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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90)화 (90/139)
  • 90화

    조용한 방안을 채우는 것은 시계의 초침 소리와 펜촉이 움직이는 소리가 전부였다. 필리프는 잔뜩 집중해 심각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그리고 써 내리는 안나의 얼굴을 응시했다.

    두툼한 양피지 위를 움직이는 펜촉의 소리가 좋았다. 안나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어 낸 필리프가 눈을 감았다. 사각사각.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소리를 계속해서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폐하. 이제 다 그렸습니다. 그림을 보며 설명하겠습니다.”

    직접 그린 그림을 보며 하나의 작전을 자세히 설명한 안나는 쉼을 두지 않고 바로 다음 양피지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오래지 않아 그림을 완성했다.

    감고 있는 눈을 뜬 필리프가 어쩐지 조금 자신 없어 보이는 안나의 얼굴을 마주했다.

    “제가 아무래도 제국 내 지리에는 능통하지 않아서요. 제 설명을 들으시고 폐하께서 제국 지리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전술을 선택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자, 두 번째로 말씀드릴 작전은요.”

    그림 속 선박을 가리킨 안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작전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부터 군사 훈련에 참여해왔고, 긴 기간 이어온 전쟁을 겪으며 다양한 군사 전술에 능통한 필리프였지만, 안나가 설명한 작전은 제 상상 이상으로 구체적이고 효율적이었다.

    제대로 전쟁 상황을 겪어 보지 못했을 여자가 이리도 정확한 군사 전술을 알고 있다? 미래에서 왔다는 그녀의 말이 어쩌면 아주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니지 않을까? 지금 내가 어렵게 알게 된 사실이, 훗날에는 몇 줄의 글자로 쉽게 알아챌 수 있는 일이 될 것이 뻔하니.

    “사실 저는 전부 책을 통해서 알게 된 지식이라, 실제로 전투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 사실을 고려하고 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 설명해 봐.”

    “적군이 많은 함대를 이끌고 진격해올 경우 이런 중거리, 원거리 포격전이 훨씬 효과적이라고 들었습니다. 사정거리 바깥에서 일시 집중타를 퍼부어 적군을 무력화시킬 수 있으니까요.”

    “음.”

    안나의 설명이 계속되었다. 필리프가 직접 펜대를 쥐고 안나가 그린 그림 밑에 전술을 추가했고, 두 사람은 전술에 관해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 자체가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마치 오랫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그럼, 박격포의 종류를 바꾸는 것이 좋겠지.”

    “한꺼번에 큰 타격을 줄 수 없더라도 반격이 넓은 포가 유리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이 작전을 쓴다면 그편이 훨씬 낫겠지.”

    한참 대화를 이어가는 사이, 어느덧 밝은 빛이 새어 들어오던 창문에 진한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여전히 집중력을 잃지 않은 안나가 완성한 그림을 필리프의 앞으로 내밀었다.

    “그림이 조금 이상하긴 한데, 알아보실 수 있으시겠어요? 어, 이쪽이 갑판인데 제가 조사한 바로는 갑판 머리를 이런 식으로 설계하는 것이 방어에는 훨씬 효과가 있다고 해요. 아마 지금 시대에는 잘 활용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요.”

    필리프가 집중한 안나의 모습을 말없이 응시했다. 무언가에 열중하거나 몰입할 때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양미간을 찌푸리곤 했었던 그녀. 지금 눈앞의 여자와 꼭 닮은 표정을 지었던 그때 그녀의 모습이 어쩐지 기억 속에서 조금씩 희미하게 떠올랐다.

    어설프게 남아 있는 그녀의 잔상을 무리해서라도 떠올리며 눈앞의 여인을 밀어내야 할까? 아니면… 이미 가슴의 자리를 비워낸 그녀를 그대로 묻어두는 것이 현명한 일일까.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대치하는 고민은 여전히 필리프를 괴롭히고 있었다.

    “하아…….”

    필리프의 깊은 한숨을 들은 안나가 펜대를 놓으며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에 다시 깊은 근심과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오로지 필리프를 무사히 지켜내겠다는 일념 하나로 잠을 줄여가며 모든 정보를 머릿속에 입력하려 노력했다. 혹시 이 모든 것이 그저 부질없는 일이었다면.

    “저, 폐하… 혹시 제 설명이 빈약하거나 말이 되지 않는다고 느끼신다면.”

    “아니. 그런 것이 아니야.”

    오른손을 들어 안나의 말을 끊은 필리프가 세수하듯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피로감이 물씬 드러나는 그의 표정에 안나의 마음이 착잡하게 가라앉았어.

    “계속해.”

    혼란스러운 필리프의 마음이 이해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낯선 얼굴로 눈앞에 돌아와 자신이 그가 사랑하는 사람이었다고 주장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미래에서 온 사람임을 밝혔다.

    그에게 너무 큰 혼란을 주고 싶지 않아 천천히 털어놓으려 했지만, 모든 일은 언제나 그랬듯 안나가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머리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진심을 마음으로 이해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다시 한번 마음을 굳건하게 다진 안나가 부러 목소리의 톤을 높였다.

    “조금 빨리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폐하께서 너무 피곤해 보이셔서요.”

    올려다본 그의 얼굴이 사무적인 차가운 표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부드럽게 표정이 풀어졌다고 생각했었는데, 그저 착각이었던 모양이었다.

    “음… 조금 전 설명해드린 작전과는 상반된 작전입니다. 보통 중대 공격을 막는 것에 효과적이라고 알려진 방법인데…….”

    애써 밝은 표정으로 차분하게 다음 군사 작전에 관해 설명하던 안나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시야가 흐릿해지며 초점이 잡히지 않는가 싶더니, 곧 눈가 가뜩 뜨거운 것이 차올랐다.

    갑자기 웬 눈물이… 절대 안 돼. 그의 앞에서 처량하게 우는 모습을 보일 순 없어. 자, 빨리 다른 생각을 하자.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빠르게 안나의 눈꼬리를 적시기 시작했다. 눈꼬리 끝에 뭉친 눈물을 도저히 삼킬 수 없겠다고 판단한 안나가 앉은 의자를 뒤로 물리며 고개를 숙였다.

    “아, 죄송합니다. 갑자기 말을 너무 많이 했더니 목이 잠겨서…….”

    필리프가 자신에게서 완전히 몸을 돌려 앉은 안나의 손목을 잡았다. 푹 고개를 숙인 그녀의 턱 끝에 눈물방울이 매달려 있었다. 잡은 손목에 힘을 주어 그녀의 몸을 돌리려는 순간, 턱 끝에 맺혀있던 눈물이 테이블 위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아, 이게… 너무 오랫동안 집중했더니 눈이 좀 아파서요. 빨리 세수하고 오겠습니다.”

    뺨에 흐른 눈물을 대충 손등으로 닦아 낸 그녀가 억지 미소를 지으며 잡힌 손목을 빼내려 안간힘을 썼다.

    눈물을 흘리면 늘 희한할 만큼 벌겋게 물들었던 코끝과 뺨, 애써 눈물을 삼키느라 파르르 떨리던 윗입술. 전부 같았다. 전부 제가 사랑하던 여인이 보여 준 모습이었다.

    우는 그녀의 얼굴 쪽으로 고개를 돌리느라 손아귀의 힘이 풀어진 사이, 그녀가 단번에 필리프의 손목을 뿌리쳤다.

    필리프가 테이블 위에 떨어진 안나의 눈물방울을 응시했다. 뚝뚝 눈물을 떨구는 그녀의 모습에, 왜 가슴 한쪽이 이리도 아린 것일까.

    바늘로 찔리는 듯한 기분이 드는 심장 쪽에 손을 올렸다가 내린 필리프가 안나가 그린 그림과 글씨를 주시했다.

    “잠깐. 이건…….”

    한동안 양피지를 내려다보던 그가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옆 테이블로 향했다.

    거칠게 테이블 서랍을 연 필리프가 안나에게 선물해 주었던 보석상자와 그녀가 남기고 간 손수건 옆에 놓인, 색이 바랜 작은 종잇조각을 응시했다. 핏기 가신 손으로 종잇조각을 집어 든 필리프가 비틀거리며 테이블로 돌아왔다.

    안나가 사라진 이후, 머물던 침실을 샅샅이 뒤지라 명령해 찾아낸 작은 종잇조각에는, 그녀가 쓴 글씨가 남아 있었다. 작은 종이에 쓰인 것은 자신의 이름. 그녀를 향한 그리움이 원망의 감정으로 뒤바뀐 이후 그녀와 관련된 모든 것을 없애려 했지만, 차마 없애버리지 못하고 간직하고 있었던 그녀의 흔적이었다.

    “이게…….”

    필리프가 두 개의 종이를 번갈아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문서 위조에 대비하여 황태자 시절부터 사람 고유의 필체를 연구해 왔던 필리프였다. 아무리 확인해봐도 종잇조각에 쓴 글자와 양피지에 쓴 글자의 필체는 정확히 같았다.

    “그러니까 정말…….”

    두 눈을 부릅뜨고 몇 번을 거듭 살펴봐도 동일인의 필체가 확실했다. 노력해도 도저히 꾸며낼 수 없는 개인 고유의 글자체. 그러니까 그녀가 정말로 거짓이 아닌,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면.

    이 믿을 수 없는 모든 일이 전부 진실이며, 그녀가 오직 자신만을 위해 이곳으로 돌아와 준 것이라면. 처음부터 진실만을 말해 온 그녀를 내내 의심하고 부정해왔다면. 숨통이 끊어질 것처럼 아프게 조여들었다.

    필리프의 몸이 굳어 버린 듯 움직이지 않았다. 안나가 테이블로 돌아와 자신의 곁에 섰음에도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폐하?”

    “…….”

    “멋대로 자리를 비워서 정말 죄송합니다, 폐하. 바로 이어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여전히 울음기가 남은 벌건 얼굴을 푹 숙인 안나가 다시 펜대를 잡아 쥐었다. 먼저 의자에 앉기를 기다리는 듯, 안나가 여전히 서 있는 필리프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올려다보았다. 느릿하게 그녀의 눈을 마주하는 순간, 필리프는 그녀가 펜을 움켜쥐었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해 냈다.

    언젠가 펜을 잡은 채 잠이 들었던 안나를 침대에 옮기고 그녀의 손에서 펜을 빼내 주었었다. 희한하게도 엄지와 검지, 중지를 모두 사용해 펜을 쥔 모습을 보며 귀엽다고 미소지었던 그 날의 기억이 또렷하게 되살아났다.

    “잠시만!”

    “아앗!”

    빠르게 펜을 쥔 안나의 손을 낚아챈 필리프가 그녀의 오른손을 주시했다. 정확하게 엄지와 검지, 중지가 한꺼번에 펜대 위에 올려져 있었다. 펜을 쥔 모습마저 사랑스러워 펜을 빼주기 전 오래 눈에 담아두었었던 작고 하얀 손.

    “너…….”

    눈이 아닌 마음으로 보십시오.

    이레네가 했던 말이 또렷하게 필리프의 귓가에 울렸다. 이미 마음은 상대를 알아챈 지 오래였다. 남은 것은 확신하며 마음의 갈피를 잡는 것뿐.

    “그러니까 네가 정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한 안나가 필리프의 눈을 응시했다. 구슬픈 그의 눈동자에 도저히 읽어낼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여러 겹 섞여 있었다.

    “…너.”

    필리프가 안나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문을 열려는 순간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폐하.”

    필리프와 안나의 고개가 동시에 방문 쪽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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