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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87)화 (87/139)
  • 87화

    시종에게 보고를 전해 들은 호위대장이 오전 회의를 마친 필리프에게로 다가갔다.

    “폐하. 지금 급히 폐하를 뵈어야 한다는 주치의의 보고가 있었습니다.”

    “주치의?”

    “검은 머리의 여자와 관련된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표정을 굳힌 필리프가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황궁 동쪽으로 이동했다. 주치의에게 매일 정해진 시간 여자의 진료를 보라 지시했으니, 이제 막 진료를 마쳤을 시간이었다.

    “무슨 일이지.”

    침실이 시야에 들어오기 직전 발걸음을 멈춘 필리프가 호위대장을 돌아보았다. 혹시나 그녀에게 무슨 문제가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반드시 폐하께 직접 이야기를 드려야 한다고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아무래도 긴급한 이야기인 것으로 보입니다.”

    선황에 이어 필리프까지, 두 명의 황제를 담당하고 있는 주치의 마르크 헤밀이었다. 황궁 사정에 능통한 그였기에, 대수롭지 않은 일로 성급히 알현을 청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개를 끄덕인 필리프가 걸음의 보폭을 늘렸다.

    “주치의는.”

    “아직 침실에 있습니다, 폐하.”

    침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시종 두 명이 간략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폐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여성분의 식사 이후 주치의를 불렀습니다. 진료가 거의 끝나갈 무렵 침실을 통제해야 한다는 말을 전하셨고, 급히 폐하를 뵈어야 한다는 말만을 반복하였습니다.”

    “문을 열어.”

    “예, 폐하.”

    “그리고 내 지시가 있을 때까지 모두 문밖에서 대기하도록.”

    “알겠습니다.”

    필리프가 방안에 들어왔을 때 안나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침대 모서리에 앉아 있었고, 주치의는 핏발 선 눈동자로 안나의 얼굴을 주시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지.”

    “…폐하.”

    마르크 헤밀의 시선은 여전히 여자를 향해 있었다. 침대 가까이 성큼 다가선 필리프가 안나와 마르크 사이를 가로막으며 다시 한번 물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은 것 같은데.”

    필리프의 추궁에도 잠자코 침묵을 지키던 마르크가 느릿하게 입술을 떼어냈다. 잠긴 그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렸다.

    “폐하. 선황께서 바른 탑 지하의 늪을 없애셨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죄수들을 고문하는 용도로 만들어졌던 바른 탑 지하의 늪은, 그 잔인함을 이유로 선황 시절 모두 철거되었다가 필리프에 의해 재구현되었다. 갑자기 바른 탑 이야기를 꺼내는 마르크의 의도가 파악되지 않았다.

    “지금 자네가 뱉는 소리가 내 질문과 연관이 되는 것이어야 할 거야.”

    “선황께서는… 탑의 지하 전체를 없애라 지시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뭐?”

    “유일하게 남겨둔 감방이 있었습니다. 감옥을 설계한 자와 선황만이 알고 계시는 방이었지요. 저는 선황 서거 직전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빠르게 말을 뱉는 마르크의 눈동자가 초점 없이 흔들렸다.

    “선황께 절대 비밀을 누설하지 않을 것을 맹세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폐하가 위험에 처하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었으니까요. 지금 당장!”

    잠시 말을 멈춘 마르크가 필리프의 등 뒤 안나를 손가락질했다.

    “저 여자도 그곳에 가두셔야 합니다!”

    필리프와 안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았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느릿하게 고개를 저은 안나가 치맛자락을 힘껏 비틀어 쥐었다.

    * * *

    “그 여자가 처음 발견된 곳도 하를 숲이었습니다. 여자는 푸른색 바지와 붉은색 상의를 입고 있었는데, 그 복장이 아주 특이했다고 합니다. 수상한 사람이 숲을 떠돌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수색대가 여자를 체포했는데, 그녀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필리프가 마르크와 함께 바른 탑으로 향하며 그가 풀어 놓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자신은 이 세계 사람이 아니다, 먼 미래에서 왔다, 제발 자신을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 달라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습니다. 여자의 이야기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지만, 곧 비밀이 새어 나갔고 여자가 마녀일 것으로 확신한 많은 이들은 여자를 화형에 처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폐하께서도 아시듯, 선황께서는 마녀사냥에 대해 회의적인 분이셨지요.”

    혹독한 고문을 겪으면서도 여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바꾸지 않았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황당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자신이 발견되었던 숲으로 돌려보내 줄 것을 요구했다.

    마르크의 이야기를 들으며 걷는 사이 바른 탑이 시야에 들어왔다. 탑 정문을 지키고 있던 문지기들이 길을 열어주고, 탑 지하로 향하는 계단에 발을 들여놓았다.

    “여기서부터는 우리 둘이 가도록 하지. 이곳에서 대기해.”

    호위병들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검집에서 칼을 빼어내는 필리프의 모습에 그대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주위를 따라붙는 이들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마르크가 살짝 목소리를 높였다.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을 안심시키면서, 결코 성급한 마녀사냥을 하지 않겠다는 선황 자신의 의지를 꺾지 않을 방법은 단 하나였습니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에 철저히 고립시키는 것. 마르크가 지하 늪지대 우측 벽면을 만지작거렸다.

    그가 살짝 튀어나온 벽면을 밀자 돌벽 안으로 간신히 몸이 통과할 정도의 좁은 길이 드러났다. 어두컴컴한 돌벽을 한참 걸어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공간에 다다랐다. 한 평 남짓해 보이는 좁은 공간은 무거운 철문에 가로막혀 있었다.

    “저 여자입니다, 폐하.”

    철제 의자에 손발이 결박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커다란 재갈을 문 입 밖으로 흘러내린 타액, 눈물과 콧물로 엉망이 된 얼굴의 여자가 두 사람의 모습을 확인하자 부르르 몸을 떨며 발광하기 시작했다.

    손에 들고 있던 장검을 허리춤에 꽂은 필리프가 철문 가까이 다가섰다. 잠겨있지 않은 철문을 밀어 열고, 여자에 입에 물린 재갈을 풀어주었다. 오랜 시간 여자의 입에 고여 있던 진득한 타액이 재갈과 함께 입 밖으로 흘러내렸다.

    “흐으으… 으으으으…….”

    얼마나 오래 재갈을 물고 있었는지 여자의 입안이 죄 헐어 있었고, 광대뼈가 불거진 얼굴에는 거죽만이 남아 있었다.

    “무엄하다. 황제 폐하께 예를 갖추거라!”

    마르크의 호통에서 꿈쩍하지 않은 여자는 한동안 숨소리인지, 신음인지 모를 것을 뱉어냈다. 초점 없는 눈동자로 허공을 응시하던 여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흐으으으… 드, 드디어 바, 발견한 거야… 으으… 그렇지……?”

    흉측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린 여자가 혼잣말을 웅얼거리듯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렸다. 그녀의 입가에 괴이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으으으… 내가… 미친 게 아닌 걸 알아챈 거야… 내 말이 사실이었어… 나 말고 다른 이가 이 세계에 온 거야… 원하지 않았는데… 오게 된 거야. 그렇지? 그, 그 사람은 지금 어디 있지? 내, 내가 봐야 해. 직접 이야기를 나눠야 해.”

    여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마르크가 필리프의 곁에 바짝 다가서며 여자의 말을 잘랐다.

    “폐하. 제가 폐하께 이 여자에 대한 말씀을 드린 것은.”

    마르크가 넝마가 된 여자의 소맷자락을 확 걷어 올렸다. 그녀의 어깨에 붉은 주사 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이곳에 오기 직전, 안나의 어깨에서 본 것과 정확히 같은 곳에 새겨져 있는 자국이었다.

    “…….”

    “아무래도 그 여자를 가까이하시는 건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필리프가 나지막한 한숨을 뱉으며 여자의 어깨에서 시선을 틀었다.

    * * *

    즉시 탑을 빠져나온 필리프가 황궁으로 향했다. 마르크는 감옥 안의 여인과 안나를 대면하게 하고, 조금이라도 허튼소리를 내뱉으면 안나 역시 똑같이 감방에 가두는 것이 좋으리라 조언했다.

    “폐하. 제 이야기를 들으시는 것이.”

    “그만.”

    마르크의 말을 끊은 필리프가 멀찌감치서 자신을 뒤따르는 시종들에게 발을 멈추라 지시한 후 말을 이었다.

    “이 이야기는 자네만 알고 있도록.”

    “…폐하.”

    “한때 황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인물이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관련된 모든 이들이 위험해질 수 있어. 자네의 자리를 지키고 싶다면 내가 지시할 때까지 함부로 입을 놀려서는 안 돼. 내 말 알아듣겠어?”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그만 돌아가.”

    마르크를 돌려보낸 필리프가 등 뒤 시종에게 눈짓을 주었다.

    “폐하. 바로 회의실로 가시겠습니까.”

    “아니. 먼저 침실에 들르지.”

    일단은 안나에게서 직접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필리프에게 남겨진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만일 안나가 감옥에 있는 여인과 같은 이야기를 한다면? 필리프의 고개가 저어졌다. 부디 그녀가 제가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해 주었으면 했다. 어떻게든 마음의 혼란을 걷어버릴 만한 이야기를 해 주기를.

    황궁 입구에 도달한 필리프가 침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네들은 모두 문밖에서 대기해.”

    침실 안에서 안나의 주변을 빙 둘러싼 호위병들을 방 밖으로 내보낸 필리프가 창백한 안색을 한 안나의 곁으로 다가갔다. 의자에 앉아 있던 안나가 몸을 일으켜 필리프와 눈을 맞추었다.

    “폐하.”

    “내가 오늘 무척 재미난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 세계로 돌아온 이후로 한 번도 제대로 제 눈을 바라봐 주지 않았던 남자였다. 처음으로 안나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한 필리프가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자신이 미래에서 왔다는 미친 소리를 지껄이는 자가 있었어.”

    안나가 흔들리는 시야를 재빠르게 다잡았지만, 상대는 자신이 동요하고 있음을 간파했다.

    “갖은 고문을 겪으면서도 자신의 말이 진실이라는 이야기를 번복하지 않았다더군.”

    필리프가 안나에게로 깊게 상체를 숙였다. 한 뼘 거리에서 마주하게 된 그의 눈동자는 아무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희한하지. 그 여자의 어깨에도 너와 같은 자국이 또렷하게 남은 것이.”

    필리프가 안나의 어깨로 손을 뻗었다. 마치 말하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아무 말도 꺼내 놓을 수가 없었다. 살짝 벌어졌던 안나의 입이 그대로 꾹 다물렸다.

    “그러니까… 너도 미래에서 왔다는 뜻이 되는 건가?”

    어깨를 훑는 그의 손끝에 조금씩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대답해 봐. 그런 뜻이 되는 거야?”

    “…폐하.”

    필리프가 바닥으로 떨어지려는 안나의 시선을 다시 제게로 끌어오며 말했다. 아무런 변화를 보이지 않는 그의 눈동자를 마주하니, 한겨울 새벽바람을 맞은 듯한 한기가 느껴졌다.

    “신중히 생각하고 답해야 할 거야.”

    “…….”

    “네 말이 헛소리라고 느껴진다면, 지금 당장 너를 그 여자가 있는 곳으로 보내버릴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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