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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88)화 (88/139)
  • 88화

    한동안 필리프와 눈을 맞추던 안나가 열기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는 필리프의 눈동자가 평정심을 잃고 불안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믿어 줄까?

    안나가 불안감을 떨치려 배를 쓰다듬었다. 아이가 대답해주리라 기대한 것이 아니었는데, 배 속 작은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래. 어쩌면 지금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을지도 모른다. 솔직하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그가 조금이라도 제 말을 믿어 주길 바라야 한다.

    “폐하께서 믿어 주시지 않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울음을 참느라 목소리가 잠겨 나왔다. 안나가 몸의 떨림을 감추기 위해 드레스 자락을 힘주어 움켜쥐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사실을 말하지 못했습니다.”

    혼란과 분노로 일그러졌던 필리프의 얼굴이 조금씩 차분하게 가라앉는 것이 보였다. 안나가 드레스 우측을 잡아 걷어 내려, 주사 자국이 새겨진 어깨를 필리프의 얼굴 가까이 들이밀었다.

    “병에 걸리는 것을 막는 예방 접종 상처입니다. 저는 이유 모를 질병을 앓는 환자들 사이에 있어도 같은 병에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안나의 이야기를 듣던 필리프의 입에서 실소가 터졌다. 허공 어딘가를 향해 있던 그의 시선이 다시 안나의 얼굴로 돌아왔다. 그의 인내심이 바닥으로 떨어졌다는 것이 느껴졌다. 필리프가 입을 열기 전, 안나가 한 박자 빠르게 말을 뱉었다.

    “저는 폐하께서 알지 못하시는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필리프는 안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녀의 말을 끊지는 않았다.

    “제가…….”

    필리프가 자신의 말을 믿어 주리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안은 채, 안나가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제가 미래에서 왔기 때문입니다.”

    어이없다는 듯 필리프가 마른 웃음을 토해 냈다. 순간, 거죽만 남은 얼굴을 추켜올리며 중얼거리던 감방 안 여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미친 게 아닌 걸 알아챈 거야… 내 말이 사실이었어… 나 말고 다른 이가 이 세계에 온 거야… 원하지 않았는데… 오게 된 거야. 그렇지?’

    창밖을 향했던 그의 시선이 다시 제 얼굴로 돌아오는 순간을 기다렸던 안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미쳤다고 생각하십니까.”

    “둘 중 하나겠지. 미쳤거나, 아니면 감방에 갇히기 싫어서 이야기를 꾸며냈거나.”

    “제 말을 들어주시겠다고 하셨―”

    “내가 이런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믿을 것 같아!”

    필리프가 안나의 말끝을 토막 내듯 잘라내며 그녀의 어깨를 밀어냈다.

    “제가 안나라는 사실을 폐하께서 깨닫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 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실 분이 아니시니까요.”

    “그 입 닫아!”

    “폐하와 함께했던 시간, 그 기억은 오로지 저와 폐하의 머릿속에서만 존재합니다. 절대! 다른 누군가 꾸며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필리프가 벌어지는 안나의 입을 손바닥으로 덮어 막아내며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소파로 자리를 옮긴 그가 마른세수하듯 얼굴을 쓸어내렸다.

    “괜한 기대를 했어.”

    그의 얼굴을 가린 손바닥 사이로 허탈함이 묻어나는 목소리가 흘렀다.

    “네가 나를 이해시켜 줄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거야.”

    제 곁을 떠난 안나를 찾으려 발악하던 시간. 그녀를 되찾을 수 있으리란 기대가, 다시는 그녀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바뀌었을 때 느꼈던 절망감. 깊은 상실감에 허우적거리며 삶 자체에 대한 희망을 잃어갈 때쯤 다시 제 앞에 나타났던, 그녀가 아닌 그녀.

    “만약 그렇더라도… 차라리… 돌아오지 말았어야 해.”

    낯선 얼굴로 곁에 돌아온 그녀를 곁에 두고 괴로워하면서도, 동시에 안도감을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의 얼굴을 처음 본 순간부터 이미 느끼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녀가 자신이 사랑했던 안나가 확실하다고.

    “그렇게 떠날 거였으면… 다시는 돌아오지 말았어야지!”

    필리프가 고개를 들어 눈물로 얼룩진 안나의 얼굴을 마주했다. 올려다본 그녀의 얼굴이 흐릿했다. 뜨끈한 무언가가 뺨을 지나 턱에 맺혔다.

    “왜… 대체 왜……!”

    그녀를 안나라고 인정하는 순간 꺼내 놓아야 했다. 가슴 속에 깊이 틀어박혀 있던 가시를 꺼내기 싫어 애써 외면해 왔는지도 모른다. 제 전부를 내주어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던 연인이 매몰차게 자신을 버렸다는 사실을.

    “왜… 떠난 거야. 왜!”

    다시 시작된 깊은 원망, 필리프의 비명이 침실 안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고통스러움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울부짖음, 절규였다.

    “…필리프.”

    천천히 걸음을 떼어낸 안나가 필리프의 앞으로 다가갔다. 천천히 무릎을 꿇고 필리프와 눈을 맞추려 했지만, 머리카락을 쥐어뜯듯 얼굴을 가린 그가 손에 힘을 풀 생각을 하지 않았다.

    “…믿지 않아… 믿을 수 없어…….”

    안나가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중얼거리는 필리프의 어깨에 손을 얹고,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폐하를 처음 만났던 순간을 똑똑히 기억합니다. 제가 폐하께 말씀드린 적이 있을 것입니다.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폐하를 처음 만났던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아무런 감정 없는 차가운 눈동자를 마주 대하던 순간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그의 눈빛에 그토록 많은 온기가 실리리라고는.

    “처음 눈을 떴을 때는 꿈인 줄 알았습니다. 시간이 차츰 흐른 후에 깨달았어요. 내가 살던 시간보다 몇백 년 전 시대에서, 내 얼굴과는 너무도 다른 여자가 되어 살아남아야 한다는 사실을.”

    그가 자신의 말을 듣고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안나는 묵묵히 말을 이어갔다. 알고 있는, 겪은 모든 이야기를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댐이 무너져 물이 흘러넘치는 것 같았다. 한번 벌린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그곳에서 전 식당에서 일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황궁 식당에서 적응하는 것에 큰 무리가 없었어요.”

    어쩌면 누구에게건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곳에서도, 이곳에서도 함부로 꺼내 놓을 수 없는 비밀을 꾹꾹 감춰오며 마음은 조금씩 병들어갔다.

    “그래서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을 찾지 않고, 이곳에 머물기로 했습니다. 힘든 선택이었지만, 폐하를 떠날 수는 없었습니다. 폐하는 제가 처음으로… 살면서 처음으로 사람의 온기를 느끼게 해 준 따뜻한 봄과 같은 분이었으니까요.”

    필리프의 어깨에 얹어져 있던 안나의 손이 그의 손등으로 옮겨졌다. 안나가 부들부들 떨리는 그의 손을 끌어와 자신의 배 위에 얹었다.

    “아이 때문이었습니다. 배 속의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 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내내 바닥을 향해 있던 필리프의 고개가 천천히 들리기 시작했다. 그때 사실을 말했더라면, 지금의 우리는 조금은 다른 모습이었을까.

    “그곳의 시간과 이곳의 시간은 달랐습니다. 그곳에서의 일주일이, 이곳에서는 일 년이라는 시간과 같았습니다.”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려 안나의 뺨을 적셨다. 그에게 자신이 느꼈던 괴로움과 절망을 이야기할 수 없었다. 자신이 느꼈던 시간에 몇십 배가 넘는 시간 동안 고통받았을 그의 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정말로…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안나가 여전히 배 위에 얹어져 있는 필리프의 손등을 힘주어 움켜쥐었다. 한 자 한 자 힘주어 내뱉었다.

    “정말로… 이 아이가 폐하의 아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시겠습니까.”

    필리프가 완전히 고개를 들어 안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기다란 눈꺼풀이 눈물로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저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괜찮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아이는 알아보셔야 합니다. 폐하의 아이이니까요.”

    마주한 그의 눈동자에서 그의 진심이 읽혔다.

    믿고 싶어. 믿게 해줘.

    * * *

    땀과 체액이 뒤섞인 무거운 향이 방을 가득 채웠다. 등 뒤에 찰싹 달라붙어 거친 호흡을 뱉는 타론을 슬그머니 밀어낸 베르나가 발밑의 이불을 끌어왔다.

    “하아… 왜, 벌써?”

    “벌써라뇨. 침대가 이 지경이 되어 버렸는데요.”

    “난 아직 부족하다고. 여전히 당신이 고파.”

    “잠시만. 내 체력으로 더는 무리예요.”

    자신이 뱉어낸 체액으로 엉망이 된 침대를 바라보던 타론이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매트리스에 몸을 뉘었다.

    “알고 있잖아. 난 항상 당신과 함께 있고 싶다고.”

    “물론 나도 마찬가지예요.”

    “오늘 당신이 집중을 못 하는 것 같아 신경이 쓰였어.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거야?”

    하, 또 시작이군. 언제쯤이면 이 징징거림에서 해방되게 될까.

    베르나가 간신히 한숨을 삼키며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타론의 이마 아래로 내려온 머리카락을 정리해 준 그녀가 은근하게 몸을 겹쳐오는 그에게서 등을 돌리며 침대 옆 테이블에 올려놓은 서신을 잡아 들었다.

    “집중하지 못한 건 사실이죠. 생각이 자꾸 흩어졌으니까요.”

    “…왜?”

    “우리, 아주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잖아요.”

    베르나의 허리를 감았던 손에서 힘을 푼 타론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타론이 제 몸에서 살짝 떨어져 나간 틈을 타, 베르나가 잽싸게 상체를 들어 올렸다.

    “당신의 넘치는 힘을.”

    말을 멈춘 베르나가 타론의 사타구니로 손을 뻗었다.

    “훨씬 더 중요한 일에 쏟아야 하지 않겠어요?”

    “…하아…….”

    베르나의 손짓 한 번에 다리 안쪽으로 순간적으로 열이 몰렸다. 느른한 신음을 뱉은 타론이 서신을 쥔 베르나의 손을 맞잡았다. 베르나가 벌어진 타론의 입술을 막으며 빠르게 입을 열었다.

    “내가 말했죠? 이번 일만 성공하면 우리는 정말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나도 말하지 않았었나? 내가 원하는 건 당신뿐이라고.”

    “그럼 당신이 원하는 나를 위해, 내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해 주세요.”

    타론의 고개가 느리게 끄덕여졌다. 그의 사타구니 사이로 뻗었던 손을 거둔 베르나가 인심을 쓰듯 미소를 지었다. 허락의 의미임을 눈치챈 타론이 바로 상체를 세우며 다리 사이에 그녀의 몸을 가두었다.

    그래. 이 정도 아량은 베푸는 편이 좋겠지. 이제까지 곁에서 꽤 쓸 만한 조력자가 되어 주었으니.

    “그럼, 이번 한 번이에요.”

    “그래. 알았어. 알았다고.”

    혹시 베르나가 마음을 바꿀까 봐 조급함을 느낀 타론이 젖은 베르나의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몸과 몸이 완벽하게 밀착하기가 무섭게, 타론이 허리를 움직였다.

    “아흣―!”

    부르르 몸을 떨며 콧김을 뱉는 타론에게서 시선을 거둔 베르나가 고개를 젖혀 꺾으며 잔뜩 새된 신음을 내질렀다.

    남은 시간은 고작 한 달. 몇 년간 공들여왔던 계획이 드디어 빛을 발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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