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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91)화 (91/139)
  • 91화

    필리프의 허락 하에 침실에 들어온 수행원이 용건을 알렸다.

    “전실에 저녁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평소보다 늦은 저녁을 먹을 테니 미리 준비해 놓으라 일렀던 것이 기억이 났다. 벽난로 위 시계를 흘끔 올려다본 필리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곧 나갈 테니 밖에서 대기해.”

    “알겠습니다, 폐하.”

    구부리고 있던 등을 편 필리프가 몸을 일으켰다. 그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인 안나가 흐트러진 종이를 정리했다. 안나가 정리된 종이 더미 위에 펜대를 올려놓고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는데, 필리프가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왜.”

    “함께 가지. 어차피 아직 얘기가 끝나지 않았으니까.”

    함께 밥을 먹자는 이야기인가? 이 세계에 돌아온 이후 단 한 번도 함께 식사한 적이 없었기에 당황스러움을 숨길 수가 없었다. 등을 돌려 문으로 향하는 필리프의 등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울렸다.

    “…아, 왜…….”

    문 앞에서 발을 멈춘 필리프가 등을 돌렸다. 안나가 급하게 배를 잡으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는 것이 보였다. 자연스럽게 푹 숙인 정수리 밑으로 벌겋게 익어 있을 그녀의 얼굴이 상상되었다. 너무나도 좋아하고 사랑했던 표정이었다.

    꽁꽁 얼어붙었던 마음의 벽은 생각보다도 훨씬 간단하게 허물어졌다.

    “왜, 나와 함께 밥을 먹기 싫은 건가?”

    “아니요,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그럼 아직 배가 고프지 않은 거야?”

    자신의 배에서 울리는 그 커다란 소리를 듣지 못했을 사람이 아니었다. 분명 저를 놀리는 것이 분명한 말투에 울컥한 안나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

    슬쩍 올려다본 그의 얼굴에 장난기 가득한 미소가 스며 있었다. 날카롭고 차가운 외모 속에 숨겨진, 소년같이 천진한 미소였다. 오랜만에 보는 그의 자연스러운 미소에, 차마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하고 멍하니 그의 입꼬리를 응시했다.

    마치 그간의 오해는 모두 없었던 일처럼, 오로지 서로를 신뢰하고 사랑했던 시간으로 되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조금 전에 울어서, 그래서 여전히 시야가 흐릿한 건가? 그래서 헛것을 보는 건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기분에, 안나가 두 눈을 비빈 뒤 눈동자의 크기를 키웠다.

    “너도 알겠지만, 황제의 식탁에 오르는 음식은 꽤 양이 많은 편이거든. 함께 먹도록 하지.”

    여전히 얼굴에서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 방문을 연 필리프가 방 밖으로 길게 손을 뻗었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뒤늦게 감춘 안나가 드레스 단을 잡고 방을 나섰다.

    “무슨 죄를 지었기에.”

    앞서 걷던 필리프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네?”

    서서히 발걸음의 속도를 줄인 필리프가 안나와 나란히 어깨를 마주했다. 뒤따르던 시종들이 놀라 침을 삼키며 시선을 돌렸다.

    “죄를 지은 사람이 아니면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걸을 필요가 없겠지.”

    필리프의 기다란 손가락이 안나의 턱을 가볍게 매만졌다. 재빠르게 주변을 돌아본 안나가 목소리를 낮췄다. 그녀의 등과 어깨가 한층 더 낮게 구부러졌다.

    “하지만 아직 제 존재에 대해 의구심을 품는 사람이 많습니다. 의심의 시선이 사라질 때까지는 최대한 조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요.”

    “사람들의 의구심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거야.”

    필리프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숨으면 숨을수록, 소문에 살을 붙일 뿐이지. 그러니까.”

    그의 손바닥이 굽은 안나의 등허리에 내려앉았다.

    “등을 펴고 고개 좀 들고 걷는다고 크게 달라지는 건 없을 것이란 소리야.”

    말을 마친 필리프가 다시 안나를 앞서 걷기 시작했다. 여전히 그의 등 뒤에 숨다시피 걸으면서, 안나가 발끝을 향해 있던 시선을 천천히 끌어올렸다.

    그가 나를 믿게 되었다고 생각해도 될까? 그의 목소리에 따뜻한 온기가 섞이기 시작했다고 느껴지는 건, 그저 내 기대가 만들어낸 착각일까? 아니. 아직 큰 기대는 하지 말자. 그저 인내심 있게 그의 눈이 나를 온전히 바라봐 주길 기다리자.

    전실 안에 있던 카라나가 깊게 고개를 숙이며 필리프를 맞이했다. 그녀는 황제의 등 뒤에 선 안나를 보고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하며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따로 준비하라 이르신 음식입니다. 먼저 수프와 샐러드를 준비하겠습니다.”

    등 뒤 시녀에게 여분의 커트러리를 준비하라 이른 카라나가 커다란 테이블 위에 양배추 수프와 싱싱한 샐러드 접시를 내려놓았다.

    “하나씩 내올 것 없어. 메인과 디저트를 모두 함께 내오도록.”

    “알겠습니다, 폐하.”

    숟가락을 들고 수프의 맛을 본 필리프가 여전히 주변 눈치를 살피는 안나에게 무언의 눈짓을 해 보였다. 뒤늦게 숟가락을 든 안나가 수프의 향을 맡고 필리프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비슷하게 맛을 내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그래도 맛이 같지는 않아.”

    안나가 콧날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필리프의 곁을 떠나기 전날, 그에게 만들어 주었던 음식이 떠올랐다. 음식을 맛보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던 그때 그의 얼굴이 지금 그의 얼굴에 덧입혀지는 느낌이 들었다.

    “먹어 봐. 너라면 어떤 맛이 부족한 건지 알 수 있을 테니까.”

    숟가락으로 양배추를 잘라내는 순간 맛의 차이가 나는 부분이 무엇인지 눈치챌 수 있었지만, 안나가 말없이 내용물을 입으로 가져갔다.

    “알겠어?”

    “재료를 삶는 시간이 좀 짧았던 것 같습니다. 양배추를 입에 넣을 때 서걱거림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푹 삶아주어야 하거든요. 그리고 훈제한 고기의 양도 좀 적은 것 같아요. 수프에서 고기를 훈제한 향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안나의 설명이 끝나기가 무섭게 테이블에 다양한 요리가 차려졌다. 안나가 주방 시종으로 일할 때 필리프에게 선보인 적이 있었던 요리들이 대부분이었다.

    “자, 그럼 나머지도 맛보도록 하지. 여전히 내가 먹었던 음식들과는 좀 차이가 있어서.”

    차례차례 신중하게 음식을 맛본 안나가 맛이 차이 나는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이 그 어느 때보다 밝게 빛나고 있었다. 음식을 만들고 자신의 반응을 기다리던 그 순간의 그녀와 너무나도 닮은 눈동자였다.

    “디저트는 제가 만들었던 것보다 훨씬 더 맛있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디저트는 제 전문 분야가 아니었었거든요.”

    긴장으로 단단히 굳어 있던 안나의 얼굴 근육이 느슨하게 풀어지는 것이 보였다. 나지막하게 음식평을 뱉는 그녀의 목소리가 끊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안나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던 필리프가 빠르게 그녀의 말을 받았다.

    “네 전문 분야인 음식이 어떤 것인지 궁금한데? 방금 네 말투가 굉장히 자신 있는 것처럼 들려서 말이야.”

    다시 뺨을 발갛게 물들인 그녀가 서둘러 항변의 말을 뱉었다.

    “아,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물론 자신 있게 만들 수 있는 음식이 있는 건 맞지만, 그게 폐하의 입에 맞을지 확신할 수는 없거든요.”

    “조만간 자리를 마련하도록 하지. 먹어 보지 않고서는 내 입에 맞을지 알 수 없을 테니까.”

    이곳에서 구할 수 없는 재료가 필요한데. 허공으로 눈을 올린 안나가 낮게 중얼거렸다. 완전하게 긴장이 풀렸는지 밝은 표정으로 접시의 음식을 비우기 시작하며 자신도 모르게 희미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이 고기에는 예전 그 상큼한 소스가 어울릴 것 같기도 한데.”

    “맞습니다, 기름진 음식이면 뭐든 잘 어울릴 소스이니까요. 대신 레몬이나 라임의 양을 적당히 조절해야 할 것 같습니다. 고기 본연의 맛을 해칠 수도 있으니까요.”

    테이블을 가득 채웠던 음식이 거의 사라질 때까지 느긋하게 음식을 먹고 별것 아닌 대화를 끊임없이 나누었다. 수많은 시종이 전실 문밖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 세상에 둘만이 존재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자, 이것도 먹어 봐.”

    필리프가 디저트 접시에 손을 대지 않고 먼저 안나의 앞으로 밀어주었다.

    “아, 폐하 먼저 드시면 저는 나중에…….”

    “난 아직 식사가 끝나지 않아서.”

    안나가 음식이 남은 필리프의 접시와 말끔하게 비운 자신의 접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너무 체면 차리지 않고 급하게 먹었나. 뒤늦게 민망함이 몰려왔지만, 생크림이 잔뜩 올려진 사과 파이를 앞에 두고 체면을 차리고 싶지는 않았다.

    “하아…….”

    제 얼굴만 한 사과 파이 조각을 말끔히 해치운 안나가 배를 두드리며 테이블에서 물러났다.

    “다 먹은 거야?”

    “네? 아, 네. 너무 배불리 먹었습니다.”

    포크를 내려놓는 순간 필리프와의 식사 시간이 끝남을 알고 있었다. 그를 다시 만나고는 처음 느껴 보는 평화로움을 깨고 싶지 않아, 평소 먹는 양을 훌쩍 넘어설 때까지 음식을 입 안에 밀어 넣고 또 밀어 넣었다.

    “차를 들이라 하지. 아무래도 좀 과식한 것 같으니까.”

    다행히 차를 마실 시간이 남아 있었다. 뜨거운 김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식혀서 최대한 천천히 차를 마셔야겠어.

    “폐하. 사과 차를 준비하였습니다.”

    제 앞에 놓인 찻잔을 내려다보던 안나가 아쉬움에 들릴락 말락 한 한숨을 내쉬었다. 시종이 내놓은 것은 차가운 사과 차였다.

    “왜, 차가 마음에 들지 않아?”

    “…네? 아, 아닙니다.”

    민망함에 단숨에 찻잔을 비우는 안나를 바라보며 즐겁다는 듯 소리 내어 웃은 필리프가 먼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따뜻한 차는 방에 돌아가서 마시는 것으로 하지. 생각해 보니, 우리 원래 하려고 했던 얘기는 하나도 하지 못했잖아?”

    “네? 아… 네.”

    차례로 전실을 나선 필리프와 안나가 두어 걸음 정도의 간격을 두고 걷기 시작했다. 필리프가 걸음의 속도를 늦추면 안나 역시 속도를 늦췄고, 다시 속도를 올리면 그녀의 발걸음도 덩달아 빨라졌다.

    안나를 등 뒤에 두고 걷고 있었지만, 그녀의 발걸음이 얼마나 가벼운지가 느껴졌다. 그녀와 나란히 걷고 싶었지만, 그녀의 말대로 지켜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을 수는 없었다.

    “폐하. 착복 시종을 들이겠습니다.”

    “아니, 그럴 것 없어. 내일 일정은 어떻게 되지?”

    침실에 먼저 안나를 들여보낸 필리프가 일정에 대한 보고를 받은 후 급하게 방문을 잡아 돌렸다. 뒤따라 방에 들어온 안나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녀의 뺨 위에 손끝을 가져다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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