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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82)화 (82/139)
  • 82화

    잠에서 깼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어쩌면 꿈이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허리를 그러쥐는 순간 온몸에 극도의 전율이 일었다.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이고 싶었다. 머릿속에 치미는 경고를 무시한 채.

    차라리 앞이 보이지 않는다면 어땠을까.

    시야에 보이는 낯선 여인의 모습을 마주하며 필리프는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어이없는 생각을 했다. 눈이 보이지 않았다면 조금 더 쉽게 그녀를 안은 손에 힘을 실을 수 있지 않았을까. 가까스로 그녀를 밀어냈지만, 자신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참담했다. 마치 눈 앞을 가리던 안개가 걷혔지만, 결국 자신의 앞이 절벽이었음을 깨달은 기분이었다.

    “…저는.”

    빨간 입술이 벌어진 지 한참이었지만, 망설임의 시간이 길었다. 인내심은 이미 오래전에 한계에 다다랐지만, 필리프는 참을성 있게 벙긋거리는 입술을 응시했다.

    “…서안나입니다.”

    쿠쿵!

    그녀가 말을 뱉기가 무섭게 번개가 내리쳤다. 공간의 명암이 뒤바뀌는 찰나의 순간, 낯선 그녀의 얼굴이 안나 스완의 모습으로 뒤바뀌는 것을 느꼈다.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제 말을 믿어주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안나 스완의 몸에 빙의되었습니다.”

    그녀는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느리게 움직이는 그녀의 빨간 입술도, 요란스러운 빗소리로 채워진 공간도 전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뭐?”

    “하나하나 설명하고 싶습니다. 폐하께서 제 말을 믿어주실 때까지…….”

    거기까지였다. 마침내 필리프의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하고 말았다.

    “하.”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필리프의 실소가 안나의 말을 끊어냈다. 잠시 말을 멈춘 그녀가 이내 입술을 벌렸지만,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필리프가 손가락을 들어 안나의 입술을 막았다. 그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해 있었다.

    “그쯤 해 두지.”

    “폐하.”

    잠시 숨을 삭인 필리프가 억눌린 목소리로 한 글자 한 글자 끊어 말했다.

    “내가 네 목숨을 살려 둔 건 적어도 네가 진실을 말할 것이란 생각 때문이었어.”

    “…저는.”

    “좀 전까지 생사를 넘나든 사람이 하는 말치고는, 너무 허무맹랑한 소리 아닌가?”

    가늘게 뜬 눈으로 안나를 응시하던 필리프가 빗물이 내리치는 창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빗줄기가 온 힘을 다해 비명을 내지르는 듯했다.

    “임신했다던데.”

    지나가는 듯 무심한 말투였다. 번쩍 고개를 든 안나가 여전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배 속 아이에게는 잘못이 없으니, 목숨은 살려 주도록 하지.”

    얼핏 들으면 감정 없는 무덤덤한 목소리였지만, 그가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한 분노를 어렵게 감추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 줄 테니, 다시는 내 눈에 띄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시간이 많지 않았다. 무슨 말이든 그를 이해시킬 만한 말을 꺼내 놓아야 했지만, 정제되지 않은 생각이 하나로 뭉쳐지질 않았다. 입술을 아프게 깨물었다 뗀 안나가 다급히 말을 뱉었다.

    “감히 폐하의 이름을 불렀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굳어 있던 그의 등이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제 신분도, 모습도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고 느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필리프. 필리프. 필리프.

    그의 입을 통해 듣는 자신의 이름이 너무나도 특별하게 느껴졌던 것처럼, 제 입에서 나오는 그의 이름도 조금은 가치 있는 것처럼 들리기를 바랐던 순간이었다.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폐하가 제게만 보여 주시는 눈빛을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될 것 같았으니까요.”

    창밖을 향해 서 있던 그가 천천히 등을 돌렸다. 어둠에 가려 그의 표정이 보이지 않아,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역시도 믿기 힘들었던 일을 폐하가 쉽게 믿어 주시리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네가 안나 스완이라는 사실을, 나보고 믿으라는 건가?”

    그가 안나를 향해 걸으며 말했다. 그의 얼굴 가득 드리워진 어둠이 걷히고, 억눌린 혼돈으로 가득한 표정이 자세히 보이기 시작했다.

    “설명하겠습니다. 제게 시간을 주시면 전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안나가 간절함을 담아 필리프의 소매를 잡아 쥐었다. 그의 시선이 안나의 얼굴에서 잡힌 자신의 손목으로 이동했다. 잠시 그대로 안나의 손등을 내려다보던 필리프가 털어내듯 그녀의 손을 쳐냈다.

    “시간을 달라…….”

    안나에게서 눈을 돌린 그가 그녀가 했던 말을 느리게 읊조렸다.

    “그래. 시간을 주지. 어디, 설명해 봐.”

    테이블 의자로 이동한 그가 의자 등받이에 느긋하게 등을 기댔다. 땀이 밴 손바닥을 치마에 문질러 닦은 안나가 조심스레 필리프의 곁으로 다가갔다.

    “…처음 폐하를 뵈었을 때 제게 다시 한번 앞을 가로막는다면 오늘만큼 운이 좋지 못할 것이란 말을 하셨습니다.”

    한번 말을 시작하니 놀랄 정도로 차분하게 마음이 가라앉았다. 황궁에서 생활하며 그와 함께 보냈던 시간은 모두 안나의 머릿속에 빠짐없이 저장되어 있었다. 생애 가장 행복했던 시간을 이야기하는 그녀의 입가에 자연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그래서 제가 마사지를 해 드렸습니다. 그때 너무 피곤해 보이셨거든요.”

    그의 시선은 안나의 얼굴이 아닌 허공 어딘가를 향해있었다. 그가 자신을 바라봐 주기를 바라며 안나가 말을 이었다.

    “굳이 저한테도 마사지를 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때는 정말.”

    “그만!”

    크게 고개를 저은 필리프가 안나의 말을 끊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숨을 쉴 수 없을 것처럼 가슴이 조여들었다.

    “황녀님의 결혼 전 연회를 준비하며 일하는 도중 우연히 그곳을 지나시던 폐하와 눈이 마주쳤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만!”

    필리프의 머릿속에도 똑똑히 남아 있는 기억이었다. 안나가 자신의 곁을 떠나고 홀로 남은 시간이 되면 몇 번이고 꺼내어 되짚었던 추억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안나와 자신만의 기억, 시간이었다.

    “밖에 누구 있는가!”

    “예, 폐하.”

    다급한 황제의 호출에 수행원이 빠르게 별실 안으로 들어섰다. 필리프의 손가락이 안나를 가리켰다.

    “이 여자를 당장 이곳에서 내보내. 당장!”

    * * *

    황제가 중앙 회의실로 들어선 이후에야 수행원이 내내 참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그를 뒤따르던 호위병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그 여자를 어디로 옮겨야 할지 말씀해 주셨습니까.”

    “아직 말씀이 없으십니다. 여쭈어도 답이 없으시니, 잠시 기다리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안나를 내보내라 지시한 황제였지만, 그녀를 어디로 보내야 할지 지시하지는 않았다.

    “다시 탑에 가두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제가 회의 이후에 다시 여쭈어보겠습니다.”

    수행원은 탑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던 여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던 황제의 표정을 떠올렸다. 이에 여자를 사지로 몰아넣어서는 안 된다는 확신이 들었기에 그녀를 황궁 서쪽 끝 방으로 이동시켰다.

    “시작하지.”

    호위병과 이야기를 나눈 수행원이 회의실 문 가까이 바짝 다가섰다. 문밖으로 회의의 시작을 알리는 황제의 목소리가 들렸다. 황궁 시종이 떠나고 드디어 되찾았다고 생각했던 안정감. 그 안정감이 다시 흔들릴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초조하게 회의가 끝나길 기다리길 한참. 드디어 회의실 문이 열리고 황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굳은 표정의 황제는 수행원이 입을 떼어내기 전 먼저 말문을 열었다.

    “밀실을 정리해.”

    황제의 침실 한쪽 벽면에는 선황의 커다란 초상화가 걸려있었는데, 이 초상화는 침실과 밀실을 통하는 문을 가리기 위한 용도였다. 선황이 혹시 모를 습격에 대비해 만들어 놓은 공간이었지만, 필리프가 황제가 된 이후로는 단 한 번도 밀실의 문이 열린 적이 없었다.

    “그 여자를 밀실에 데려다 놓도록.”

    “알겠습니다, 폐하.”

    고개를 끄덕인 황제가 다음 일정을 위해 남쪽 통로로 발을 옮겼다. 그를 뒤따르는 호위병 무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서 있던 호위병이 급히 몸을 틀어 여자가 있는 서쪽 끝 방으로 향했다.

    * * *

    일단 문을 닫으면 밖에서는 절대 안으로 들어갈 수 없게 설계된 밀실 문이었다. 단단히 닫힌 밀실로 들어가는 방법은 두 가지. 밀실 안에 있는 이가 문을 열어 주거나, 밀실 바닥과 연결된 지하 통로를 통과하는 방법이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 수없이 많은 지하 계단을 오르고 오른 수행원이 한 시간 반 만에 밀실 바닥으로 통하는 통로에 도착했다.

    끼이이익.

    불쾌한 마찰음 소리와 함께 철문이 열리고, 간신히 몸을 통과시킬 만한 구멍을 통해 밀실 안에 들어섰다.

    수년간 그대로 방치되어 온 밀실은 먼지로 가득했다. 수행원이 메고 온 가방을 열고 간단한 청소 도구를 꺼내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밀실의 존재 여부를 아는 이가 한정되어 있어, 황궁 시종들을 불러 청소를 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간단히 먼지를 걷어내고 오래된 침구를 걷어낸 수행원이 황제의 침실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미리 침실에 가져다 둔 침구를 옮겨 놓고 시계를 올려다보니 어느덧 황제의 일정이 끝나갈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먼지가 많이 쌓였을 테니 깨끗하게 정리하도록 해. 조만간 방 안에 창문을 설치할 테니 그렇게 알고.’

    ‘알겠습니다, 폐하.’

    여자를 밀실에 데려다 놓으라 명한 황제는 방을 꼼꼼하게 정리할 것을 명했다. 황제가 어째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인을 이리도 걱정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신은 늘 그랬듯 황제의 명에 의심 없이 복종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먼지를 한참 걷어내고 오래된 침구를 시종에게 넘긴 수행원이 안나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호위병들에게 눈짓했다.

    “자, 이제 모두 물러가십시오.”

    호위병을 물리고 직접 안나를 황제의 침실에 들인 호위병이 그녀의 팔을 부축해 걸음을 옮겼다. 검은 천이 그녀의 눈가를 가리고 있었다.

    “앉으시오.”

    안나를 침대에 앉게 한 호위병이 그녀의 눈가를 가리고 있던 천을 풀어 주었다.

    “여긴… 어디입니까.”

    “다시 지시가 있을 때까지 이곳에서 대기하시오.”

    수행원에게 내려진 지시는 여자를 밀실에 옮겨 놓는 것뿐이었다. 임무를 마친 그가 밀실 방문 손잡이를 잡아 돌리는데, 문 바로 앞에 서 있는 황제의 모습에 놀라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폐, 폐하.”

    “이제 나가 봐.”

    “…알겠습니다.”

    수행원이 침실을 나서는 모습을 확인한 필리프가 침대 옆에 서 있는 안나에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해가 저문 어둑한 방안을 밝히는 것은 자그마한 촛불 하나가 전부였다. 안나의 앞에 선 필리프가 살짝 열린 문틈을 가리켰다.

    “너는 언제든 원하면 저 문밖으로 나올 수 있다.”

    “…….”

    “하지만 내가 원한다고 저 문을 열고 이곳으로 들어올 수는 없지.”

    눈앞에서 이 여자를 치워버리리라, 다신 마주하지 않을 것이라는 결심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뒤바뀌었다.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의 진위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충분히 전해 들을 수 있는 이야기로 나를 설득할 수는 없어.”

    “…….”

    “그러니, 신중히 생각하고 돌리는 것이 좋을 거야.”

    필리프의 기다란 손가락이 방문 손잡이를 가리켰다. 그가 발을 옮겨 방문을 건너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희미하게 새어 들어오던 빛마저 완전히 차단된 공간에 남겨진 안나가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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