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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85)화 (85/139)
  • 85화

    잠에서 깨어났을 때, 안나는 필리프의 품에 안겨 있었다. 안나가 살짝 고개를 돌려 자는 필리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부쩍 야윈 얼굴이 안쓰러워 그의 뺨에 손을 얹으려다가 고개를 저으며 손끝을 물렸다.

    살짝 열린 커튼 틈에서 어슴푸레한 새벽빛이 스며들어왔다. 안나가 꾸물꾸물 느리게 그의 품을 빠져나왔다. 슬쩍슬쩍 올려다본 그의 얼굴이 동요 없이 편안해 보였다.

    꽤 긴 시간에 걸쳐 완전히 침대를 빠져나온 후에야 참고 있던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 발꿈치를 들고 조심조심 창가로 향했다. 아주 살짝 열린 창문 틈에서 싸늘한 겨울 냄새가 풍겼다.

    ‘내 곁에 머문다 해도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

    안나는 불어오는 바람만큼이나 차가웠던 필리프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의 말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의 눈에 비친 절망감을 읽어냈기 때문이었다.

    변명은 위로가 될 수 없기에, 안나는 그저 입을 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이 찰 텐데.”

    살짝 잠긴 그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안나가 열린 창문을 닫으며 돌아섰다.

    “아… 일어나셨어요.”

    베개에 뺨을 대고 누운 그가 반쯤 뜬 눈으로 안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말없이 안나를 바라보던 그가 단번에 상체를 일으켜 침대를 벗어났다. 그의 시선은 안나를 향해 있었다. 그의 눈빛에 용기를 얻은 안나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아직 날이 밝기 전이라, 더 주무셔도 될 것 같습니다.”

    대꾸하지 않은 그가 의자 머리에 걸쳐놓은 침의를 걸쳤다. 이대로 밀실로 돌아가야 하나 고민하던 안나가 걸음을 떼어내려는 순간 필리프가 그녀의 길목을 차단했다.

    “오늘부터는 건너편 방에서 지내도록 해.”

    “예?”

    “창문 하나 없는 방에서 생활하는 게, 아무래도 그리 좋지는 않겠지.”

    그의 무심한 시선이 안나의 배로 향했다가 곧 그녀의 얼굴로 돌아왔다.

    “준비되면 옮기라고 할 테니 그렇게 알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말투였다. 안나가 입을 벌리기 전에 그는 빠르게 덧붙였다.

    “그리고 주치의는 아침 식사 전에 만나봐. 오후엔 다른 일정이 있으니까.”

    사무적인 말투로 지시사항을 뱉은 그가 종 줄을 잡아당겨 수행원을 호출했다.

    “예, 폐하.”

    “마르크 헤밀을 불러와.”

    “알겠습니다, 폐하. 곧 착복 시종을 들이겠습니다.”

    필리프가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안나를 돌아보았다.

    “주치의를 만나보고 식사한 후에 거처를 옮기는 것이 좋겠어.”

    “폐하.”

    “따로 필요한 것이 있으면 수행원에게 이야기해.”

    그는 안나가 입을 열기가 무섭게 그녀의 말을 끊어냈다. 안나와 대화를 이어나갈 의지가 전혀 없어 보이는 태도였다.

    또다시 굳건하게 쌓인 마음의 벽. 과연 그 벽을 허물 수가 있을까?

    “폐하. 착복 시종을 들이겠습니다.”

    “들어와.”

    아주 잠시라도 필리프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바쁘게 옷을 갈아입은 필리프는 그대로 안나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안나가 혼자 덩그러니 남겨져 고개를 떨구고 있는데, 황제의 주치의 마르크 헤밀이 열린 문틈 사이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예? 아, 예.”

    안나를 의자에 앉힌 마르크가 바로 진찰을 시작했다. 신중히 맥을 짚고 배 이곳저곳을 누르며 통증이 느껴지는지를 물었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마르크의 질문에 성실히 답하던 안나가 불시에 얼굴을 붉혔다.

    “…네?”

    “정확한 임신 시기를 알기 위함이니 당황하실 것 없습니다.”

    “…그래도 그건…….”

    “흠. 대략 석 달은 지난 것 같은데, 맞습니까?”

    마르크는 안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태연히 관계한 날짜가 언제인지를 물어왔다. 고개를 숙인 안나가 답을 하지 못하자 마르크가 화제를 돌렸다.

    “임신 초기라 당장은 몸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들고 온 수첩에 빽빽하게 안나의 답을 적어 내린 마르크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안나에게 몇 가지 주의 사항을 일러주었고, 식사를 거르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진찰을 마친 마르크 헤밀이 침실을 나서자 황제의 수행원이 자리를 대신했다.

    “처소 이동을 도와드리겠습니다.”

    어차피 들고 갈 짐 따윈 없었다. 빈손으로 수행원의 뒤를 따라붙은 안나가 도착한 곳은, 황제의 침실에서 그리 멀지 않은 우측 끝 방이었다.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간단히 준비해 놓았습니다. 혹시 더 필요한 것이 있다면 청하십시오.”

    좀 전까지 생활하던 밀실과 비교하면 너무나도 쾌적한 공간이었다. 황제의 침실 반 정도 크기인 방에는 커다란 침대와 자그마한 테이블과 의자 두 개가 놓여 있었는데,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것은 밖이 훤히 내다보이는 커다란 창문이었다.

    테이블 앞 의자를 창가로 옮겨간 안나가 창문을 활짝 열고 선선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따사롭게 내리쬐는 햇볕이 초겨울 시린 바람을 데워주는 느낌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너무 오래 찬 바람을 쬐는 것이 좋지 않을 것 같아 창문을 닫는데, 방 밖에서 희미한 대화 소리가 들렸다. 황급히 문 앞으로 향한 안나가 문가에 귀를 가져다 댔다.

    “얘기도 없이 어쩐 일이지.”

    “꼭 찾아뵈어야 했습니다.”

    “집무실로 가지.”

    “먼저 만나봐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대화의 주인을 알아챈 안나가 느릿느릿 몸을 뒤로 물렸다. 멀리에서 들리던 대화 소리가 조금씩 또렷하게 들리기 시작하고, 예고 없이 방문이 열렸다.

    * * *

    그저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는 것뿐인데, 귓가에 이명처럼 이레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 말을 듣지 않았군요. 어리석은 선택을 한 것입니다.’

    안나는 이레네의 눈빛을 피하지 않고 맞받아쳤다.

    ‘이제는 원래의 제 모습 그대로 그의 앞에 설 것입니다. 더는 당신의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레네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말려 올라갔다. 다시 이명처럼 목소리가 울리기 시작하는데 필리프가 이레네의 앞을 막아섰다.

    “무슨 짓이지?”

    그의 미간에 험악한 골이 파였다.

    “당장 나가.”

    처음 들어보는 무시무시한 경고의 말이었다.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음성에도 동요하지 않은 이레네가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필리프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약초가 떨어졌을 텐데, 왜 찾아오지 않으셨습니까.”

    “유모.”

    “황녀님이 떠나셨지만, 아직 안심하실 때는 아닙니다. 폐하의 위치는 평생 안전하게 지켜질 수 없는 자리이니까요.”

    이레네가 매고 온 보따리에서 약초 다발을 꺼냈다. 약초로 시선을 내리지 않은 필리프가 간신히 화를 삭인 목소리를 뱉었다.

    “나가서 이야기하지.”

    빙그레 미소지은 이레네가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을 속삭이기 시작했다.

    쾅!

    순간 급작스러운 소음이 들리며 이레네와 안나 사이의 옅은 막이 쳐졌다. 주변의 소음이 완전히 걷힌 공간에 갇힌 느낌이었다.

    “시간이 넉넉지 않으니, 빨리 말하겠습니다. 당신에게 남은 시간은 다음 블루 문이 뜨기 전까지입니다.”

    옅은 막이 안나의 입을 봉해버린 것인지 그대로 굳어진 입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당신을 도와주고 싶지는 않지만, 배 속 아이의 생명은 지켜내야 하니까요.”

    필리프를 바라보는 이레네의 눈빛. 어쩌면 안나는 오래전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이레네가 어쩔 수 없이 안나가 가진 아이를 지켜내려 하는 이유는 한 가지였다. 안나의 배 속 아이는 이레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이의 아이였으므로.

    안나의 생각을 읽었다는 듯, 그녀의 눈을 바라보던 이레네가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 떠올리는 생각을 절대 입 밖으로 꺼내 놓지 마십시오. 나는 그분께 영원한 조력자로 남을 것이니.”

    안나가 간신히 굳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서두르십시오.”

    이레네가 안나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의 속삭임이 멈춤과 동시에 그녀와 안나 사이의 벽이 걷혔다. 동시에 필리프를 향해 돌아선 이레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폐하. 그럼 집무실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전히 불쾌한 낯빛을 숨기지 못한 필리프가 먼저 방을 나서고, 이레네가 느릿하게 그의 뒤를 쫓았다.

    방문이 닫히기 직전 필리프가 고개를 돌려 안나의 안색을 살폈다. 아침까지 보여 주었던 표정 없이 서늘한 얼굴이 아니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분명 걱정과 염려의 빛이 스며 있는 눈동자를 마주했다.

    느릿하게 방문이 닫히고도 필리프는 쉽게 발을 떼어내지 못했고, 한참 후에야 무거운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집무실로 들어와 이레네의 얼굴을 마주했지만, 머릿속은 온통 혼자 남겨진 그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다시 너를 사랑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한 지 고작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부러 차가운 말을 뱉으면서도 뒤로 그녀의 반응을 걱정하고, 급히 업무를 마치고는 바로 그녀가 있는 방을 찾았다. 머리와 가슴이 반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제 꼴이 우스워진 필리프는 자조의 웃음을 뱉었다.

    “폐하가 황태자로 임명되던 해 가을 즈음이었을 것입니다.”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는 필리프를 바라보던 이레네가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는 어렸을 때부터 승마를 참 좋아하셨습니다.”

    승마는 필리프가 황태자가 되기 전부터 느끼기 시작한 압박감을 해소하는 유일한 취미가 되어주었었다.

    “폐하가 아끼던 말을 타시다가 낙마하셨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필리프가 오른쪽 무릎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그건 왜.”

    말의 발정기를 눈치채지 못한 것이 실수였다. 흥분한 말은 트랙을 벗어나 제멋대로 날뛰기 시작했고, 고삐와 박차를 다루는 것에 능숙하지 못했던 필리프는 그대로 낙마하여 다리를 심하게 다치고 말았다.

    “당시 수술을 두고 의견이 팽팽하게 나뉘었었습니다. 수술이 잘못되면 평생 다리 한쪽을 제대로 쓰지 못할 위험이 있었기에, 약초 치료로 버텨야 한다는 의견이 대다수였습니다. 그때 폐하께서 강력하게 수술을 받겠다고 주장하지 않으셨다면, 아마 지지부진한 약초 치료를 받으며 시간을 허비했을지도 모릅니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필리프는 빠르게 다리를 회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대로 두면 덧날 것이 분명한 상처입니다. 아니, 영영 회복하지 못할 정도로 악화할지도 모릅니다.”

    상처가 영영 아물지 않기를 바랐다. 지금 눈앞의 여인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사랑했던 안나를 배신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안나뿐이었다. 마지막 사랑이라 생각했다. 다시 태어나도 누군가를 이 정도로 사랑할 수는 없을 것이라 느꼈다.

    “눈이 아닌 가슴으로 보십시오. 느끼십시오. 마음의 빗장을 풀어야 시야가 온전히 맑아질 것입니다.”

    한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필리프가 그대로 몸을 일으켜 집무실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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