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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77)화 (77/139)
  • 77화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는 밤이었다. 밤을 지새우는 것이 어느새 익숙하게 느껴질 법도 한데, 오늘 밤은 유독 밤을 버텨내는 것이 힘겹게 느껴졌다.

    “하아…….”

    침대에서 완전히 몸을 일으킨 필리프가 침실 중앙 테이블로 다가갔다. 그의 손이 향한 곳은 테이블 서랍 제일 안쪽에 넣어 놓은 보석함이었다.

    안나에게 처음 주었던 선물. 마음을 다해 준비한 선물마저 버리고 떠나버린 그녀에 대한 원망으로 몇 번이나 없애 버릴까 고민했었다.

    멍해진 눈동자로 가만히 보석함을 바라보던 필리프가 보석함 중앙 붉은 루비를 눌렀다. 보석함이 반으로 갈라지며 정 중앙 시계가 보였다. 안나와 손을 잡고 함께 시계의 시간을 맞추던 순간의 기억이 떠올랐다.

    “…어?”

    시계를 응시하던 필리프가 보석함을 눈앞으로 가져다 댔다. 안나가 떠나고 그녀가 남겼을 흔적을 찾으며 보석함을 뒤졌을 때, 분명히 시계가 멈춰 있는 것을 확인했었다.

    “아니야, 분명히…….”

    그녀의 상실과 더불어 완전히 멈춰버린 시계를 바라보며 허탈한 탄식을 뱉어냈었다. 그런데.

    “어째서.”

    멈추었던 시계가 다시 작동하고 있었다.

    째깍째깍.

    보석함 속 시계를 귓가에 바짝 가져다 댔다. 마치 한 번도 멈추었던 적이 없었던 것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작동하는 시계 소리에 심장이 그대로 가슴을 튀어나올 것처럼 어지럽게 뛰기 시작했다.

    “밖에 누구 있는가!”

    보석함을 그대로 귀에 붙인 채, 필리프가 절규하듯 외쳤다.

    “예, 폐하.”

    침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수행원이 사색이 된 황제의 얼굴을 마주했다. 비 오듯 땀을 흘리고 선 황제의 손에는 영롱한 빛을 발하는 보석함이 들려 있었다.

    “이것에 손을 댄 자가 있었는가.”

    “…예?”

    “이 보석함에 손을 댄 자가 있었냐는 말이야!”

    핏발 선 황제의 눈을 마주한 수행원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어, 없었습니다, 폐하. 폐하께서 책상의 물건을 건드리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저희가 어찌 감히…….”

    “내 물건에 손을 댄 자가 없었다는 말이지.”

    “그, 그렇습니다, 폐하!”

    거의 무릎을 꿇듯 몸을 낮춘 수행원의 고개를 들라 지시한 필리프가 가만히 그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바들바들 떨리는 그의 눈동자에 담긴 감정은 두려움뿐, 거짓은 조금도 섞여 있지 않았다.

    “나가 봐.”

    “예, 예, 폐하.”

    부르르 어깨를 떨며 축객령을 기다리던 수행원이 부리나케 침실을 빠져나갔다. 필리프가 보석함을 쥔 손에서 서서히 힘을 풀었다.

    째깍째깍.

    멀쩡하게 흐르는 시계 속 시간을 원망스럽게 바라보던 필리프가 보석함을 쥔 손을 공중에 높이 쳐들었다.

    “왜!!! 도대체 왜!!!”

    왜 이 잘난 보석함 하나도 깨지 못하는 것일까. 전부 버리고 떠난 여자에게 무슨 미련이 그리 남았기에.

    보석함을 잡은 필리프의 손등에 하얗게 힘이 실렸다.

    마치 그녀와 함께했던 시간 모두가 허상이었다는 듯 그대로 멈춰버렸던 시계가 이제 와 다시 작동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왜, 도대체 왜.

    이 시계의 시곗바늘을 앞으로 돌리면 그녀와 함께 있던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이 모든 것을 알고 그때로 돌아간다면, 떠나려는 그녀를 달아나지 못하게 붙잡을 수 있었을까.

    째깍거리는 시곗바늘 소리가 귓구멍에 차곡차곡 고여 들면서, 머릿속 시간이 거꾸로 흐르기 시작했다.

    그녀와 마지막으로 온기를 나누었던 순간, 그녀를 업고 발걸음의 속도를 낮추어 걸었던 순간, 함께 과실주를 마시며 조금씩 붉게 달아오르는 그녀의 얼굴을 홀린 것처럼 바라보았던 순간. 그녀의 붉은 입술에 처음으로 입 맞추었던 순간.

    기억은 결국 처음으로 돌아가 그녀를 처음 마주했던 곳에서 멈추었다. 동그란 눈동자의 크기를 한계까지 키우며 자신의 얼굴을 뚫어지라 응시했던 그 날의 그녀는.

    “안나.”

    질끈 눈을 감은 필리프가 안나의 이름을 계속해서 읊조렸다.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을 곳에 그녀와 와 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필리프의 두 손이 초라하게 허공을 헤맸다.

    오래 기다렸죠?

    “안나…….”

    이제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헤질 대로 헤진 미련 조각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낸 망상이라도 상관없었다. 눈을 감은 채 침대로 걸어간 필리프가 침대 시트에 몸을 뉘었다.

    이대로라면, 그녀가 꿈속에 찾아와 줄 것 같았다.

    “그래, 안나. 안나.”

    마음속 굳은 결심은 사소한 그녀의 흔적 하나에 이렇게 쉽게 흔들려 버리고 만다. 내일이 되면 다시 그녀를 마음속에서 지우려 발버둥 칠지도 모르지만, 오늘만은 오늘만큼은 이대로 잠들고 싶었다.

    째깍째깍.

    다시 흐르기 시작한 시계의 초침, 그 소리에 얼음장처럼 굳어 있던 심장이 다시 뛰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 * *

    “폐하. 기침하셨습니까.”

    “들어와.”

    침의를 갈아입은 필리프는 침실 중앙 테이블에 앉아 서류를 살피고 있었다. 그의 앞으로 다가선 수행원이 황제의 눈치를 살폈다. 지난밤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사색이 되어있던 그는,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거짓말처럼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안도의 숨을 내쉰 수행원이 조심스럽게 황제의 일정을 읊기 시작했다.

    “왕실 예배당에서 열리는 오전 미사에 참석하셔야 하고, 식사 후에 패트릭 사제의 방문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여기 오후에 있을 재정 회의에서 다루어질 현안에 대한 서류입니다.”

    필리프가 수행원에게서 서류철을 받아들었다.

    “베르나 황녀님에 대한 특별한 소식은 들려오지 않고 있습니다만, 당분간은 자중할 것이라는 중론입니다.”

    “그쪽에서 우리 쪽 사람들의 정체를 눈치채지 않게 특별히 주의해야 할 거야.”

    “한 번 더 이야기를 전해 놓겠습니다.”

    “알았으니, 그만 나가봐.”

    “아, 폐하. 이레네 유모님의 약초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서류에 붙어 떨어지지 않던 필리프의 시선이 공중으로 들렸다.

    “얼마나 남아 있지?”

    “일주일분 정도가 남아 있습니다.”

    서류를 테이블에 내려놓은 필리프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베르나가 눈앞에서 사라졌다고 음독의 가능성이 전부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필리프는 아침 식사 시간을 이용하기로 했다.

    “마차를 대기 시켜. 오전에 다녀오도록 하지.”

    “예, 폐하. 착복 시중을 들이겠습니다.”

    “아니. 필요 없어.”

    얇은 재킷을 걸친 필리프가 바닥에 떨어진 가면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저런 우스꽝스러운 가면이 아니더라도 늘 제 얼굴에는 가면 하나가 덧입혀 있었다. 유일하게 그 가면을 벗어던질 수 있던 순간은 그녀와 함께했던 시간뿐.

    낮게 실소한 필리프가 가면을 짓밟으며 침실을 벗어났다.

    “호위병들이 곧 뒤따를 것입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마차에 오른 필리프가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어김없이 숫자를 세기 시작했고, 숫자가 이백 대에 접어들었을 때 마차의 덜컹거림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어젯밤 내내 비가 내려 숲이 젖어있습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폐하.”

    입고 있던 재킷을 벗고 허름한 망토를 걸친 필리프가 숲 입구에 접어들었다. 다시 버릇처럼 숫자를 세기 시작했고, 기계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잠깐. 또 이런 느낌이.

    평지를 걸어 계곡 옆 좁은 길로 접어들기 직전 필리프의 발이 멈추었다. 열 걸음 정도 뒤에서 그를 뒤따르던 호위병들도 일제히 걸음을 멈추었다. 황제가 사람 또는 짐승의 인기척을 느꼈다고 판단한 호위병들의 손이 일제히 들고 온 무기로 향했다.

    갑자기 등을 돌린 황제가 향한 곳은 계곡에서 스무 걸음 정도 떨어진 풀숲이었다. 검을 빼든 호위병들이 황제에게 가까이 다가가려는 순간 공중에 손바닥을 든 황제가 그들의 움직임을 저지했다.

    이번엔 뭔가 느낌이 다르다. 분명 다르다.

    필리프가 담홍색 입술 모양의 꽃을 피운 오레가노 근처로 다가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분에 급격하게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도저히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강한 이끌림이었다.

    허리를 굽힌 필리프가 무성한 수풀을 제쳤다. 얼핏 보면 변화가 없어 보이지만, 무기를 숨겨 놓은 곳을 파헤친 흔적 전부를 지우긴 역부족이었다. 필리프가 다급하게 땅을 헤집었다.

    철제 스파이크가 달린 찌르기 용 창 한 자루와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지닌 전투용 돌도끼를 숨겨 놓았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돌도끼가 보이질 않았다.

    “폐하.”

    “물러서 있어.”

    “…예.”

    조심스럽게 자신의 등 뒤로 다가온 호위병을 멀찌감치 물린 필리프가 약초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심장이 점점 소리높여 뛰기 시작했다.

    샅샅이 주변 수풀을 살피는데, 수풀 근처 날카로운 나뭇가지에 무언가 걸려있는 것이 보였다. 누군가 급히 걸음을 옮기다 나뭇가지에 옷가지가 걸린 모양이었다.

    누르스름한 천을 손에 쥔 필리프가 잘게 손을 떨었다. 코끝으로 가져간 천 조각에서 낯설지만 익숙하게 느껴지는 향이 풍겼다. 천 조각에 얼굴을 묻은 필리프가 다시 한번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분명 처음 맡아보는 향인데, 어째서 이토록 가슴이 요동치는 것일까. 생소함과 익숙함. 전혀 다른 두 개의 감각이 한꺼번에 필리프의 몸을 휘감았다.

    두 가지 생각이 마음속에서 치열하게 격돌했다. 그저 스쳐 지나가면 그만이다. 깊은 물 속에 잠겨 그대로 익사해 버릴 것 같은 기분으로 일 년이라는 시간을 버텨냈다. 지나치지 못하면 다시 그 끔찍한 고통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될 것이 뻔했다.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그대로 묻어두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녀가 사라졌지만, 여전히 멀쩡한 자신에 대한 역겨움으로 몇 번이나 제 심장에 칼을 가져다 댔었다. 목숨을 끊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는 한 번이라도 그녀를 다시 품에 안게 되는 날이 있으리란 어리석은 기대에서였다.

    째깍째깍.

    환청처럼 귓가에 어젯밤 들었던 시계 소리가 울려대기 시작했다.

    그래, 만약 정말 그렇다면. 다시 우리가 같은 시간을 공유할 수 있게 된 것이라면.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린 듯 미동을 하지 않던 필리프가 느릿하게 등을 돌려 호위병을 불러 모았다. 황제의 눈빛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호위병들이 긴장감에 파르르 몸을 떨었다.

    “지금 당장 이곳으로 불러들일 수 있는 수색대가 얼마나 되지.”

    “아… 폐하. 지금 당장은 수색대의 인원이…….”

    “근처 모든 수색대를 소집하도록. 지금 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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