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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80)화 (80/139)
  • 80화

    허공을 건너 이슬 같은 눈물이 고여 있는 까만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울렁거렸다. 여자의 어깨를 잡은 필리프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분명 보았던 얼굴이다. 안나의 흔적을 조금이라도 찾기 위해 최면에 걸렸을 때 눈앞에 보였던 바로 그 여인의 얼굴이었다,

    “…….”

    입을 벌렸지만 아무런 말도 꺼내 놓을 수가 없었다. 다물려 있던 여자의 빨간 입술이 느릿하게 벌어지고 그녀가 무언가를 속삭였지만, 필리프의 귀에 울리는 것은 그저 희미한 이명이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검은 머리카락, 작고 오밀조밀한 눈과 동그란 코, 발갛게 물들어 있는 뺨. 최면에서 마주했던 그녀가, 지금 필리프의 눈앞에 있었다.

    ‘전부 엉터리야. 분명 내가 보고 싶은 사람을 볼 수 있게 해 준다고 하지 않았었나?’

    필리프가 최면술사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분명 폐하가 그리워하는 이를 만나신 것입니다.’

    ‘헛소리! 그녀는… 그녀가 아니야! 분명 그녀가 아니었다고!’

    최면술사는 혼란스러워하는 필리프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놀라울 정도로 단호했다.

    ‘의식과 최면의 경계에 대해서는 누구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제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하나입니다. 저의 최면은 기억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폐하의 기억 속 존재하는 인물 중 폐하께 가장 의미가 큰 사람을 떠올리게 해 드렸을 뿐입니다.’

    “…내 기억에 존재하는 인물 중 가장 의미가 큰 사람…….”

    자신의 앞에 선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필리프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여자의 속눈썹이 크게 한번 깜빡거렸다.

    안나의 어깨를 잡은 필리프의 손에서 조금씩 힘이 풀리고, 그의 손이 그녀의 턱 끝을 향했다. 턱에 닿을 감촉을 예상하며 안나가 그대로 눈을 감았지만, 한참이 지나도 그의 손길이 느껴지지 않았다.

    “…설명해 봐.”

    감았던 눈을 뜨니, 그의 커다란 손이 눈앞에 있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 끝을 바라보며 안나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폐하.”

    시야를 흔들리게 하던 손이 거두어지고, 그가 길게 억눌렀던 호흡을 뱉었다. 그의 반듯한 이마를 가리는 머리카락을 정리해주고 싶은 마음에, 안나가 의식하지 못하고 공중으로 손을 뻗었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필리프가 안나의 손을 쳐냈다. 안나가 필리프의 시선을 끝까지 피하지 않으며 입 안쪽에서 피가 날 때까지 이를 악물었다.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넘긴 필리프가 욕을 짓씹었다.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은 그가 집무실 안을 어지럽게 거닐었다. 갑작스레 걸음을 멈춘 그가 눈을 가늘게 찌푸리며 안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가 자신의 존재에 대해 눈으로 묻고 있었다. 예고 없이 마주하게 된 그에게 어떤 식으로 말을 전해야 할지 명확한 판단이 서질 않았다. 서늘한 침묵이 흐르는 동안에도 두 사람의 시선만은 끈끈하게 맞붙어 있었다.

    “마녀인가? 나를 현혹하려 나타난 거야? 그래. 아주 오래전에 들은 적이 있어. 건강한 청년을 제물로 삼아서 더러운 생명을 유지하는 마녀가 있다고. 아주 깊은 숲속에 살다가 한 번씩 마을로 내려와 희생양을 골라간다고 했었지.”

    마주하게 된 그의 얼굴에서 선연한 증오가 드러났다. 안나가 오한이 난 사람처럼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그래, 감히 이 나라의 황제를 제물로 삼겠다?”

    시선을 발밑으로 떨어뜨린 안나가 뒤로 몸을 물리려 했지만, 필리프가 도주로를 차단하듯 안나의 손목을 꽉 잡아 쥐었다.

    “하아아…….”

    필리프의 긴 한숨에 안나의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다. 소름이 끼칠 만큼 뜨거운 숨이 안나의 온몸을 휘감자 온몸에 경련 같은 떨림이 일었다.

    “모든 것이 엉망이었어. 나 자신을 견딜 수 없을 만큼 증오했고, 나를 이렇게 만든 그녀를 증오했지. 어쩌면 이레네의 말이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도달하는데, 꼬박 일 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어. 모두를 위해, 어쩌면 편히 보내주는 것이 나을 수도 있겠지. 그저 마음속에 묻어버리면 되겠지.”

    “…….”

    “내가 확신했던 삶을 살아가면 그만이었어. 정해진 길이라 생각했던 삶을 살면 그만이었는데…….”

    혼잣말처럼 빠르게 중얼거리던 그가 어깨 아래로 내려온 머리카락을 쥐었다. 그가 느꼈을 고통, 아픔, 절망이 고스란히 안나의 가슴으로 전해졌다. 자신의 이기심으로 충분히 괜찮아질 수 있었던 그를 다시 흔들어 놓은 것이었다.

    “분명 너는 그녀가 아닌데…….”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붉게 충혈된 필리프의 눈동자가 보였다. 그가 다시 손을 뻗었지만, 손끝이 아슬아슬하게 안나의 뺨을 비켜 갔다.

    “분명 아닌데…….”

    닿을 듯 말 듯 가까운 거리에 있던 손이 안나의 머리카락을 스쳤다. 필리프가 나지막한 신음을 뱉었다. 안나가 용기를 내어 입을 벌리려는 순간 그가 몸을 뒤틀며 안나에게서 멀어졌다.

    “밖에 누구 있는가!”

    “예, 폐하.”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호위병과 수행원이 동시에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필리프가 갑작스레 거칠어진 호흡을 빠르게 가라앉히며 입을 열었다.

    “저 여자를 당장 황궁에서 내보내.”

    “…알겠습니다, 폐하.”

    “아니.”

    안나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그가 낮게 잠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일단은 가둬두도록. 감시해야 할 것 같으니까.”

    “예, 폐하.”

    호위병 두 명이 안나의 팔을 끌고 황제의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거칠게 고개를 저은 안나가 입을 벌렸지만, 두툼한 호위병의 손바닥이 뱉으려는 말을 가로막았다.

    * * *

    “아니, 그게 정말이야?”

    “글쎄 정말이래도? 수색대가 하는 이야기를 엿들었는데, 그 여자 생김새가 아주 특이하대. 이제껏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을 하고 있더래.”

    “그럼 정말 마녀가 나타난 건가?”

    “얘는. 끔찍한 소리 하지도 마. 그럼 우리 근처에 마녀가 있다는 소리잖아.”

    오랫동안 숲속에 숨어 살던 마녀가 숲에서 내려왔고, 황제가 그 마녀를 잡아 성안에 가두었다는 소문이 황궁 전체에 퍼지기 시작했다. 허황하기 이를 데 없는 소문은 가지를 쳐 금세 부풀려졌다.

    “그래서 그 마녀가 사람의 피를 마시고 젊음을 유지한다는 게 진짜야?”

    “아주 잘 생기고 젊고 건강한 남자의 피를 마신다고 하던데?”

    “아니 그럼 설마 진짜 폐하를 노리고 내려온 건가?”

    “사실 우리 제국에 황제 폐하만큼 멋진 남자도 없잖아. 하마터면 큰일 날 뻔하셨지. 그 마녀에게 홀리기라도 하셨으면 어쩔 뻔했어?”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이야기를 나누던 주방 시종들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여기서 뭐 하는 거냐. 고기 손질은 아직 절반도 하지 않고!”

    “헉! 죄, 죄송합니다, 주방장님. 당장 마무리하겠습니다.”

    카라나 주방장의 호통에 뒤숭숭하던 주방의 분위기가 한꺼번에 가라앉았다. 그녀가 주방에 모인 시종을 하나하나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 주방 안에서 쓸데없는 소문을 퍼뜨리는 이들에게는 야간 잔업을 주도록 하겠다. 이상한 소문에 정신이 팔려 제 할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할 것이야!”

    “알겠습니다, 주방장님.”

    주방 뒤쪽 보관 창고로 향한 카라나가 놀먼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준비되었으면 이리 주십시오.”

    “예. 그런데 직접 가셔도 괜찮으시겠어요? 아무리 소문이기는 하지만 영 꺼림칙하지 않습니까.”

    황제는 수색대를 소집해 잡아들인 여자를 황궁 바로 앞에 있는 탑 최상단에 가두었고, 카라나에게 직접 식사를 가져다줄 것을 지시했다.

    “폐하께서 직접 시키신 데는 다 이유가 있겠지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소문이 사실이라면 그리 건강하지도 않고 늙은 여자의 피는 그쪽에서 거부하지 않겠습니까.”

    우스갯소리를 뱉은 카라나가 음식 접시가 담긴 쟁반을 건네받았다. 떠도는 소문을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탑이 점점 가까워지니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이쪽으로.”

    탑 정문을 지키고 있던 문지기가 카라나에게 길을 열어 주었다.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계단을 오른 카라나가 탑의 꼭대기에 도착했다.

    쿵.

    묵직한 소리와 함께 돌문이 열리고 차가운 바닥에 모로 누워있는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여기에 놓고 가시오.”

    문지기가 문 바로 앞 바닥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자리에 쟁반을 두고 바로 등을 돌리려던 카라나가 발을 멈추었다.

    음식을 가져가는 일은 누구에게나 시킬 수 있는 간단한 일이었다. 폐하의 시종 중 그 누구를 시켰어도 이상하지 않은 일에 자신을 끌어들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카라나가 누워있는 여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잠시만 여자를 살피고 오겠습니다. 폐하께서 직접 살펴보라 명하셨습니다.”

    잠시 카라나의 얼굴을 바라보던 문지기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닥에 놓아둔 쟁반을 손에 든 카라나가 여자가 누워있는 벽 쪽에 가까이 다가갔다. 벽에 가까워질수록 돌의 싸늘한 냉기가 느껴졌다.

    “저, 정신을 좀 차려보십시오.”

    “…….”

    “제 말이 들립니까.”

    상체를 낮춘 카라나의 여자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검은 머리카락을 걷어냈다. 여자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니, 세상에.”

    여자의 얼굴은 몹시 낯설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녀가 그리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탑에 들어서기 전까지 온몸을 휘감았던 불안감이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제 말이 들립니까.”

    카라나가 여자의 코밑에 손을 가져다 대니, 미약하지만 뜨끈한 콧바람이 느껴졌다. 그녀가 입은 드레스가 땀에 절어 축축해져 있었다. 이대로 두면 돌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를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 뻔했다.

    “자, 몸을 좀 일으켜 보십시오. 뭐라도 좀 먹어야 기운이 납니다.”

    “으으으음…….”

    카라나가 축 늘어진 여자의 겨드랑이 사이에 팔을 넣고 상체를 세우려는데, 이미 몸에서 힘이 전부 빠진 여자를 혼자 부축하는 것은 무리였다. 카라나가 고개를 돌려 문지기를 불렀다.

    “이리 와서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무슨 소리요.”

    “폐하께서 이 자의 목숨을 끊어 놓으라 하셨습니까? 그게 아니라면 나를 도와야 할 것입니다. 관리 태만으로 벌을 받기 싫다면 말입니다.”

    문지기가 여자를 탑에 가둬두며 지시받았던 것은 단 하나. 여자를 감시하는 것이었다. 작은 방안에 갇히자마자 바닥으로 쓰러진 여자는 종일 별다른 행동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기에, 그녀의 상태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은 것이 사실이었다.

    “뭐 하시오!”

    카라나의 다급한 외침에 쓰러진 여자에게 가까이 다가온 문지기가 그녀의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찰싹.

    여자의 뺨을 몇 차례 내리친 카라나가 그녀의 의식이 회복되기를 잠시 기다렸다. 고개를 낮추고 여자의 입가에 귀를 바짝 가져다 댔지만, 간헐적으로 흐르던 가느다란 신음마저 멈춘 상태였다.

    “안 되겠습니다. 폐하께 여자의 상태를 보고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여자가 이대로 목숨을 잃기를 바랐다면 그녀에게 음식을 가져다주라 말하지 않았을 황제였다. 문지기의 등에 여자를 업힌 카라나가 빠르게 탑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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