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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86)화 (86/139)
  • 86화

    ‘안나… 안나, 어서 뒤돌아 나를 봐야지.’

    낡은 드레스를 입은 안나가 필리프를 앞서 걷기 시작했다. 결 좋은 금발이 불어오는 바람에 부드럽게 흩날렸다. 그녀를 붙잡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필리프의 손은 그녀의 낡은 드레스 자락을 스치며 떨어져 나갔다.

    ‘안나!’

    목청껏 소리를 내질렀다. 제발 등을 돌려 나를 바라봐 줘. 한 번만. 단 한 번만.

    몸이 제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온 힘을 다해 다리를 뻗었지만, 안나와의 간격은 점점 더 멀어질 뿐이었다. 마지막이다. 마지막 힘을 쥐어짜야 한다. 필리프가 발끝에 힘을 실어 공중에 떠올랐다. 그리고 그 순간, 안나가 고개를 돌렸다.

    아니야, 아니야. 안 돼. 안 돼!

    어두운 빛에 가려져 그녀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안간힘을 써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가서 그녀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얼음으로 만들어진 조각 같은 싸늘함이 손끝에 닿았다가 떨어져 나갔다. 여전히 그녀의 얼굴은 완벽한 암흑에 가려져 있었다.

    “헉!”

    또 같은 꿈이었다. 그리웠던 안나를 향해 손을 뻗고 그녀가 고개를 돌리지만, 그녀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이 지독한 악몽은, 아무리 노력해도 다시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는 듯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필리프가 안나를 향해 뻗었던 손을 내려다보았다. 한참을 말없이 손끝을 내려다보는데, 침대 매트리스의 잔 출렁임이 느껴졌다.

    “…….”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낯선 얼굴을 한 여인이 제 곁에서 고른 숨을 내쉬고 있었다. 필리프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 내려앉았지만 그리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안나의 얼굴에서 떨어진 그의 시선이 그녀의 배로 향했다. 그리 두껍지 않은 이불을 덮은 그녀의 배가 볼록 튀어나와 있었다.

    가까스로 한숨을 집어삼킨 필리프가 침대를 벗어났다. 테이블 위에 놓아둔 궐련 상자를 잡았지만, 개비를 입에 물지는 못했다.

    “…일어나셨어요.”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여전히 낯설었다. 필리프가 질끈 눈을 감았다. 이불을 정리하는 듯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조금씩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커튼도 안 치시고.”

    하얀 손이 짙은 청색 커튼을 잡는 순간, 필리프가 그녀의 손목을 쳐냈다.

    “그냥 둬.”

    “…너무 어두워서.”

    “그냥 둬.”

    어둠 속이라면 네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제대로 확인할 수 없을 테니까,

    어둠이 깊게 내려앉은 밤에만 그녀를 안고, 혹시라도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면 질끈 눈을 감아버리곤 했다. 언제부터인가 밝은 빛보다 시커먼 어둠에 익숙해진 필리프였다.

    “벌써 준비하세요?”

    상처받은 사실을 숨기려고 그녀가 애써 밝은 목소리를 꾸며내는 것이 느껴졌다.

    분노, 갈망, 가증스러움, 안타까움, 원망, 미안함. 그녀를 마주할 때마다 동시에 느끼게 되는 양가감정이었다. 혼란스러웠다. 그녀를 당장 눈앞에서 없애버리고 싶기도 했고, 모든 감정을 미뤄놓고 그저 가슴 깊이 안고 싶기도 했다.

    “착복 시종을 들여.”

    “예, 폐하.”

    안나를 외면한 채 착복 시종을 들인 필리프가 표정 없이 옷을 갈아입고 업무를 시작할 준비를 했다. 아직 오전 회의까지는 수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그녀와 함께인 공간을 떠나지 않으면 그대로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안나는 마지막까지 밝은 목소리로 필리프를 배웅했다. 끝까지 그녀에게 제대로 된 시선을 주지 않은 필리프가 빠르게 침실을 빠져나왔다.

    눈이 아닌 가슴으로 보십시오. 느끼십시오. 마음의 빗장을 풀어야 시야가 온전히 맑아질 것입니다.

    필리프가 침실에서 벗어나 황궁 복도를 걸으며 이레네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녀가 한 말의 의미가 무엇일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생각 끝에 얻은 결론은, 마음의 빗장을 푸는 것이 불가능하리란 확신이었다.

    “폐하. 다음 주 영주 방문에 대한 확답을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지난번 방문하지 못한 곳을 전부 둘러보는 것으로 하지.”

    “폐하. 방문할 영지가 상당히 많습니다. 이동 시간을 고려하면 전부 들리시기에는 시간이.”

    “아니, 전부 방문할 테니 일정을 짜도록 해.”

    “…예, 폐하. 준비하겠습니다.”

    그녀를 눈앞에 두고 마음속 혼란을 걷어낼 자신이 없었다. 당장은 숨을 쉬는 것이 먼저였다.

    * * *

    “식사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아침 식사가 차려질 시간이었다. 커튼을 살짝 걷어내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안나가 느릿하게 등을 돌렸다. 테이블 위에 접시를 내려놓는 마샤의 모습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안나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마샤?”

    커트러리를 잡은 마샤가 고개를 돌려 안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누구…….”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마샤에게로 가까이 다가간 안나가 입술을 달싹였다. 당장이라도 마샤와 자신 사이에 있었던 일과 제가 겪은 일을 전부 털어놓고, 자신의 선택을 이해시키고 싶었다.

    단단히 각오한 뒤 이 세계로의 귀환을 선택했지만, 현실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고달팠다. 자신은 이곳에서 서안나도, 안나 스완도 아니었다. 완벽한 이방인의 신세가 되어 모든 이들의 배척을 받는 상황이기에, 잠시라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만한 상대가 절실했다.

    “…제 이름을 어떻게 아시죠?”

    쉽게 입을 열지 못하는 안나를 바라보던 마샤가 주춤주춤 발을 뒤로 물렸다.

    설마, 진짜 주방에서 돌던 그 소문이 진짜 사실이었어? 이 여자가 정말로 젊은 남자의 피를 먹고 생명을 유지하는 마녀란 말이야? 마녀가 아니고서야 처음 본 내 이름을 어떻게 아는 거지?

    “그게…….”

    머뭇거리던 안나가 어렵게 입을 벌렸다.

    “미안해요. 저번에 주방장님이 요리를 가져다주시며 주방 시종들 얘기하시는 걸 들었거든요. 엿들으려던 건 아니었는데 그때 들었던 이름 중에 기억에 남는 이름이어서요. 마샤, 수잔, 아미르. 뭐, 이런 이름들이었던 것 같아요.”

    안나가 함께 일했던 주방 시종들의 이름을 섞어 변명해 보았지만, 여전히 미심쩍다는 마샤의 시선이 얼굴에 달라붙었다. 마샤가 어처구니없는 자신의 변명을 쉽게 믿지 않으리란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제 비밀을 전부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안나에게 누구보다 큰 힘이 되어주었던 마샤였지만, 자신을 배신하고 베르나 황녀와 손을 잡은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혼자의 몸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내야 할 몸속 아이를 위해 모든 일에 신중해져야 했다. 굳어 있는 마샤를 향해 싱긋 웃어 보인 안나가 테이블에 놓인 음식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오늘은 토마토 수프네요. 음식을 가져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네. 그럼.”

    은쟁반을 손에 쥔 마샤가 슬금슬금 뒷걸음쳐 침실을 빠져나갔다.

    “하아… 괜히 이름을 불러서는. 또 주방에서 한바탕 얘기가 돌겠네.”

    반가움에 마샤의 이름을 불렀던 입을 원망한 안나가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수프로 숟가락을 뻗었다. 새콤한 토마토 향에 조금씩 식욕이 돌았다.

    “음. 맛있는데? 소금 간이 아주 적당하게 잘 되었어.”

    안나가 볼록한 배를 살살 쓰다듬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매번 아침에는 채소 수프와 빵이 나오고, 점심 저녁에는 고기가 나오잖아. 아무래도 너는 고기보다 채소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아. 이건 엄마 식성하고는 전혀 다른데? 그렇다고 아빠 식성이라고 하기엔…….”

    철저하게 자신을 외면하던 필리프의 얼굴을 떠올린 안나가 크게 고개를 저었다. 서운하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홀로 남아 자신을 찾았을 그를 생각했다. 자신이 느끼는 아픔은 그가 느꼈을 고통에 비할 수 없는 크기일 것이다.

    자신이 느끼는 우울함과 무력함을 그대로 아이에게 전달해서는 안 된다. 안나가 크게 심호흡하며 차오르려는 눈물을 삼켰다.

    “이거 다 먹고 책을 좀 읽다가 가벼운 스트레칭을 할 거야. 산모에게 좋은 스트레칭을 많이 찾아봤거든.”

    어쩌면 배 속 아이를 위해서는 이 세계로의 귀환을 선택하지 않는 편이 좋을 수도 있었다. 좋은 의료 시설이 있는 원래의 세계에서 위험 없이 아이를 낳고 기르는 편이 안전한 것이 사실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지켜줄 거야. 그러니까 아무 걱정 하지 마.”

    안나가 배를 쓰다듬으며 천천히 수프 접시를 비워냈다.

    * * *

    “주치의, 마르크 헤밀입니다.”

    “아, 네. 들어오세요.”

    바닥에 앉아 가벼운 스트레칭을 하던 안나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얼굴이 흐른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몸이 좋지 않습니까? 아니, 왜 이렇게 땀을.”

    “아, 아뇨. 몸을 너무 움직이지 않는 것도 좋지 않을 것 같아서 운동을 좀 하고 있었습니다. 아주 살짝 움직였을 뿐인데 요즘 운동을 너무 안 했던 모양이에요.”

    이마에 흐른 땀을 훔쳐낸 안나가 안락의자로 향했다.

    “오늘은 침대에 눕는 편이 좋겠습니다. 정확히 맥을 짚고, 상태를 살펴보라는 폐하의 명이 있었습니다.”

    “아, 네.”

    침대에 등을 대고 누운 안나가 숨을 가다듬었다. 마르크 헤밀이 신중하게 안나의 맥을 짚고 조금씩 불러오기 시작한 배 위에 손을 얹었다.

    “살짝 내리겠습니다.”

    “네? 아, 네.”

    부른 배에 무리가 가지 않게 펑퍼짐한 드레스 안에 품이 넓은 바지를 입고 있던 안나가 배꼽 살짝 아래까지 바지를 내렸다. 늘 들고 다니는 수첩에 무언가를 적으며 신중하게 살피던 마르크가 순간 눈동자의 크기를 키웠다.

    “아니, 이게…….”

    안나의 배꼽 윗부분의 수술 흔적을 찾아낸 그가 얼굴을 낮춰 상처 자국을 살폈다.

    “아, 그거요. 그거 맹장…….”

    이십 대 중반 했던 맹장 수술 이후 배꼽 윗부분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수술 자국이었다. 이 시대에는 당연히 존재하지 않았던 수술이었으니 제대로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뭐라고 설명하는 것이 좋을까. 어떻게든 의심을 피해야 한다.

    “대체 이게 무엇입니까?”

    마르크가 황급히 안나의 배에서 손을 떼어내며 목소리를 높였다. 바지를 올려 흉터 자국을 가린 안나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수, 수술한 자국이 남은 것입니다. 그게 왜…….”

    “수술? 무슨 수술?”

    “예전 살던 곳에 있을 때 받은 수술입니다.”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럴 수 없는 일이라고 웅얼거린 마르크가 안나의 왼쪽 팔을 잡았다.

    “아니, 왜 도대체 왜 이러십니까.”

    “확인해 볼 것이 있습니다. 움직이지 마시오!”

    안나의 몸부림을 제압하고 그녀의 드레스를 걷어낸 마르크가 어깨 아래 새겨진 붉은 주사 자국을 확인했다.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무언가를 중얼거린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침실 문 쪽을 향해 소리쳤다.

    “당장 폐하를 뵈어야 합니다. 지금 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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