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이게 뭐지?”
“카마르 제국이 새로 사용하게 된 무기와 관련된 문서입니다. 투구와 갑옷을 새것으로 교체할 것이라는 보고를 받았어요.”
타론이 베르나에게서 문서를 건네받았다. 문서에는 투구와 갑옷의 재질과 모양, 각각의 강점과 약점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적혀있었다.
“보고를 참고하여 우리가 사용해야 할 무기를 재검토해야 할 것 같아요.”
“그래. 이번에 새로 들인 무기상에게 자료를 전달하도록 하지.”
성의 없이 문서를 훑어내린 타론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자, 베르나가 타론의 손목을 잡아 붙들었다.
“아직 우리가 이 자료를 손에 넣었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알려서는 안 돼요. 그곳에도 제 눈과 귀가 되어주는 자가 있듯, 이곳에도 카마르 제국의 첩자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흠… 그렇지.”
“제가 무기상을 만나보겠어요.”
“당신이?”
타론이 의문 가득한 눈동자로 베르나를 응시했다. 여자가 군수용품을 다룬다는 것에 의문이 담긴 눈빛이었다. 가까스로 한숨을 삼킨 베르나가 타론의 어깨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카마르 제국에 있을 때 군수용품에 대해 많은 것을 보고 익혔어요. 남자들과 겨룰 무술 실력을 익히는 것보다 이편이 제게 이로우리라 생각했으니까요.”
타론이 경외심 가득한 표정으로 베르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제 앞에서 늘 권력을 향한 야망을 숨기지 않았던 베르나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라왔던 제국을 침략하는 일에 온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래. 언제 만나면 되겠어?”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어요. 우리에게 시간이 그리 많은 것이 아니니까요. 아, 그리고 당신 왕위 계승식에 입을 슈트가 준비되었어요. 재단사를 부를 테니, 잠시 기다리세요.”
타론에게 넘겨주었던 서류를 다시 손에 넣은 베르나가 빠른 걸음으로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잠을 잘 시간도 없이 많은 일을 소화해야 했지만, 정신 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맑았다.
파이만 제국 카시아스 샤를 왕의 병세는 날이 갈수록 악화하고 있었다. 후사가 없는 샤를 왕은 병색이 더 깊어지기 전 왕위를 내려놓기로 했고, 차기 왕위는 최상위 계승권자인 타론 대공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이후 누구보다 빠르게 왕위 계승식을 준비해왔던 베르나였다.
“공작 마님. 재단사가 도착하였습니다.”
“가까이 와.”
타론의 방에 들이기 전 미리 슈트의 모양과 재질을 꼼꼼하게 확인한 베르나가 주의 사항을 덧붙였다.
“너무 타이트하게 재단해서는 안 돼. 그리고 구두는 코끝이 너무 날카롭지 않은 것으로 준비하도록. 대공의 부드러운 이미지를 강조해야 하니까.”
“예, 마님.”
“들어가 봐.”
재단사에게 턱짓한 베르나가 옷방으로 이동했다. 제국 내에서 유행하는 머리인 백 금발 가발을 쓰고 두꺼운 화장을 시작해야 할 시간이었다. 성가신 일이었지만, 오늘 저녁 열릴 만찬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감수해야 할 부분이었다.
“공작 마님. 식사는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내가 입을 드레스를 보고도 식사 소리가 나와?”
베르나가 옷방 중앙에 걸린 드레스를 가리키며 신경질적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격식 있는 자리이기에 7부 소매 길이 정도의 데미 트왈렛을 선택했지만, 화려함을 포기할 수 없었다. 허리 주변에 촘촘한 보석을 박아 부해 보이는 것을 막으려 평소보다 과한 코르셋을 함께 착용해야 했다.
“죄송합니다, 마님.”
“단장 시종을 들여. 모두 나가고.”
“예, 마님.”
열흘이 넘는 시간 동안 퍽퍽한 죽으로 끼니를 대신하고 있어, 평소보다 훨씬 더 신경이 예민해진 베르나였다. 슬금슬금 그녀에게서 몸을 물린 시종들이 한꺼번에 옷방을 빠져나갔다.
커다란 거울 앞 의자에 앉은 베르나가 오늘의 일정을 되새겼다. 오늘 내에 드레스와 타론이 입을 슈트의 수정을 완료해야 하고, 만찬이 시작되기 전 귀족 부인들과 티타임을 가져야 했다.
가식적인 미소를 만면의 띄우고 자신을 찬양할 귀족 부인들을 대할 것을 생각하니 벌써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알량한 귀족 한 사람이라도 제 편으로 끌어모으는 것이 유리했다.
그래. 조금만 참으면 돼. 다른 누가 무엇을 한다고 해도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권력을 손에 쥘 때까지만.
호흡을 가다듬으며 눈꺼풀을 들어 올린 베르나가 들고 있던 서류를 꼼꼼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 * *
필리프가 의자에서 일어선 안나에게 손짓했다.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자리에 앉은 안나가 배 위에 두 손을 얹었다.
“어제, 어디까지 말했었지?”
안나의 바로 앞으로 의자를 끌어온 필리프가 간밤 나누었던 이야기를 되짚었다.
“제가 있었던 곳에서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말씀드렸습니다.”
자신이 미래에서 왔다고 주장한 안나의 말을 완전히 믿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필리프는 그녀를 지하 감옥에 가두는 대신, 그녀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는 편을 선택했다. 그녀와 관련된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은 자신과 안나 그리고 주치의 마르크 헤밀뿐. 조급하게 판단할 이유는 없었다.
“오늘은 내 질문에 답해 봐.”
“…알겠습니다.”
그녀가 흔들림 없이 단단한 눈동자로 필리프를 올려다보았다. 자신이 사랑했던 안나와는 모양도 크기도 다른 눈동자였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은 같았다.
“몇백 년 후 미래와 지금, 가장 다른 점이 무엇이지?”
부디 허점을 보이지 않기를. 필리프가 무감한 목소리를 뱉으며 두 주먹을 말아 쥐었다.
“다른 부분은 너무나도 많습니다.”
안나가 차분하게 달라진 시대상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필리프는 이야기를 듣는 내내 신중한 눈빛을 한 채 안나의 얼굴을 응시했다. 지금과는 사뭇 달라진 여성상을 설명할 때는 그럴 리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많은 것을 사람이 아닌 기계로 대신한다는 부분에서는 경악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다른 점은… 통치 체계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현재와 같이 영토를 확보하기 위한 분쟁은 확연히 줄어들었습니다.”
안나가 표정을 굳히고 목소리를 높였다. 가만히 안나의 이야기를 듣던 필리프가 처음으로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래서, 네가 있던 세계는 침략도 전쟁도 없는 평화로운 세계였다는 말인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미래에도 크고 작은 전쟁은 벌어집니다. 단 지금과는 목적이 좀 다르지요.”
다시 이 세계로 돌아오게 되면 자신이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고, 반드시 그를 이해시키리라 결심했던 안나였다. 그에게 조금의 거짓도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수백 년간의 역사 전체를 읊고 있을 수는 없었다.
“지금과 사용하는 무기도 현저하게 달라집니다.”
“어떻게?”
단 하나 고민되는 것은, 자신이 어디까지 관여해도 될 것인가의 문제였다. 이곳으로 돌아오기 전, 이제껏 벌어졌던 전투들을 꼼꼼하게 살피며 필리프에게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얻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 정보 전부를 낱낱이 설명할 수는 없었다.
“폐하. 중요한 것은 무기가 아닌 전술입니다. 이제껏 훨씬 더 강력한 무기를 사용하고서도 전쟁에서 패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상대와의 수 싸움에서 밀려서요.”
늘 안나의 마음을 불안하게 했던 베르나의 존재. 그녀의 존재가 필리프에게 완전히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되기 전까지는 늘 그 행동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했다. 그리고 베르나가 필리프의 안위를 위협할 수도 있다는 가정하에 효과적인 전술로 대비책을 마련해 두어야만 했다.
“내가 이 제국의 황제가 되기 직전 긴 전투를 치렀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물론 알고 있습니다. 병사 수의 완연한 열세를 딛고 승리하셨다는 사실도요.”
안나가 필리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말을 받았다. 필리프가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었다.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방어하는 태도를 보일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녀는 어딘가 모르게 조급한 태도로 군사 전술을 다시 살필 것을 종용하고 있는 모습을 보였다.
“황녀님이 걱정되시지 않으십니까.”
필리프가 꼬고 있던 다리를 풀며 안나에게로 바짝 상체를 기울였다. 필리프의 의도를 파악한 안나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이곳에 다시 돌아오려 결심한 이유 중에, 황녀님이 있었습니다.”
필리프의 독살 계획을 세웠지만, 그를 없애는 것에 실패하는 순간 바로 계획을 수정했던 황녀였다. 제국 간 평화 조약을 맺고 타 제국으로 떠났으나, 조금의 틈이 보이는 순간 금세 제 본색을 드러낼 인물이었다.
“폐하께서 제 말을 믿어 주시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폐하의 안전입니다.”
필리프가 일체의 거짓이 드러나지 않는 안나의 까만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머리가 아닌 가슴은 이미 그녀를 신뢰하고 있었다.
“분명 제 존재를 눈치챘을 것입니다. 민심이 흉흉한 틈을 타 기습적으로 공격해 올 가능성이 있지 않겠습니까?”
비밀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단단히 입단속을 시켰지만, 제국 내에 등장한 안나의 존재가 알음알음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필리프였다.
“황녀가 있는 제국에 내가 심어 놓은 첩자가 없다고 생각하는가?”
“물론 있겠지요. 하지만 황녀님도 분명 그 사실을 알고 계실 겁니다.”
파이만 제국 샤를 왕의 병세로 타론 대공이 곧 왕위를 손에 넣게 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대관식 내에 섣불리 행동을 취하지는 않을 테니, 대관식 직후 파이만의 움직임에 주시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허락하신다면 몇 가지 효과적인 전술을 설명해드리고 싶습니다.”
군사용 검 한번 제대로 잡아본 적 없었을 네가 군사 전술을? 미심쩍다는 필리프의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안나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믿지 않으셔도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원래 세계로 돌아간 이후 역사적으로 성공했던 군사 작전을 샅샅이 살폈습니다.”
잠을 이루지 못하며 인터넷을 뒤지고 수없이 많은 책을 읽으며 머릿속에 정보를 입력했다. 필리프에게 반드시 도움을 주리라는 일념으로 버텼던 시간이었다.
“그림을 그려 설명해드리면 좋을 것 같습니다. 종이를 좀 주시겠습니까?”
설마? 아니. 그럴 리는 없다. 여전히 승낙의 말을 뱉지 못하는 필리프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가 읽혔다.
“설마 제가 황녀님의 사주를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필리프의 의심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그의 의심을 없애는 방법은 하나였다.
“설명을 들어 주십시오. 과연 제 말이 폐하를 현혹하려는 것인지 아닌지 알게 되실 겁니다.”
정공법. 영민한 그를 이해시키는 방법이었다.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인 필리프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테이블 가까이 다가갔다. 그가 안나의 손에 쥐여 준 것은 익숙한 촉감의 고급 양피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