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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79)화 (79/139)
  • 79화

    “우와. 사장님. 정말 똑같이 하셨어요. 대단해요!”

    “아니야. 이게 뭐 대단하다고.”

    쑥스러운 표정을 지은 헬렌이 손사래를 쳤다. 몸에 무리가 가지 않게 최대한 쉬운 음식을 만들겠다고 한 안나에게서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 밤 파이 요리법을 배우는 중이었다.

    “원래 요리에 능숙하셨나 봐요. 이렇게 금방 만들어내시다니.”

    “뭐. 아들 있을 때야 음식을 종종 하긴 했지만, 혼자 된 이후로는 손을 아예 놨지. 입에 단 음식을 먹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하고.”

    헬렌이 먼저 보낸 아들을 떠올리듯 한동안 허공을 응시했다.

    “에구. 늙은이가 또 주책이네. 그래. 그다음엔 뭘 어떻게 해야 한다고?”

    헬렌이 눈가에 찔끔 고인 눈물을 황급히 닦아냈다. 바닥 끝까지 쥐어짰다고 생각했는데, 눈물샘이 완전히 메마른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이건 어떤 나물이라도 괜찮아요. 식용 약초도 괜찮고요. 이렇게 밀가루와 물을 적정량으로 섞어 주시고 기름에 튀겨내면 돼요. 중요한 것은 기름 온도인데요. 자, 이렇게 반죽을 기름 안으로 떨어뜨리면 상태를 알 수가 있어요.”

    종알종알. 마치 산새가 지저귀는 소리 같다고 생각하며, 헬렌이 안나의 설명을 들었다.

    “지금 건져내면 될까?”

    “네. 너무 오래 튀기면 안 되니까, 시간은 이 정도면 충분해요.”

    안나가 직접 만든 기름 뜨개로 튀김을 건져냈다.

    “오늘은 잘 보관만 하면 일주일 정도는 안주로 쓸 수 있는 음식을 만들어 놓으려고 해요.”

    “아니 좀 쉬엄쉬엄하라니까.”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아서 마음이 좀 급하네요.”

    머쓱하게 웃은 안나가 앞치마에 손에 물기를 닦아냈다. 안나의 손을 잡은 헬렌이 그녀를 주방 밖으로 끌어냈다. 안나를 의자에 앉히고 급히 뒤쪽 창고로 향한 헬렌이 한참 후에야 주방을 나섰다. 그녀의 손에 커다란 냄비가 들려 있었다.

    “어, 그게 뭐예요?”

    “어. 밥 먹을 시간도 됐고 해서.”

    안나가 아침 주방 정리에 정신이 없을 때 가게를 나섰던 헬렌이 안나를 위해 직접 사 온 음식이었다.

    “우와. 언제 이걸 사 오셨어요?”

    냄비 안에 커다란 닭 한 마리가 들어있었는데 화덕 옆에 두어서인지 아직 뜨끈한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고소한 닭 냄새를 맡자 입안에 침이 고이기 시작했고, 무섭게 허기가 치밀었다.

    “자, 가만있어 봐.”

    냄비를 제 앞으로 끌고 간 헬렌이 먹기 좋게 닭을 분리했다.

    “임신했을 때는 무조건 잘 먹어둬야 해. 처녀를 위해서가 아니라 배 속 아이를 위해서라도.”

    “…감사합니다.”

    “자, 먹어 봐.”

    헬렌이 커다란 살점을 집어 직접 안나의 입에 넣어 주었다. 쫄깃쫄깃한 살도 맛있었지만, 숯불 향이 그득 베인 닭 껍질이 특히 일품이었다. 귀한 음식을 준비해 준 헬렌에게 먹어보라는 말도 하지 않고, 안나가 정신없이 고기를 입 안에 밀어 넣었다.

    안나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냄비 안 닭을 절반 정도 먹어 치운 후였다. 서둘러 입 안 고기를 씹어 삼킨 안나가 남은 닭 다리를 집어 헬렌에게 건넸다.

    “아, 죄송해요. 사장님도 어서 드셔 보세요. 너무 맛있어요.”

    뺨을 둥글게 부풀리고 열심히 음식을 씹어 삼키는 안나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헬렌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나는 고기는 별로야. 나이 먹으니까 이상하게 고기가 소화가 잘 안 돼. 괜히 먹었다가 탈 나면 그게 더 성가셔.”

    “그래도 조금만 드셔 보세요.”

    “난 처녀가 만들어준 죽 먹으면 되니까 어서 먹어.”

    “그래도…….”

    완강하게 거절한 헬렌이 찻잔에 따뜻한 차를 따랐다. 임신했을 때 마시면 좋은 민들레 차였다.

    “자, 차도 좀 마시고.”

    불분명한 발음으로 감사 인사를 전한 안나가 집은 닭 다리를 뜯기 시작했다. 곧 냄비가 바닥을 드러내고 떨어진 살점까지 남김없이 해치우니 뒤늦은 포만감이 밀려왔다.

    “그래. 언제 떠날지는 생각해 봤어?”

    “곧… 곧 떠나게 될 것 같아요.”

    “어디로 갈지는 정했고?”

    “저, 황궁에서 일하려고요.”

    “황궁?”

    헬렌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물론 이유가 있긴 하겠지만, 그 몸으로 황궁에서 일하겠다고?”

    황궁 시종이 되면 일반 귀족의 시종들보다는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지만, 문제는 현재 안나가 임신 중이란 사실에 있었다.

    “일이 보통이 아닐 거야. 아무래도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좋지 않겠어? 처녀만 괜찮다면 원할 때까지 여기 있어도 괜찮으니까.”

    안나의 몸 상태가 걱정스러웠지만, 그녀의 태도는 단호했다.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서요.”

    “만나야 할 사람?”

    “네. 그 사람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거든요.”

    “황궁에 가면 그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거야?”

    “…만날 수는 있을 거예요.”

    그 사람이 저를 다시 품어 줄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마지막 말을 입 밖으로 뱉지 않고 삼킨 안나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곳을 떠나게 되더라도 사장님의 은혜는 잊지 않을 거예요.”

    “은혜는 뭘, 내가 더 고맙지. 처녀 덕에 몇 달에 걸쳐 벌 돈을 며칠 만에 벌게 됐는데. 자, 차 식기 전에 어서 마셔.”

    “…네.”

    찻잔은 비운 안나가 빈 냄비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가게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후다닥 주방 안으로 모습을 숨긴 안나의 뒤로 덩치가 큰 사내 두 명이 들어섰다. 그들이 걸친 푸른 재킷 하단에 황궁 소속 수색대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어서 오세요. 이쪽 자리가 좋겠네.”

    헬렌이 주방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창가 쪽으로 사내들을 안내했다.

    “우리 맥주 두 잔.”

    “안주는 괜찮으시고?”

    턱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사내가 귀찮다는 표정으로 공중에 손을 휘휘 내저었다. 고개를 끄덕인 헬렌이 주방으로 들어가자 사내들이 입고 있던 재킷을 벗었다.

    “아니 그래서. 폐하께서 그 사냥꾼들을 직접 조사하시겠다고 하셨다고?”

    “그렇다니까. 아직도 황궁에서 조사받고 있다던데? 대체 무슨 생각이신지, 원.”

    사내들의 테이블에 맥주잔이 놓이고, 눈앞에서 헬렌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 다시 사내들의 입이 열렸다.

    “아니, 일개 시종 하나 찾자고 온 나라 수색대를 전부 끌어모은 것도 모자라, 이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를 찾겠다고 난리니. 참.”

    “그러니 말이야. 한동안 잠잠하더니만 갑자기 또 무슨 말을 들으셨기에 이 야단인지. 어, 여기 맥주 두 잔 더!”

    사내들이 빠르게 맥주잔을 비워냈다. 헬렌이 맥주잔을 가지러 주방으로 향한 사이, 또 한 무리의 손님이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어, 사장님. 우리 맥주랑 안주 부탁해요.”

    “어, 또 오셨네? 잠시만 기다려요. 금방 가져다줄 테니까.”

    금세 시끌벅적해진 가게를 못마땅한 표정으로 둘러본 사내들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아니, 여기 원래 손님이 없는 곳이라고 하지 않았어?”

    “원래 그랬는데 오늘따라 무슨 일이래.”

    “편하게 맥주 한 잔씩 하고 가려고 했더니 틀렸구먼.”

    “자, 빨리 마시고 나가자고.”

    아직 업무가 완전히 끝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해가 지기도 전에 황궁 소속 수색대가 편히 술을 마시고 다닌다는 소문이 돌게 할 수는 없었다.

    “여기 얼마입니까?”

    급히 술잔을 비운 사내들이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와장창 유리잔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

    급하게 맥주잔을 정리하려다가 바닥으로 쓰러진 여사장이 옅은 신음을 흘렸다.

    “사장님!”

    쓰러진 여사장을 보며 가게의 손님 모두 당황한 표정을 짓는데, 누군가 급히 주방을 빠져나와 사장의 몸을 부축했다.

    “괜찮으세요?”

    “응… 좀 미끄러진 것뿐이야.”

    사장을 부축하는 여자의 얼굴을 유심히 지켜보던 사내들이 급히 눈빛을 교환했다. 오전 근방 수색대에 전해진 몽타주 속 여자의 인상착의와 매우 흡사한 생김새였다.

    “저기, 잠깐만.”

    천천히 끌어올려진 여자의 시선이 사내가 쥔 재킷에 고정되었다.

    * * *

    “폐하. 도착하였습니다.”

    “들어와.”

    집무실 문이 열리자마자 보이는 것은 여자의 새까만 정수리였다. 의자에 앉아 있던 필리프가 바로 몸을 일으켜 문 가까이 다가갔다.

    “무엄하다, 고개를 들라!”

    여자의 뒤에 서 있던 수행원이 목소리를 높였지만, 고집스럽게 바닥을 향해 있는 여자의 얼굴이 들리지 않았다.

    낯선 여자가 숲을 나서는 것을 보았다는 사냥꾼과 근처 행인들을 조사해 여자의 인상착의를 몽타주로 완성한 필리프는 그 즉시 몽타주를 수색대에 배포했다. 그리고 몽타주를 배포하고 반나절이 채 지나지 않아 찾는 이와 흡사한 인상착의의 여자를 찾았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필리프가 말없이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순간적으로 터져 버릴 듯이 뛰는 가슴을 가라앉히기가 힘겨웠다.

    “무엄하다! 당장 고개를!”

    “모두 나가.”

    “…예?”

    여자의 팔을 잡고 있던 호위병과 수행원이 동시에 황제의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황제는 다시 한번 침착하게 내뱉었다.

    “나가.”

    “…예, 폐하.”

    호위병과 수행원이 집무실을 나섰지만, 떨어진 여자의 고개는 들리지 않았다. 느릿하게 발을 떼어낸 필리프가 여자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당겨진 실처럼 팽팽한 침묵이 이어졌고, 여자의 위태로운 숨소리만이 무거운 침묵을 채우고 있었다. 먼저 입을 떼어낸 이는 필리프였다.

    “누군가 내 무기에 손을 댄 것 같더군.”

    여자의 마른 어째가 움찔거리는 것을 보며 필리프가 말을 이었다.

    “네가 손을 댄 건가?”

    안나가 그대로 숨을 멈추었다.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부터 이미 눈가는 뜨겁게 젖어 들고 있었다.

    “겁 없이 황제의 물건에 손을 댄 이유를 들어 볼까?”

    눈꼬리에 매달려 있던 눈물이 안나의 뺨을 적셨다. 너무나도 그리웠던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싶었지만, 제 얼굴을 보고 그가 보일 반응이 두려웠다.

    “…….”

    눈꺼풀을 빠르게 깜빡이며 눈가에 눈물을 없앤 안나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는 근사한 얼굴이었다. 조금 더 자세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싶었지만, 금세 차오른 눈물 때문에 시야가 흐릿해졌다. 어쩌면 다행이었다. 적어도 낯선 것을 바라보는 듯 차가운 눈동자를 마주하지는 않았으니까.

    “…폐하를… 뵙습니다.”

    바보, 멍청이.

    그를 다시 마주하게 되면 하고 싶었던 말이 너무도 많았는데, 입술 사이에서 흐른 말이 고작 이것이라니.

    저 자신에 대한 한심함 때문인지, 멈출 줄 모르고 차오르던 눈물이 멎어 들기 시작했다. 흐릿했던 시야가 맑아지며, 그의 얼굴이 조금 더 자세히 보였다.

    “…너.”

    그의 눈동자에 비친 감정을 제대로 읽을 수가 없었다. 화가 난 것 같기도, 놀란 것 같기도 했다. 날것 그대로의 감정이 드러나는 굳은 얼굴을 올려다보는데, 순간 그가 안나의 어깨를 휘어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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