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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78)화 (78/139)
  • 78화

    안나가 부엌 찬장을 찬찬히 살펴보았지만, 쓸 만한 그릇은 많이 보이지 않았다. 뽀얗게 먼지가 쌓인 그릇 중 상태가 괜찮은 그릇 대여섯 개를 골라내고, 나무 숟가락과 포크를 꺼냈다.

    “재료는 어디에 보관하세요?”

    “뭐 재료랄 것도 없어. 준비를 해 봤자 손님이 있어야 말이지.”

    안나를 구제해 준 선술집 여사장님의 이름은 헬렌 밀러. 꽃다운 스무 살 나이에 남편을 잃고 홀로 아들을 키우며 살아왔지만, 불의의 사고로 아들마저 잃고 사십여 년이란 세월을 홀로 살아온 여인이었다.

    “여기 밀가루가 조금 있고, 훈제해 놓은 고기는 있는데.”

    안나가 헬렌이 건넨 밀가루 통을 들여다보았다. 고작 세 움큼 정도 되어 보이는 밀가루는 오래되어 상태가 좋지 않았고, 훈제해 놓은 고기의 보관 상태도 엉망이었다. 잠시 머리를 굴린 안나가 헬렌의 손을 잡았다.

    “사장님. 정말 다른 재료는 없으세요? 뭐라도 괜찮은데.”

    “음. 죽 끓여 먹으려고 산 귀리와 보리가 좀 있고. 아, 잠시만 기다려 봐.”

    주방 뒤쪽으로 향한 헬렌이 커다란 자루를 가리켰다. 냉큼 헬렌에게 다가간 안나가 자루를 열었다. 자루 안에는 껍질을 벗기지 않은 밤이 한가득 들어있었다.

    “가끔 가게에 들르는 사람이 술값 대신 주고 간 건데, 내가 눈이 안 좋아서 이걸 깔 수가 있어야지.”

    “제가 깔게요! 이거면 괜찮은 안주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요!”

    쾌재를 부른 안나가 주방 뒤쪽에 자루 안 밤을 모두 꺼내 놓았다. 머릿속에 몇 개의 조리법이 한꺼번에 떠올라 저도 모르게 콧노래가 흘렀다.

    “괜히 힘쓰는 거 아냐? 어차피 가게에 손님도 없는데.”

    “안주가 맛있다는 게 알려지면 손님은 알아서 오게 될 거에요. 제가 다 할 테니까 사장님은 좀 쉬세요.”

    안나가 식당에서 일하며 느낀 것은 사람들의 입소문이 음식의 맛만큼 중요하다는 사실이었다. 생활이 넉넉지 않은 사람들에게 가격 대비 맛 좋은 안주가 있다는 것을 알리면 술은 알아서 팔리게 될 것이 분명했다.

    부지런히 밤껍질을 벗긴 안나가 먼저 화구에 불을 붙였다. 주방 조리도구는 그리 넉넉지 않았지만, 다행히 불을 피울 화구만큼은 꽤 쓸 만했다.

    알밤 귀퉁이를 썰어내 맛을 본 안나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서늘한 곳에 두어서인지 보관 상태도 좋았고, 그 맛도 매우 좋았다. 반 정도의 밤은 물과 보리를 섞어 묽게 끓여내고, 나머지 반은 숯불 사이에 끼워 넣었다.

    쉬지 않고 몸을 움직이는 안나의 모습을 바라보던 헬렌이 주방 구석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두 시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팔팔 끓는 냄비 속을 바라보던 안나가 조금 들뜬 표정으로 미리 꺼내 두었던 접시에 따끈한 김이 올라오는 수프를 담기 시작했다. 오래 끓여 밤 알갱이의 형태를 찾을 수 없는 묽은 형태의 수프가 완성되었다.

    “저, 사장님. 이거 한번 드셔보세요.”

    “응? 이게 뭐야.”

    “이가 좋지 않으시니까 이렇게 드시면 훨씬 편하게 드실 수 있을 거예요.”

    그릇을 받아든 헬렌이 나무 숟가락을 들고 수프를 맛보았다. 홀로 사십 년이란 시간을 살아가면서 누군가 자신을 위해 만들어준 따뜻한 음식을 먹는 것은 처음이었다.

    “야, 이거 너무 맛있는데?”

    “정말요? 그냥 하시는 말씀이죠?”

    “아니야. 정말 맛있어. 자, 처녀도 한 입 먹어 봐.”

    사양하지 않고 수프를 맛본 안나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가게에 있는 재료로 안주를 만들어 볼게요. 메뉴는 정해 놓지 않고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나가는 것으로 하면 좋을 것 같아요.”

    “글쎄, 손님이 들어와야 말이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최선을 다해 볼게요.”

    매년 늦가을 무렵 황궁 주방과 별궁에서 일할 시종을 뽑는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대략 열흘 정도 남은 시간. 자신에게 기회를 준 헬렌에게 꼭 보답하리라 다짐한 안나가 숯불 사이에서 잘 구워진 밤을 꺼내기 시작했다.

    * * *

    “아니, 여기가 정말 그렇게 괜찮다고?”

    “그렇다니까. 엊그제 우연히 들렀는데 글쎄 맥주 다섯 잔이 모자라더라고. 안주가 아주 기가 막혀.”

    “아니, 사장 노인네가 앞도 잘 안 보이는 것 같더니만, 무슨 음식을 한다고.”

    “아니 글쎄. 일단 들어가 보자고!”

    평소라면 개미 새끼 한 마리 얼씬하지 않았을 선술집 앞이 오랜만에 활기를 띠며 영업 중이었다. 아직 날이 채 저물기 전이었음에도 작은 가게 안에 앉을 곳이 그리 많지 않았는데, 가게 내부에 고소한 기름 냄새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아, 여기!”

    “아, 이쪽으로 앉으세요.”

    등이 구부정한 여사장이 사내들에게 자리를 안내했다.

    “그래. 술은 뭐로 드릴까.”

    “우리 맥주 두 잔 하고. 아, 오늘 안주는 어떤 게 있으려나?”

    “응. 오늘은 산나물 튀김인데, 고소해서 맥주 안주로는 아주 좋아요.”

    “그래요. 그럼 그것으로.”

    손걸레를 쥔 사장이 부엌으로 사라지자 남자들이 흘끔 주변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아니, 저게 자네가 그렇게 칭찬하던 안주야? 보기엔 별것 없어 보이는데?”

    “일단 먹어 보라니까? 지난번에는 밤 파이가 나왔는데, 보기엔 어설퍼 보여도 맛이 아주 훌륭하더란 말이야.”

    사내들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음식 접시를 비우는 가게 손님을 바라보고 있는데, 테이블 위에 쟁반이 놓였다.

    “그럼 맛있게 드세요.”

    시큰둥한 표정으로 음식 접시를 내려다보던 사내들이 잘 튀겨진 산나물을 입에 넣었다. 산나물 특유의 쌉싸름한 맛과 고소한 기름 맛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맛이었다.

    “뭐야, 이거. 맛있잖아?”

    “내가 뭐랬어? 자, 한잔하자고!”

    테이블 이곳저곳에서 안주 추가를 외치는 소리가 들렸고, 헬렌이 부지런히 빈 접시를 주방으로 날랐다.

    “사장님. 힘드시죠. 이것만 나가면 되니까 좀 쉬세요.”

    “아니야, 바쁘니까 힘든 줄을 모르겠어.”

    커다란 바구니에 산나물 절반 정도를 튀겨놓은 안나가 소매를 걷고 빈 그릇 설거지를 시작했다. 쉼 없이 일하는 안나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헬렌이 접시에 산나물 튀김을 담기 시작했다.

    안나가 식당을 돕고 나흘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하루에 평균 두 테이블 정도의 손님을 받던 헬렌의 선술집이었는데, 오늘은 벌써 일곱 번째 손님을 받았다. 모두 안나의 음식 덕분이었다.

    “저, 여기 맥주 두 잔 더! 이거 안주도 좀 더 주시고!”

    헬렌이 튀김을 담은 접시를 들고 주방을 나섰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안나는 주방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나오려 하지 않았다. 우연히 손님들이 실수로 주방 안에 들어올 때도 화들짝 놀라며 얼굴을 가리곤 했다.

    “어휴. 젊은 처자가 대체 무슨 사연이 있길래.”

    쯧쯧 혀를 찬 헬렌이 손님들의 추가 주문을 받기 시작했다.

    준비한 술과 안주가 전부 동나기까지 두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손님들이 아쉬운 표정으로 발길을 돌리고, 마지막 손님까지 가게를 완전히 빠져나갔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안나가 주방을 빠져나왔다.

    “행주 저한테 주세요. 테이블 정리는 제가 할게요.”

    “아냐. 계속 요리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좀 쉬어.”

    “힘들긴요.”

    헬렌의 만류에도 묵묵하게 테이블을 정리한 안나는 사용한 행주를 모두 깨끗하게 빨아 널은 후에야 주방 밖 의자에 앉았다.

    “…….”

    안나가 버릇처럼 배를 쓰다듬는 모습을 유심하게 지켜보던 헬렌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네?”

    “…아이 가졌지?”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한 안나가 그대로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내가 아무리 눈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완전히 까막눈은 아니야.”

    “…저, 그게…….”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임신 초기 같은데 너무 무리하면 안 좋아. 내일부터는 음식 할 필요 없어.”

    “사장님, 저는 정말 괜찮…….”

    “내 말 들어.”

    안나의 항변을 막은 헬렌이 그녀의 등을 쓸어주었다. 마치 아이를 도닥이는 듯 다정하고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헬렌의 어깨에 뺨을 기댄 안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목소리에서 축축한 울음기가 묻어났다.

    “그럼… 만들기 쉬운 음식으로 준비할게요. 제가 이곳을 떠나도 혼자 만드실 수 있게 사장님께도 가르쳐 드리고요.”

    “그렇게 안 봤는데 고집이 엄청나네.”

    “정말 무리는 안 할게요.”

    안나의 어깨를 가까이 끌어당겨 안아 준 헬렌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수색 대장이 황제의 눈치를 살피며 보고를 이어갔다. 여전히 수색 작업은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안나 스완이 실종된 이후의 수색은 철저히 비밀리에 진행되어왔지만, 황제는 별안간 공개 수색을 지시하며 제국 전역에 안나의 몽타주를 배포했다.

    “오늘 몽타주를 수도 곳곳에 배포하였으니, 조만간 새로운 소식이 들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수색 대장의 걱정과는 달리 보고를 듣는 필리프의 표정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래…….”

    황제의 목소리는 낮고 점잖았지만, 어쩐지 그 아래 화산처럼 끓어오르는 분노가 감춰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깨를 움찔거린 수색 대장이 급히 보고를 이어갔다.

    “당시 숲 주변에 있었던 이들을 조사 중인데, 아직 특이한 사항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다만?”

    묵묵히 입을 다물고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던 황제가 비스듬하게 젖혀져 있던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사냥을 마치고 숲을 지나던 사냥꾼 두 명이 먼발치에서 수상한 여인을 목격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여인의 인상착의가 안나 스완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었습니다.”

    “더 자세히 설명해.”

    “상당히 먼 거리에서 목격했던지라 얼굴은 자세히 보지 못했지만, 어깨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카락을 한 여인이었다고 합니다. 키와 몸집에 대한 묘사도 안나 스완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

    “폐하. 숲에서 생활하는 여인이 우연히 무기를 발견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보심이…….”

    수색대 내부에서도 슬슬 불만의 목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일 년이 넘게 지지부진하게 이어져 오던 수색의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할 무렵, 황제는 다시 대규모의 수색대를 끌어모았다.

    “폐하.”

    “쉿!”

    검은 머리카락을 한 여인.

    필리프가 한동안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던 여인의 얼굴을 떠올렸다. 최면을 통해서 마주했던 여인의 생김새 하나하나가 머릿속에서 또렷하게 되살아났다.

    “여자를 보았다는 사냥꾼을 불러와.”

    “예?”

    “직접 물어볼 것이 있으니.”

    “…알겠습니다, 폐하.”

    “그리고 그 여인의 인상착의를 바탕으로 근처 수색을 지시하도록.”

    수색 대장을 무르고 수행원을 부른 필리프가 마차를 준비하라 일렀다. 집무실을 나서는 그의 발걸음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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