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84)화 (84/139)

84화

안나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닫힌 문 앞에서 한 걸음 물러섰다. 처음 이 세계로, 그에게로 돌아오기를 결심하며 늘 자기 자신에게 되뇌었던 말은, 어떠한 상황에도 조바심을 부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필리프가, 사랑했던 이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한 자신을 쉽게 받아줄 리 없다는 것도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었다. 그래서 천천히 그를 설득하고 자연스럽게 자신을 받아줄 날을 기다리려 했다.

침대 옆 간이 의자에 앉은 안나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필리프의 침실 바로 옆 밀실에서 생활한 지 삼 일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그는 늦은 밤 안나가 방문을 열었을 때만 그녀를 바라봐 주고 있었다.

새카만 어둠 속 촛불 하나에 몸을 의지한 채 그는 의식적으로 눈을 뜨지 않고 안나의 체취를 맡고, 그녀와 몸을 겹치고 체온을 나누었다. 서글프고 가슴 아팠지만, 애처로운 그의 손길을 차마 뿌리칠 수가 없었다.

“…앗.”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배의 통증에 안나가 몸을 잔뜩 웅크렸다. 아직 본격적인 태동이 시작되지는 않았지만, 이따금 배가 찌르는 듯한 통증이 찾아들었다.

“아… 하아…….”

이번에는 그 통증이 조금 심했다. 날카로운 바늘이 배 안쪽 이곳저곳을 쿡쿡 찌르는 듯한 느낌에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주룩 흘러내렸다.

“…미안, 미안.”

이 세계로 돌아오기 전, 임신과 관련된 책을 수십 권 읽고 알아둬야 할 것들을 꼼꼼히 살펴두었던 안나였다. 임신 초기에 아랫배 통증이 느껴지는 것은 지극히 정상이었지만, 이때마다 아이에게 죄책감이 느껴졌다.

의료 시설이 훨씬 발달한 원래의 세계에서 필리프를 찾지 않고 아이를 건강하게 키우는 것이 옳은 선택이 아니었을까. 나 하나의 욕심으로 만에 하나라도 아이가 위험에 처하기라도 한다면.

“아냐. 절대 그럴 일은 없어.”

크게 고개를 저은 안나가 고통이 잦아드는 배를 살살 쓰다듬었다.

“아무 걱정하지 마. 엄마가 끝까지 지켜줄게.”

안나가 애써 밝은 목소리를 내며 오래도록 배를 쓰다듬었다. 안나의 목소리에 응답하듯 배 속에서 작은 움직임이 느껴지는 것도 같았지만, 그것이 아이의 움직임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움직인 거야? 설마, 진짜 움직인 거야?”

어쩐지 조금 얼떨떨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한 기분에 안나가 상체를 잔뜩 구부렸다. 귀에 배를 붙이고 싶었지만, 가능할 리 없는 자세였다.

“한 번만 더 움직여 줄 수 있어? 딱 한 번만.”

안나가 양손을 배에 가져다 대고 아이가 움직여 주길 기다리는데,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셨어요.”

매일 같은 시간, 하루에 세 번 밀실의 방을 두드리는 이는 카라나 주방장이었다.

“속이 부담스럽지 않게 죽과 채소를 준비했습니다. 저녁에는 고기를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매번… 너무 감사합니다.”

카라나에게서 쟁반을 받아든 안나가 그녀에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전했다. 잠시 안나의 얼굴과 그녀의 배를 응시하던 카라나가 등을 돌리려다가 발을 멈추었다.

“불편한 곳은 없습니까.”

“네? 아, 예. 괜찮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녁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저, 잠시만.”

안나가 밀실을 나서려는 카라나의 소매를 붙들었다.

“부탁 하나만 드리고 싶습니다.”

“부탁이요?”

황궁에 도착한 이후 내내 소식을 궁금해했지만, 누구에게도 물을 사람이 없었다. 안나가 무사히 필리프를 만날 수 있었던 데에는 헬렌의 도움이 컸다.

“제가 황궁에 오기 전에 잠시 머물렀던 곳이 있는데, 시내에 있는 선술집입니다. 그곳 사장님 소식이 궁금해서… 실례인 줄은 알지만, 제가 따로 물을 곳이 없어서요.”

안나가 들고 있던 쟁반을 다시 받아든 카라나가 그녀 대신 테이블을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저도 황궁에 매여 있는 몸이라, 황궁 밖 소식을 속속들이 알기는 어렵습니다.”

“…예.”

“아는 사람이 있는지 알아는 보겠지만, 너무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예, 감사합니다.”

“아이를 위해서라도 음식은 식기 전에 드십시오. 그럼.”

카라나가 밀실을 나서고 홀로 남은 안나가 쟁반 덮개를 열었다. 고소한 쌀 냄새가 작은 밀실 안을 가득 채웠지만, 그다지 식욕이 생기지는 않았다.

“그래도 힘내려면 먹어야겠지?”

배를 부드럽게 쓰다듬은 안나가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 * *

여느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표정으로 일과를 마친 필리프가 침실로 향했다. 문 앞에 멈춰 선 그가 뒤따르던 수행원을 돌아보았다.

“오늘 식사는 하지 않을 테니 부를 때까지 물러서 있어.”

밀실에 여자를 들인지 삼 일째. 황제는 예상과는 달리 행동에 큰 변화를 보이지 않았지만, 여자의 일에 관해서 만큼은 유독 날 선 반응을 보이곤 했다. 황궁 시종에 이어 마녀라는 소문이 도는 여자를 가까이 두는 것이 염려스러웠지만, 함부로 말을 전하기가 어려웠다.

“그럼… 간단한 다과를 준비하겠습니다.”

“필요 없어.”

수행원의 말을 자른 필리프가 침실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열어둔 창문으로 들어온 싸늘한 초겨울 바람 때문인지, 테이블에 놓아둔 서류가 어지럽게 흩뜨려져 있었다. 바로 테이블 옆 진열대로 향한 필리프가 반쯤 남은 증류주 병을 집어 들었다.

‘제발… 제발 저를 제대로 봐 주십시오.’

울음기 가득한 목소리가 가여웠지만, 눈을 뜨지 않았다.

‘한 번만… 한 번만…….’

그녀의 눈가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가슴 앞섬을 축축하게 적셨지만, 눈을 뜰 수가 없었다.

“하아아아…….”

평소보다 이르게 취기가 오르며 몸이 나른해지기 시작했다. 잔을 치운 필리프가 술병을 그대로 입에 가져다 댔다. 흐리멍덩해진 시야였지만, 밀실 문만큼은 또렷하게 보였다.

아직 부족해.

필리프가 텅 비어 있는 진열대를 멍하게 올려다보았다. 지난 사흘 동안 진열대 위의 술을 거의 비워내고 남은 것은 베르나의 결혼식을 위해 준비했던 벌꿀 주뿐이었다. 비틀비틀 진열대로 향한 필리프가 급히 벌꿀 주 뚜껑을 벗겨냈다.

조금 더 시야가 흐릿해지길 바라며 벌꿀 주를 비워냈다. 커다란 술병을 바닥 끝까지 비워내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 이십 여분이었다.

탁.

침대 옆 촛불이 끔찍하게 밝았다. 몸을 일으킨 필리프가 침대를 향해 걷는데, 흐느적거리는 걸음이 바닥에 쩍쩍 달라붙는 것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후.”

촛불을 끄니 침실 안에 완벽한 어둠이 찾아들었지만, 여전히 어지러운 혼돈이 시야를 희롱했다.

그래. 이 정도면 됐어.

몽롱해지는 시선을 달가워하며 필리프가 힘겹게 몸을 움직였다. 그가 향한 곳은 밀실 문 앞이었다. 어차피 밖에서 절대 열 수 없는 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힘주어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르게 문고리가 돌아갔다.

문 안쪽에 선 그녀가 함께 문고리를 잡은 것이 느껴졌다.

순간적으로 밀실 안 밝은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필리프가 그대로 눈을 감고 제 앞에 선 여인에게로 손을 뻗었다.

응당 마주 잡아 와야 할 손이 잡히지 않아 다시 길게 손을 뻗었다. 손끝에 부드러운 천이 스쳤지만, 여전히 온기는 와 닿지 않았다.

“눈을 뜨십시오.”

물기 어린 목소리가 아니었다. 감았던 눈을 뜬 필리프가 고개를 틀었다. 시야에 그녀가 입은 푸른 드레스 끝자락이 보였다.

“묻고 싶은 것이 있으면 물으시고, 듣고 싶은 것이 있으면 들으셔야 합니다.”

아니, 나는 아무것도 묻고 싶지 않고, 어떤 것도 듣고 싶지 않아.

필리프는 거칠게 고개를 흔들며 양팔을 뻗었다. 안나의 마른 어깨가 손끝에 잡히는 것을 느끼며 빠르게 그녀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지난 사흘간 순순히 제 품에 안겼던 그녀가 악을 쓰며 발악하기 시작했다.

“이 손 놓으십시오!”

그녀가 목소리를 높이며 필리프의 품을 빠져나가려 안간힘을 썼다. 억지로 입을 맞추고자 고개를 숙였지만, 그녀는 입술을 앙다물며 얼굴을 피했다.

발악하는 그녀를 잠잠하게 만드는 일은 조금도 어렵지 않았지만, 그녀에게 무력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필리프가 야윌 대로 야윈 그녀의 목덜미를 잡은 손에서 조금씩 힘을 풀었다.

“…왜…….”

그녀의 몸에서 떨어진 손이 허공을 배회하다 맥없이 떨구어졌다. 필리프의 시선은 여전히 허공 어딘가를 향해 있었다. 필리프의 품 안을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멈춘 그녀가 그의 턱밑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 순간, 가슴 속 무언가가 울컥 토해졌다.

“왜 나를 떠났어! 대체 왜!!!”

필리프가 고개를 돌려 안나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정말 네가 그녀라면. 네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필리프의 검은 눈동자에 분노와 광기가 일렁였다. 내내 억누르고 있었던 그녀를 향한 원망과 배신감이 한꺼번에 수면 위로 솟아올랐다.

“대답해! 대체 왜!!!”

필리프가 놓았던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낭창한 몸뚱어리가 손쉽게 딸려 왔지만, 이번에는 그의 손을 뿌리치려 하지 않았다. 그녀의 어깨를 잡은 손마디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저는.”

“왜…….”

네가 정말 그녀라면 대체 왜.

필리프가 다시 신음처럼 물으며 미움과 원망이 섞인 복잡한 눈동자로 안나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간신히 눌러 참고 있던 가슴 속의 불덩이가 한꺼번에 목구멍으로 토해졌다.

날카로운 칼날로 심장이 찢기는 것 같은 괴로움을 느끼면서도, 이대로 그녀를 눈앞에서 없애버릴 수 없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안나를 안은 손이 덜덜 떨렸다. 주체하지 못하고 떨리는 팔 안에서 안나가 그대로 바닥에 미끄러져 내려갔다. 후두둑 떨어진 필리프의 눈물이 안나의 정수리를 적셨다.

“…폐하의 곁에서 증명해내겠습니다. 제가… 반드시!”

믿어지지 않아. 아직 네가 그녀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어. 그럼 네 배 속의 아이가 내 아이란 말이야? 아니, 믿을 수 없어. 전부. 그러니까.

“내 곁에 머문다 해도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

필리프는 안나의 말을 토막 내듯 끊어냈다. 그녀의 얼굴을 확 가까이 끌어당기며, 다시 이 악문 목소리를 뱉었다.

“…절대로.”

선택을 그녀에게 떠넘기는 것, 어쩌면 비겁한 회피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방법밖에 없었다. 처참하게 찢기고 발겨진 심장을 꿰매도 얼룩덜룩한 상처가 남을 테니, 차라리 바늘을 대지 않는 편이 나을 수도 있겠다고.

가만히 바닥을 내려다보던 안나가 고개를 들었다. 필리프가 천천히 상체를 낮추며 고통스럽게 일그러져 있는 그녀의 얼굴을 마주했다.

“…상관없습니다.”

그녀의 작은 고개가 끄덕여지고, 필리프가 떨리는 손으로 안나를 끌어당겼다. 처절한 울음이 고인 그의 품 안에서 안나는 눈을 감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