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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81)화 (81/139)
  • 81화

    황제의 주치의 마르크 헤밀이 신중하게 여자의 맥을 짚기 시작했다. 여자가 누운 침대 옆에 선 황제의 시선이 직선으로 내리꽂히는 것이 느껴졌다.

    “상태는?”

    필리프가 기다림을 참지 못하고 누운 여자의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황제의 서늘한 한 마디에 마르크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다행히 맥은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필리프의 눈치를 살피던 마르크가 잡고 있던 여자의 손목을 놓았다. 맥과 호흡 모두 정상이었지만,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폐하.”

    마르크가 여자의 몸을 덮은 이불을 걷고 그녀의 배 위에 손바닥을 얹었다. 마르크의 손바닥이 여자의 배 위에 길게 머물렀고, 등 뒤에서 들려오는 필리프의 침묵이 불안하게 느껴질 때쯤 마르크의 입이 열렸다.

    “아이를 가진 것 같습니다.”

    “…아이?”

    “이분이 일어나시면 자세히 확인해 봐야 하겠지만, 지금 제 소견은 그렇습니다, 폐하.”

    필리프가 아무 말 없이 누운 여자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만약 카라나를 보내 여자의 상태를 살피지 않았다면, 그녀는 차가운 탑에서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배 속의 아이와 함께.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미동을 하지 않던 필리프가 턱짓으로 주치의를 물렸다. 여자가 누운 아래로 무릎을 굽힌 필리프가 그녀의 얼굴 가까이 제 얼굴을 가져다 댔다. 자세히 듣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희미한 숨소리가 들렸다.

    여자를 탑에 가둔 이후 그녀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인정할 수가 없었다. 안나로 채워져야 할 공간을 가로채버린 제 눈앞 여자의 존재를.

    “폐하. 카라나 주방장이 도착하였습니다.”

    “…들여보내.”

    필리프가 빠르게 여자에게서 몸을 물리며 별실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폐하를 뵙습니다.”

    “그래. 이쪽에 앉지.”

    별실 한쪽에 간이로 설치해 놓은 침대에 누운 여자에게 스쳐 가는 시선을 준 카라나가 황제가 앉은 테이블 가까이 다가갔다.

    “오늘 식사를 거의 하지 않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너무 기름진 음식은 좋지 않을 듯하여 소화에 좋은 음식을 준비해보았습니다.”

    카라나가 테이블 위에 은쟁반을 내려놓았다. 쟁반 안 도자기 접시에는 뜨끈한 김이 올라오는 양배추 수프가 담겨 있었다.

    “…….”

    “…폐하?”

    푹 익은 양배추가 담긴 그릇 속 음식을 보니, 안나가 제 눈앞에서 사라지기 전날 제게 해 주었던 음식이 떠올랐다. 그토록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았던 얼굴, 표정, 눈빛.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날 그녀는 그녀 나름의 이별을 전하고 있었다는 것을.

    “어, 아니야. 거기에 두고 그만 나가 봐.”

    일 년 사이에 황제의 얼굴이 많이 상해 있었다. 안쓰러운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카라나가 망설이던 입술을 떼어 냈다.

    “황궁에 도는 흉흉한 소문은 곧 잠잠해질 것입니다. 그러니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커다란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있던 필리프가 고개를 들었다. 지친 표정을 한 그가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그대도 이 여자가 마녀라고 생각해?”

    카라나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마녀였다면 남을 해쳐서라도 제 목숨 하나는 지키지 않았겠습니까.”

    카라나가 쟁반에 있는 수저를 잡아 황제의 얼굴 가까이 내밀었다.

    “예전에 폐하께서 저를 주방장에 자리에 앉히며 했던 말씀을 기억합니다. 제 음식에서는 진심이 느껴진다고 하셨지요.”

    숟가락이 필리프의 손으로 옮겨졌다.

    “폐하를 생각하는 진심을 담아 만든 음식입니다. 드시고 기운을 차리십시오.”

    필리프가 수프 한 술을 입에 넣는 것을 확인한 카라나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별실을 나섰다. 카라나의 뒤를 따라붙은 황제의 수행원이 목소리를 낮추며 주의를 시켰다.

    “이상한 소리가 퍼지지 않게 특별히 주의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카라나는 별실을 나서던 주치의가 황제의 수행원과 나누는 대화를 통해 여자가 무사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던 그녀의 몸이 차갑게 식어가던 순간에는 정말 그녀가 그대로 목숨을 거둘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너무나 낯선 여인에게서 느껴졌던 익숙함.

    어쩌면 황제도 자신과 같은 느낌을 받았던 것일까?

    카라나는 의식을 잃고 신음하던 여자를 어떻게든 살리고 싶다고 생각했던 제 모습을 떠올렸다. 정신없이 발을 옮기다 보니 어느새 주방이 시야에 들어왔다. 커다란 바구니를 들고 주방을 나서던 놀만이 빠르게 카라나의 앞으로 다가왔다.

    “오셨습니까.”

    “…예.”

    “저… 그 여자가 거의 죽을 뻔했다는 이야기가 들리던데요. 혹시 들으신 이야기가 있으신지…….”

    카라나가 놀만의 손에서 바구니를 빼앗아 들었다.

    “우리는 우리의 일만 하면 됩니다. 주방에서 괜히 허튼 소문이 돌지 않도록, 부주방장님이 아이들을 잘 관리해 주십시오.”

    “…예? 아, 예. 알겠습니다.”

    머릿속에서 잡생각을 지워 낸 카라나가 주방 안에 발을 들여놓으며 자신을 향해 집중된 주방 시종들의 얼굴을 응시했다.

    * * *

    ‘정말 예쁘네요.’

    ‘안나 씨도 한 번 안아봐요.’

    ‘아뇨. 저는 좀 무서워서요.’

    ‘무서워? 아기가 무서워요?’

    ‘아니, 혹시 조금만 잘못 힘을 주면 잘못될까 봐…….’

    한식당 동료의 돌잔치의 초대받았던 날, 안나는 차마 아이를 받아 안지 못했다.

    ‘안나 씨도 곧 결혼해야 할 텐데, 미리 아이 보는 연습한다고 생각해. 자, 이렇게 안으면 돼. 그렇게 어렵지 않아.’

    ‘나중에요.’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사랑스러운 아이였지만, 도저히 손에 안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본능적인 불안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엄마를 닮아 자신도 아이에게 모성애를 느끼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직접 배 아파 낳은 자식을 사랑할 수 없게 된다면. 아니, 자신이 이미 그런 사람이라면. 그렇다면.

    “으으으음…….”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프고 온몸이 시렸다. 도저히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안나는 죽을힘을 다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찬기가 올라오는 바닥에 등을 대고 어떻게든 목소리를 내어 보려 애쓰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이를 가졌습니다. 아이를 살려야 합니다.

    목청을 높이고 악을 써 보았지만, 목소리가 입 밖으로 흐르지 않았다. 입술을 힘겹게 벙긋거리는 제 모습을 흘끔 바라본 문지기는 그대로 등을 돌렸고, 안나는 조금씩 의식을 잃었다. 아이를 살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입술을 잡아 물고 버텨보았지만, 결국 그대로 눈을 감았다.

    “안 돼!”

    이번에는 미약한 목소리가 입술을 갈랐다. 눈을 뜬 안나가 먼저 배에 손을 가져다 댔다. 여전히 아무런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아이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안도감에 눈가가 순식간에 젖어 들었다.

    한참을 배를 잡고 눈물을 삼키던 그녀가 주변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흰색 천장 가운데 매달린 화려한 샹들리에가 보이고, 검푸른 커튼으로 반쯤 닫힌 커다란 창문이 보였다.

    “…….”

    그리고 그의 존재가 느껴졌다. 그리웠던 그의 체취가 코끝에 스며드는 순간, 따뜻한 공기가 온몸 곳곳에 파고들었다. 거짓말처럼 몸에 힘을 실렸다.

    부스럭 소리를 내지 않으려 꾸물꾸물 몸을 일으킨 안나가 고개를 틀었다. 침대 우측 테이블 의자에 앉은 필리프가 팔 안에 고개를 가두고 있었다.

    침대에서 벗어나 조심스럽게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어떻게 자신이 탑을 벗어나 이곳에 오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다시 그의 앞에 서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생겼다. 지금 자신이 그가 사랑했던 안나였다는 사실을 어떻게든 이해시켜야 했다.

    “…안나…….”

    그의 입을 통해 듣는 자신의 이름이었다. 가둔 팔에서 살짝 고개를 튼 그가 안나의 이름을 불렀다. 벅찬 가슴에 숨을 멈춘 안나가 무릎을 굽혔다.

    “…안나…….”

    “…….”

    “…미안… 미안해…….”

    그는 왜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걸까. 정작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야 할 사람은 그가 아닌데.

    “…필리프.”

    용기를 내어 그의 이름을 뱉었다. 안나가 자신도 모르게 살짝 찌푸려진 잘생긴 미간에 손을 가져다 대려는데, 그의 커다란 손이 안나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뿌리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강한 악력이었다.

    “…제발… 제발…….”

    울부짖는 듯 처절한 목소리였다. 그가 원하는 사람이 서안나가 아닌 안나 스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를 마주 안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불안정하게 허공을 맴돌던 안나의 손이 필리프의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안나의 허리를 휘감은 그의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억센 손아귀가 맨살을 파고들었지만, 몸을 움직이지 않고 부드럽게 그의 어깨를 쓸어내렸다.

    “…나는… 너를…….”

    그의 얼굴은 여전히 고통스럽게 찡그려져 있었다. 그가 아직 잠을 자는 것인지, 잠에서 깨어났지만 깨고 싶지 않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거칠어졌던 그의 호흡이 원래의 속도를 되찾을 때까지, 안나가 오래도록 그의 어깨를 쓸어내렸다.

    “…어…….”

    스르르 힘이 풀린 필리프의 손바닥이 안나의 드레스 안쪽을 파고들었다. 느슨하게 늘어져 있던 몸에 뜨거운 온도를 지닌 손이 닿자 맨살이 순식간에 팽팽하게 긴장되었다.

    그대로 안나의 몸을 끌어당긴 필리프가 그녀의 배에 얼굴을 묻었다. 뜨거운 숨결이 얇은 드레스 천을 뚫고 살결에 스며들었다. 안나가 급하게 입을 틀어막아 간신히 신음을 삼켜냈다. 찡그려져 있던 필리프의 미간이 느슨하게 풀어지는 것이 보였다.

    필리프의 호흡은 조금씩 안정되어 갔지만, 안나의 호흡은 점점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온몸의 잔떨림이 멈추질 않았다.

    어쩌면 다시는 오지 않을 시간이라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그의 숨이 자신의 살결에 닿고, 그의 다정한 손바닥이 자신의 몸을 어루만지는 시간이. 가슴에 뜨거운 물이 차올랐다.

    “…하아…….”

    순간 얼굴이 그에게 가까이 확 당겨졌다. 번쩍 눈을 뜬 그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치며 내내 참고 있던 신음이 입술 사이를 갈랐다. 안나가 눈을 깜빡이며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방울을 없앴다.

    “…네가 왜…….”

    형형한 눈동자가 그대로 자신을 찢어 놓을 듯했다. 안나의 드레스 안에 머물렀던 그의 손이 떨어져 나가자 미세하게 열 오른 살결이 허전함을 느끼듯 따끔거렸다.

    “폐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의 눈을 피하지 않으며 한 글자 한 글자를 힘주어 내뱉었다. 오랜 기다림을 견뎌낸 그에게 더는 기다림의 시간을 주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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