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92)화 (92/139)
  • 92화

    속마음을 들킬 걱정 없이 가면을 쓰지 않고, 그저 온전한 자신이 되어 타인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은 오로지 안나와의 사이에서만 가능했던 일이었다.

    안나의 얼굴을 보는 내내 두 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필리프의 귓가를 때리곤 했었다.

    너도 네 아버지처럼 되고 싶어? 믿어서는 안 돼. 그녀는 너를 현혹하러 온 마녀일 뿐이야.

    아니, 아니야. 정말 모르겠어? 이미 너도 알고 있잖아. 네 심장이 반응하는 사람이 오직 한 사람뿐이라는 걸.

    처음이었다. 두 번째 목소리가 더 크게 귓가에 울려 퍼지는 것은.

    “이상하지. 하나도 어색하지가 않았어.”

    필리프가 안나의 귀에만 들릴 정도로 나직하게 속삭이며, 단단한 손끝으로 안나의 뺨 전체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심장이 급격하게 속도를 높였다. 사방이 조용한 가운데 들려오는 것은 바사삭, 천과 천이 부딪히는 소리와 자신의 심장 소리뿐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믿을 수밖에 없는 건.”

    안나의 뺨을 매만지던 필리프의 손끝이 조금 더 대담하게 움직이며 안나의 목덜미로 향했다. 안나가 너무나도 그리워했던, 익숙하고 다정한 손길이었다.

    “네가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겠지.”

    놀라울 정도로 근사한 그의 얼굴이 코끝까지 다가왔다. 안나의 입술이 스르르 벌어졌다가 그대로 다물렸다.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었다. 적막을 깬 그가 토해내듯 속삭였다.

    “아니면, 내가 그냥 미쳐버린 것일 수도.”

    “폐하.”

    “쉿.”

    안나의 목덜미에 닿아 있는 필리프의 손이 그녀의 입술로 옮겨졌다. 입술 윤곽을 세심하게 훑고 올라간 손끝이 동그스름한 코끝을, 물기가 묻어나는 눈가를, 얼굴 전체를 차례로 매만졌다. 필리프의 시선은 여전히 안나의 얼굴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그가 제 얼굴에서 안나 스완의 모습을 찾는 것이 아님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지금 그는 서안나, 자신을 바라봐 주고 있었다.

    “안나.”

    그를 다시 만나게 되고 처음 그에게 불리는 이름이었다.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온몸에 찌릿한 전율이 일었다. 그래, 그게 내 이름이야.

    “…안나.”

    그 이름만큼은 온전히 제 것이었다. 안나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제 뺨을 감싼 필리프의 손등에 떨리는 손을 얹었다.

    “필리프.”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대담하게 그의 손가락 사이에 자신의 손가락을 얽었다. 그 순간 안나의 얼굴에 닿지 않은 필리프의 반대 손이 그녀의 허벅지 안쪽으로 스르르 밀려들어 왔다.

    “…아…….”

    예상하지 못한 접촉이었다. 다급하게 벌어진 안나의 입가에서 뜨거운 숨이 흐르며 고개가 젖혀졌다. 애써 눌러 참고 있던 신음을 뱉는 안나의 입술을 마주하는 순간, 필리프는 자신의 온몸이 쇠꼬챙이 관통당하는 듯한 전율을 느꼈다. 질끈 감은 그녀의 눈가에 입술을 묻기 직전, 안나가 고개를 틀었다.

    “…후회해요.”

    “…….”

    “당신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는 선택을 했던 것을.”

    아이를 살릴 유일한 방법이었다고는 하지만, 그 말이 진실이었는지 확인할 길은 없었다. 어쩌면 그를 떠나지 않고도 아이를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그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그의 곁에 남을 수 있는 길이 있지 않았을까? 설사 평생 다른 이의 몸을 빌려 살아야 하는 삶이었다고 해도.

    “그러니까 저를 더 오래 원망하셔도 미워하셔도… 저는 괜찮아요.”

    필리프가 조금씩 힘이 빠지는 안나의 손을 부드럽게 움켜쥐고 손바닥이 마주치게 해 손가락을 세게 엮었다. 쿵쿵 발작하듯 뛰던 심장 박동이 손바닥 안쪽으로 옮겨갔다. 두 사람 사이에 더는 아무 말도 필요치 않았다.

    “…아…….”

    안나의 얼굴을 매만지던 필리프의 부드러운 손길에 차츰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그의 손이 안나의 허리를 감싸고 몸 전체를 쓰다듬었다.

    “…잠깐. 흣.”

    뜨거운 숨결이 코앞에 퍼지는가 싶더니, 곧 안나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 뜨거운 혀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머릿속에 뿌연 안개가 끼며 모든 생각이 멈추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입 안에서 두 사람의 혀가 맞닿아 얽혔다. 다급하게 드레스 안쪽을 파고든 필리프의 손길이 안나의 허벅지 안쪽을 매만졌다. 여전히 둘 곳을 찾지 못하고 허공을 방황하던 안나의 손이 필리프의 어깨 위에 안착했다.

    “흐으…….”

    간신히 숨을 뱉으며 코로 호흡하던 안나가 필리프의 어깨에 놓았던 손을 들어 그의 고개를 끌어당겼다. 다시 숨을 쉬지 못한다고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맞닿은 그의 입술을 놓고 싶지 않았다.

    매듭처럼 단단하게 안나의 혀와 얽혔던 그의 혀가 방향을 바꾸어 그녀의 입 안 전체를 샅샅이 훑었다. 살짝 틈이 생긴 입술 틈으로 숨을 뱉기가 무섭게 그가 다시 혀를 얽고, 입술에 힘을 주어 빨아들이기를 반복했다.

    그저 키스인데. 고작 키스 한 번에 제 자리를 찾지 못했던 두 사람의 영혼이 한데 얽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 하아… 아아…….”

    안나의 입술을 잡아 뜯을 것처럼 거칠게 빨아들이던 필리프의 혀는, 부족한 숨에 정신이 몽롱해질 때쯤에야 떨어져 나갔다. 거친 숨을 뱉는 안나의 얼굴을 바라보다 그녀의 뺨에 스치듯 짧은 입맞춤을 한 그가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흐, 아흐…….”

    목덜미에 혀가 닿기가 무섭게 안나가 뒤로 고개를 젖히며 신음을 뱉었다. 혀를 넓게 펴 목덜미 전체를 핥고, 입 안의 압력으로 빨아들이기를 반복하던 필리프가 안나의 허리를 힘주어 잡아당기려다 순간적으로 움직임을 멈추었다.

    “하아…….”

    무의식적으로 안나의 배 쪽으로 향하려던 필리프의 손이 다시 그녀의 허리에 닿았다. 힘을 싣지 않은 손으로 가볍게 안나의 허리를 감고, 마른 그녀의 몸을 번쩍 들어 올렸다.

    부드러운 벨벳 침대보 위에 안나의 몸이 느릿하게 내려앉음과 동시에 바삭거리는 옷가지가 남김없이 벗겨졌다. 다시 코끝이 맞닿고, 입술이 겹쳐졌다. 안나의 마른 허벅지가 자연스럽게 필리프의 허리를 휘감았다.

    “하아…….”

    안나의 몸은 필리프의 몸짓에 반응하며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점점 더 뿌옇게 흐려져만 갔다. 그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할 수가 없었다. 마치 그와 처음 관계를 했던 때로 되돌아간 느낌이었다.

    “…왜.”

    그가 여전히 입술을 겹친 채 물었다. 짧은 단어에 초조함이 가득 묻어 있었다.

    “…아, 아니, 아니에요.”

    눈동자를 떨구며 답하니 필리프가 안나의 턱 아래 손가락을 넣었다. 억지로 마주하게 된 비현실적인 까만 눈동자에 붉은 정욕이 가득했다. 그는 안나와 눈을 마주하는 것을 더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온기가 스민 그의 눈을 보며, 안나가 결심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다면.

    안나가 턱을 추어올리며 필리프에게 입을 맞췄다. 어설프고 서툴지만 먼저 고개의 각도를 바꿔가며 그의 입술에 살짝 제 혀끝을 밀어 넣었다. 맞닿은 입술이 부드럽게 휘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웃고 있었다.

    “아, 아흐…….”

    어설픈 장난은 끝났다는 듯, 뾰족하게 세운 필리프의 혀가 숨을 쉬려 벌어지는 입 안을 꿰뚫어 버릴 기세로 강하게 침입했다. 능숙하게 고개를 틀어 혓바닥을 빼내고 안나의 입술 전체를 흡입하며 빨아들였다. 그의 숨결, 체취. 어느 하나 놓치기 싫은 마음에, 안나 역시 그의 혀를 정신없이 빨고 핥았다.

    계속되는 마찰로 입안이 헐어 버릴 것 같았다. 입안 구석구석 자신의 흔적을 새겨 놓은 필리프의 혀가 안나의 턱, 목덜미, 가슴을 핥으며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의 혀가 닿는 몸 곳곳에서 걷잡을 수 없는 열기가 치솟았다. 오랜만에 느끼는 자극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아…….”

    흐트러진 복장으로 안나의 몸 이곳저곳을 애무하던 필리프가 빠르게 셔츠와 바지, 속옷을 벗어냈다. 조급함에 떨리는 손끝이 여러 번 엇나갔다.

    “…괜찮아?”

    필리프가 땀에 절어 이마에 붙은 안나의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물었다. 눈물이 날 만큼 다정한, 아마 평생 다시 듣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그의 목소리였다.

    “아, 하아… 좋아, 좋아요.”

    땀이 차오르는 손바닥을 침구에 문질러 닦아내며, 안나가 그의 어깨에 팔을 감았다. 필리프가 안나의 양쪽 다리를 팔 안쪽에 넣어 힘을 주었다. 안나의 다리가 공중에 들리고 허벅지 안쪽에 그의 뜨거운 숨결이 와닿았다.

    “으읏, 하아…….”

    미세한 통증이 느껴질 정도로 세게 허벅지 안쪽 연한 살을 빨아들인 그가, 뜨거운 혀를 내어 달아오른 살점을 달래듯 핥았다. 참지 못한 신음이 잇새를 뚫었다. 제 입에서 나오는 소리라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새된 교성이었다.

    “맞아… 그래.”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린 필리프가 끝이 갈라진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대로 상체를 세운 그가 단단한 허벅지 사이에 안나의 몸을 가두며 몸을 낮췄다. 빈틈없이 맞닿은 몸으로 세차게 뛰는 필리프의 심장 박동이 그대로 전해졌다. 안나는 딱딱한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그래… 맞아.”

    그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안나에게 하는 말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같은 말을 반복해서 내뱉은 필리프가 안나의 가느다란 발목을 잡은 순간이었다.

    “…아, 자, 잠시… 아앗!”

    제 몸에서 절대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밀착되어 있던 안나의 몸에서 한순간 힘이 풀렸다. 날카로운 신음을 내지른 그녀가 고꾸라지며 필리프의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안나?”

    부들부들 떨리는 팔로 간신히 침대 모서리를 지탱하고 있던 안나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이마 아래로 후드득 땀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괜찮아? 왜, 갑자기… 자, 일단 여기에 앉아. 바로 의사를 부를 테니까.”

    안나가 황급히 방을 떠나려는 필리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온몸 그 어디에도 제대로 힘을 실을 수가 없는지, 그녀의 손끝은 필리프의 소매를 스치며 그대로 바닥에 떨구어졌다.

    “하아… 주, 주치의는 아, 안 됩니다… 저는 괜찮으니 그렇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필리프가 안나의 이마에 손바닥을 얹었다. 손바닥 안쪽으로 무섭게 오른 열기가 전해졌다. 필리프의 체온이 닿자 가까스로 지탱하고 있던 안나의 몸에 힘이 풀렸고, 앙상한 몸뚱어리가 필리프의 가슴 안으로 빨려 들어왔다. 안나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가 입을 벌렸다.

    “…폐하. 이레네… 이레네 유모님을 불러주십시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