니까. 상태는 의원이 잘 알고 있겠지요.”

    이레네가 안나가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냈다.

    “열이 오를 때 이런 두꺼운 이불은 좋지 않습니다. 입고 있는 잠옷도 얇은 것으로 갈아 입히는 게 좋겠습니다.”

    안나의 손등을 덮어버리는 긴 잠옷을 내려다보던 이레네가 필리프에게 들리지 않을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가 무사하려면 최대한 빨리 열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그녀는.”

    “…예?”

    “그녀가 무사해야 해.”

    단호한 목소리로 내뱉은 필리프가 안나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아이를 살려달라 애원하지 않는 것을 보니 아마 깊게 잠이 든 모양이었다.

    “배 속 아이가 폐하의 아이란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답을 하지 않는 필리프의 정수리 즈음을 바라보며 이레네는 말을 이었다.

    “알고 계시는 분께서, 이리 쉽게 아이를 포기해도 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내내 안나의 얼굴에 머물러 있던 필리프의 시선이 느릿하게 이레네에게로 이동했다. 이레네의 귓가에 작고 음산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둘 중 하나만 살려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내가 여자가 아닌 아이를 선택해야 한다는 말을 하는 건가?”

    “폐하의 자식을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여자는 대체할 수 있지만, 자식은 절대 대체할 수 없으니까요.”

    기분 좋은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안나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매달았다. 필리프가 안나의 이마 아래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정리해주었다.

    “아무래도 오늘 유모를 부른 것은 실수였던 모양이군.”

    “…예?”

    “똑똑히 말하지.”

    필리프가 이레네를 향해 완전히 몸을 틀며 말했다. 주변 공기를 차갑게 얼어붙게 하는 냉정한 말투였다.

    “난 여자를 살릴 거야.”

    “폐하.”

    “내 의견에 반하는 일을 권하지는 않겠지. 황제의 의견에 반하는 이는 반역죄를 피해갈 수 없을 테니까.”

    흔들리는 이레네의 눈빛을 마주하며 필리프가 앉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더는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싶지 않다는 태도로 그가 침실 문을 가리켰다.

    “마차를 준비해주겠네. 그만 돌아가.”

    필리프가 자리에서 일어서 문을 향해 걷는 이레네의 등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혹시라도 다른 일을 꾸밀 생각은 하지 않아야 할 거야. 유모와 척을 지는 일만은 없었으면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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