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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83)화 (83/139)
  • 83화

    한곳에 고정된 필리프의 시선이 움직여지질 않았다. 초상 속 얼굴이 희미하게 보일 때마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다시 초상화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얼마나 바라보고 있었을까. 머리가 어지럽고 구역질이 날 것 같은 기분을 느낀 후에야 필리프의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밤이 깊었지만, 도저히 잠자리에 들 수가 없었다. 혹시 잠이 들어 닫힌 문이 열리는 것을 보지 못한다면, 안나가 사라졌을 때처럼 밀실 안 여자도 사라져 버린다면. 그렇게 된다면.

    “하아…….”

    의자를 박차고 자리에서 일어선 필리프가 밀실 문을 가리고 있던 초상화를 완전히 걷어냈다. 문에 귀를 가까이 대었지만, 작은 소음 하나 들려오지 않았다. 어차피 열리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문손잡이를 그러쥐고, 하얗게 힘이 들어간 손등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뭘 하고 싶은 거야. 대체.”

    여자를 밀실에 들인 이유는, 그녀를 자신의 가까이에 두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여자의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믿어지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녀를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을 장소에 데려다 놓고, 머릿속 혼란을 정리할 시간을 벌고 싶었다.

    지친 발걸음을 옮겨 창가로 다가간 필리프가 선반 최상단에 보관해 놓은 과실주 병을 집었다. 언젠가 안나와 함께 마시려 준비해 놓았던 술병에 뽀얀 먼지가 쌓여 있었다.

    크리스털 잔 가득 과실주를 따르고 출렁이는 붉은색 술을 한 번에 입안에 털어 넣었다. 액체가 부드럽게 목구멍을 넘어가기가 무섭게 다시 잔에 술을 따랐다. 커다란 과실주 병이 완전히 비어 버릴 때까지 필리프는 쉴 새 없이 술을 들이켰다.

    뱃속이 점점 뜨끈하게 달아올랐지만, 취기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필리프가 새 과실주 병의 뚜껑을 열고 잔을 채우는데, 방 건너편에서 희미한 인기척이 들려왔다.

    들고 있던 잔을 조심스럽게 탁자 위에 내려놓은 필리프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밀실 문 앞으로 다가갔다. 문고리가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

    달칵. 느릿하게 돌아가는 손잡이에 매달려 있던 시선을 끌어올렸다.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고개를 내민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필리프의 모습을 보고 놀란 것인지 여자가 바로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이 후두둑 바닥으로 떨어졌다.

    촛불 하나만이 켜진 방안이 지독하게 어두웠다. 어둠에 가려져 그녀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은 끝난 건가?”

    말이 곱게 나오지 않았다. 자기 자신도 놀랄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가 여과 없이 흘러나왔다. 느릿하게 고개를 든 그녀가 필리프와 눈을 맞추었다. 새빨갛게 충혈된 눈동자에 다시 가득 눈물이 차오르는 것이 보였다.

    “내가 했던 말을 그새 잊은 것은 아닐 테고. 생각을 정리했으니 방을 나선 것이겠지.”

    바닥에 두었던 시선을 끌어올린 필리프가 여자의 앞으로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섰다. 살짝 몸을 움츠렸던 그녀가 길게 심호흡한 후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둠에 가려져 있던 그녀의 얼굴이 조금 더 자세히 보였다.

    “제가 했던 말이 전부 다른 이에게 들은 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녀가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감이 서질 않았다. 머릿속은 여전히 혼란으로 가득했다.

    “내가 너에게 질문할 기회를 주었던가? 내가 너에게 준 것은…….”

    필리프가 다시 그녀에게로 한걸음 가까이 다가섰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훌쩍 좁혀지고, 무릎을 굽힌 필리프가 그녀의 얼굴 코앞으로 자신의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댔다.

    “제대로 설명할 기회뿐이야.”

    그녀가 잔뜩 일그러진 필리프의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한참 필리프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던 그녀가 크게 눈꺼풀을 깜빡여 눈물방울을 털어 없애고 단호한 목소리를 뱉었다.

    “할 수 있습니다. 하겠습니다.”

    살짝 시선을 내리니 움켜잡은 하얀 주먹이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그녀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지만, 바르르 떨리는 그녀의 입술이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초조함을 견디지 못한 필리프가 그녀에게서 한 걸음 물러서며 실소했다.

    “그래서 이대로 계속 시간을 끌 건가, 아니면 남은 방법을 보여 줄 건가.”

    빈정대는 날카로운 어투에 살짝 어깨를 떤 그녀가 결심한 듯 걸음을 떼어냈다. 반 발자국, 또 반 발자국, 느릿하게 필리프와의 간격을 좁혔다.

    “눈을 감아 보시겠습니까.”

    필리프의 얼굴을 올려다본 안나가 담담하게 말했다.

    “뭐?”

    “폐하를 설득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순간 공간 안의 공기가 서늘해짐을 느꼈다. 뭐라 말을 할 것처럼 입을 벌렸던 필리프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온몸이 기묘한 열에 들뜨는 기분이었다.

    “…너.”

    눈꺼풀에 힘을 실은 필리프가 안나의 뺨 가까이 손을 올렸다.

    “기회는 한 번뿐임을 기억하는 게 좋을 거야.”

    차마 그녀의 뺨에 닿지 못하고 손을 떨군 필리프가 천천히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일지. 어쩌면 이 모든 것이 환영이 아닐까 생각했다. 안나를 향한 사무친 그리움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라고. 손을 대면 이 모든 것이 그대로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필리프.”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가슴 속에 무거운 울렁거림이 퍼지기 시작했다. 옅은 신음이 입술 사이를 가르는 순간, 차가운 온도를 지닌 손가락이 제 손등을 스쳤다.

    “절대 속일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실바람처럼 옅게 귓가를 간지럽히는 목소리. 가슴 속 울렁거림이 몸 전체로 퍼져나갔다.

    이 감정은, 이 느낌은.

    “그러니… 눈으로 보지 말고 마음으로 느껴 주십시오.”

    온몸으로 퍼졌던 울렁거림이 심장에 집중되기 시작했다. 땀이 배어 나오는 손바닥을 힘주어 말아쥐는데, 그녀의 손가락이 부드럽게 필리프의 손등을 쓸어내렸다. 그녀가 자연스럽게 힘이 풀린 필리프의 손을 공중에 들어 올렸다.

    손가락 사이로 그녀의 손가락이 단단히 얽혀 들었다. 순간적으로 몸이 움찔 굳었지만, 잡힌 팔을 빼고 싶지는 않았다.

    “아아…….”

    확신할 수 있었다. 너무나도 그리워했던, 다시 느낄 수만 있다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어놓아도 좋을 것만 같던 그녀의 온기였다.

    순간 그녀를 그대로 안아버리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꼈지만,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가까스로 욕망을 삼켜냈다.

    “…하아…….”

    정성스럽게 필리프의 손등을 쓸고, 매만지던 그녀의 손이 느릿하게 떨어져 나갔다. 필리프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려는데, 자그마한 손바닥이 한발 앞서 그의 시야를 가렸다.

    “쉬이…….”

    아이를 어르는 것처럼 나긋나긋한 목소리였다. 그녀가 다시 힘이 풀린 필리프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손을 얽었다. 땀이 밴 필리프의 손바닥이 낙하한 곳은 그녀의 배 위였다.

    “…아…….”

    필리프가 그녀의 배에 닿았던 손을 거둬들였다. 말랑한 배에 손이 닿자, 정수리 끝에서부터 짜르르 전류가 흐르는 기분이 들었다. 순간 몽롱했던 정신이 놀랄 정도로 맑아지기 시작했다. 마치 수면의 경계에서 흐물거리던 순간 귓가를 때리는 자명종 소리를 들은 기분이었다.

    “…제발…….”

    간절함을 담은 목소리가 들렸다. 꽉 닫혀 있던 필리프의 눈꺼풀이 떠지고 흔들리던 눈동자에 힘이 들어갔다. 갈라진 입술 사이로 마른 웃음을 뱉으며 눈앞의 여인을 똑바로 마주했다.

    숨소리만 들어도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을 정도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안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가슴이 말하고 있었다. 지금 제 앞에 선 그녀가 자신이 사랑했던 이가 확실하다고.

    “…제발… 제…….”

    필리프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그녀가 도리질을 치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필리프가 여전히 머뭇거림이 남은 손을 그녀의 눈가에 가져다 댔다. 미지근한 눈물을 닦아냈지만, 그녀는 곧 눈가에 빠르게 눈물을 매달았다.

    믿고 싶은 마음과 믿고 싶지 않은 마음. 마음속의 갈등을 드러내듯 안나의 뺨을 훑는 필리프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나는.”

    말문을 뗀 필리프의 얼굴을 올려다본 안나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의 입에서 뱉어질 다음 말을 듣고 싶지 않은 듯 귓가에 손을 가져다 댔다.

    “…나는.”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훑던 필리프의 손이 조심스럽게 그녀의 목덜미로 이동했다. 분명 손에 닿는 살결의 촉감도 목덜미의 형태도 안나와는 달랐지만, 한 번 뻗어진 손을 멈출 수가 없었다.

    필리프의 손이 안나의 얼굴을 강하게 끌어당겼다. 단단한 품에 넘어지듯 몸을 떨군 안나가 눈을 들어 올리는 순간, 그녀의 양 뺨을 감싸 쥔 필리프가 그대로 입을 맞췄다.

    “읏―!”

    힘이 풀린 몸이 바닥으로 미끄러질 뻔했지만, 오른손을 내린 필리프가 안나의 허리를 단단하게 휘어 감았다.

    “…흣.”

    그는 안나의 입안 속살을 제멋대로 헤집고, 안쪽 빨간 속살을 거칠게 빨아들였다. 입술과 입 안 전체를 물어뜯을 기세로 곳곳에 잇자국을 냈다. 뜨거운 입안에서 퍼지던 열기가 온몸으로 번져 그대로 녹아버릴 것만 같았다. 숨을 쉴 여유 따윈 없었다. 숨을 쉬는 순간조차 아깝게 느껴졌다.

    “…자, 잠시… 흣!”

    숨을 쉬지 못해 질식해버릴 지경이었다. 안나가 입술을 모아 힘을 주며 숨을 쉬려 해 보았지만, 떨어지려는 입술을 그가 단단한 이로 잡아채 버렸다.

    그의 어깨에 매달려 부들부들 몸을 떨며 간신히 코로만 호흡했다. 조금의 틈도 없이 맞닿은 몸이 들썩거릴 정도로 거칠고 집요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부족한 숨을 더는 견뎌내지 못할 지경이 되어서야 그가 안나의 뒷머리를 잡은 손에 힘을 풀어 주었다.

    “…하아… 하…….”

    안나가 필사적으로 숨을 몰아쉬었다. 여전히 입술이 맞닿아, 내뱉는 숨이 고스란히 그의 입가에 흩어졌다. 그는 눈을 뜨지 않은 채로 억눌린 숨을 삼키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그의 눈을 마주 보고 싶었지만, 힘주어 감긴 눈꺼풀이 들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조금씩 거칠어졌던 호흡이 안정되는 것을 느낀 그가 다시 기다란 혀를 안나의 입안 깊숙이 찔러넣었다.

    “…흐읏―!”

    이미 얼얼해진 턱이 저항 없이 벌어지며 두툼한 혀를 받아들였다. 다급하고 성마른 혀의 움직임에 박자를 맞추는 것은 무리였다. 그의 어깨에 더듬더듬 팔을 올려놓으며 온몸에 힘을 풀었다. 그가 뾰족하게 힘주어 세운 혀를 안나의 입안에서 느리게 빼내었다가, 다시 거세게 찔러 넣기를 반복했다.

    둘 곳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안나의 혀를 이로 가볍게 물어 당겼다. 아마 그 순간이었던 것 같다. 머릿속에 부유하던 모든 생각이 멈춰 버린 것은. 그를 떠난 이후 내내 안나를 괴롭히던 마음속의 불안은, 잠시 미뤄 놓아도 좋을 것 같았다.

    “하아… 아아아…….”

    그도 자신만큼이나 호흡이 거칠어져 있었지만, 맞닿은 입술을 떼어 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도 자신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필리프는 안나가 뱉는 신음마저 남김없이 먹어 삼켰고, 안나도 다시는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강하게 필리프의 어깨에 매달렸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입맞춤이었다. 저장했던 숨을 모두 다 내놓았을 때쯤 그의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그의 입술이 떨어져 나간 아쉬움 때문인지, 적나라했던 마찰 때문인지 젖은 입술의 욱신거림이 멈추질 않았다.

    “…하아…….”

    눈꺼풀을 들어 올린 안나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먼저 살짝 벌어져 뜨거운 숨을 뱉는 붉고 맵시 있는 입술이 보였고, 땀방울이 고인 높은 콧대가 보였다. 안나가 조심스럽게 시선을 위로 끌어 올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뜨겁게 끓어오르던 심장이 순식간에 차게 식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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