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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76)화 (76/139)
  • 76화

    얼굴 전체를 가릴 정도로 큰 가면을 쓴 필리프가 회장 구석으로 이동했다. 가면을 썼다고 해도 회장에 모인 사람들이 황제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자신에게 따라붙을 수백 개의 눈동자를 따돌리려는 시도는 애초에 하지 않는 편이 옳았다.

    회장 안에 왈츠곡이 울려 퍼지기 시작하자 필리프에게 진득하게 달라붙어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했다. 문제는 자신의 곁을 끈질기게 따라붙고 있는 크리스토 백작의 딸, 마리안이었다.

    제 아비의 지시를 받아 자신의 꽁무니를 졸졸 쫓고 있는 것이 조금 가엽긴 했지만, 확실하게 말해 두어야 할 시간이었다.

    “레이디 마리안. 내 정체를 사람들에게 소리 내어 알리고 싶은 생각인가? 그럼 내가 이 가면을 쓴 이유가 사라질 텐데.”

    “…예? 아, 저는 그것이 아니라…….”

    처음 듣는 황제의 차가운 목소리에 그대로 몸이 굳은 마리안이 필리프에게서 반 뼘 정도 거리를 벌렸다. 그때 마리안의 곁으로 한 남자가 다가와 섰다.

    “한 곡 추시겠습니까.”

    “예? 아, 저는…….”

    반가운 불청객이군. 화려한 용이 그려진 가면을 쓴 사내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인 필리프가 다시 바삐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 조금만 더.

    무도회 분위기가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필리프는 멀찌감치 자리를 옮겨 자신에게 쏠린 시선이 술과 음악으로 옮겨지기를 기다렸다.

    같잖은 가면에 가려진 귀족들의 더러운 속내. 사교계의 가면무도회는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 불륜을 행하기 안성맞춤이었다.

    술에 취한 이들이 하나둘 하룻밤 사랑을 나눌 상대를 찾기 위해 눈동자를 굴려댔고, 남자들은 마음에 드는 여자를 향해 검은색 카드를 내밀었다.

    여자가 카드를 받아드는 것은 함께 하룻밤을 보낼 준비가 되었다는 의미이고, 짝을 이룬 이들은 회장 옆 은밀하게 마련된 공간으로 이동했다.

    좁고 기다란 길을 따라 촘촘히 자리 잡은 밀실 안에 있는 것은 작은 침대 하나뿐. 그들이 내지르는 추악한 신음을 가리기 위해 악사들은 밀실 바로 앞에 배치되어 있었다.

    이제 거의 다 됐어.

    오래지 않아 이 공간을 떠날 수 있으리란 기대를 품은 필리프가 회장에서 가장 으슥한 곳으로 이동했다.

    “참으로 태평하십니다.”

    누군가 등 뒤를 바짝 따라붙는다는 것을 느낀 순간, 이미 오른손은 허리춤 칼집에 닿아 있었다.

    “어찌 이렇게 태평하실 수 있는지…….”

    검을 뽑아 들지 않은 것은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아챘기 때문이다. 필리프가 천천히 등을 돌렸다.

    “태평하다?”

    아무런 무늬도 없는 검은 가면을 뒤집어쓴 사내는, 필리프와 얼굴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곳에 서 있었다. 거친 숨을 내뱉는 사내의 가면 속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필리프가 말을 이었다.

    “케이든 아들레드. 자네가 이 무도회엔 어쩐 일이지. 상위 귀족들만의 은밀한 파티인 줄 알았는데, 황궁 기사단까지 초대되는 행사였던가?”

    “상위 귀족들만의 은밀한 파티…….”

    “그래, 자네에게 그런 취향이 있는지 몰랐군. 밀실은 저쪽이야.”

    한없이 여유로운 황제의 태도에 케이든이 참지 못하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당장 황제의 칼에 목이 베어진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폐하의 여자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어째서 이리 쉽게!”

    케이든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간신히 따돌렸던 회장 안 사람들이 시선이 다시 필리프에게 집중되기 시작했다. 손바닥을 올려 케이든의 말을 끊은 필리프가 미리 봐 두었던 공간을 가리켰다. 무도회의 악사들이 리허설을 했던 공간이 검은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다.

    “소란 피울 생각하지 마.”

    먼저 걸음을 옮기는 필리프를 뒤따른 케이든이 커튼을 내리며 가면을 집어 던졌다. 푸석푸석한 얼굴, 길게 자란 수염, 붉게 충혈된 눈동자. 마지막으로 케이든을 보았을 때와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었다.

    “이대로… 이대로 그녀를 찾기를 포기하신 것입니까? 혹시라도 그녀가 지금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 놓이기라도 한 것이라면!”

    “일 년. 벌써 일 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어.”

    격앙된 케이든과는 달리 필리프의 목소리는 낮고 침착했다.

    “자네의 말대로 그녀가 혹시 위험한 상황에 놓였더라도, 내가 손 쓸 수 있는 시간은 이미 오래전에 지났겠지.”

    “폐하!”

    “입 닫아!”

    필리프의 입가에서 으르렁거리는 거친 음성이 흘렀다.

    “다신 겁 없이 내 뒤를 따라붙을 생각을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필리프가 케이든의 목을 가볍게 쥐었다. 필리프의 손가락이 케이든의 목젖과 핏줄 사이를 느릿하게 쓸었다. 손가락은 조금만 힘을 실어도 목숨을 끊어놓을 수 있는 급소에 닿아있었다.

    꿀렁꿀렁. 긴장감에 빠르게 움직이는 핏줄에 힘을 살짝 주었다가 빼기를 반복하던 필리프가 케이든에게로 완전히 상체를 기울이며 뱉어냈다.

    “그때는 내가 이 손가락에 힘을 싣게 될 테니까.”

    * * *

    ‘요즘 시골에서 수도로 상경하는 사람들이 많은가 봐. 거리에 젊은 사람들이 엄청 많아졌어.’

    ‘그런데 막상 수도로 상경하더라도 딱히 할 일이 없지 않아? 시골에서는 아무래도 농사를 도왔을 테니까.’

    ‘시장 노점상에서 일 구하기는 쉽다고 하더라고. 벌이는 엄청 짜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그래? 그럼 귀족들의 시종으로 있는 것보다는 노점상에서 일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 자유로울 수 있잖아.’

    ‘에이. 안나 네가 모르는 소리야. 그렇게 푼돈 벌어봤자 간신히 끼니나 해결하는 정도래. 잠자리도 아주 고약하다고 들었어. 적어도 시종이 되면 끼니와 잠자리는 해결이 되니까 훨씬 낫지.’

    ‘음, 그런가.’

    안나는 놀만 부인과 마샤와 함께 시장에 다녀오던 날, 마샤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지금 자신이 황궁을 찾는다고 무턱대고 황제의 알현을 청할 수는 없으니, 겨울 무렵 황궁 시종 구인을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그때까지 무사히 살아남으려면, 먼저 지낼 곳을 찾아야 했다.

    숲을 벗어난 안나가 머리 위에 두른 두건을 이마 아래로 바짝 끌어내렸다. 수상한 차림새를 감추려면 날이 저물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나았지만, 치미는 허기를 견뎌낼 수가 없었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계곡물이라도 실컷 먹어두는 건데. 가만. 그렇다고 아무 물이나 먹을 수는 없지. 배 속 아이도 있는데 탈이 나면 큰일이니까.

    주린 뱃가죽을 틀어쥔 안나가 도통 힘이 실리지 않는 발을 내디뎠다. 숲에서 시장으로 가 본 적은 없었지만, 황궁에서 시장까지의 거리와 숲에서 황궁까지의 거리로 대강 짐작해 보니 적어도 두 시간 이상은 걸어야 도착할 듯 보였다.

    서점을 찾을 때 미리 준비한 옷과 신발은, 시대상을 최대한 반영해 준비한 것이었다. 길을 걸으며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될까 걱정했지만, 누추하고 꾀죄죄한 자신의 차림새에 관심을 가지는 이는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인 일이었다.

    “어이! 맥주 한잔하고 가겠어?”

    “아니, 지난주에 새로 생긴 선술집 증류주가 기가 막힌다고 하던데? 오늘 거기서 한잔하는 게 어떤가.”

    “아니, 증류주는 좀 비싸지 않아?”

    “다른 곳보다 훨씬 싸다고 들었어. 한번 가보세.”

    시끌벅적한 대화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꿀꺽 마른침을 삼킨 안나가 머리 위 두건을 한껏 조여 매며 시장 골목으로 들어섰다. 골목 어귀에서는 방랑 악사가 연주하는 곡이 경쾌하게 흘러나왔다.

    안나는 시장에 왔을 때 지나쳤던 곳 중 찾아야 할 곳을 미리 정해두었다. 맥주와 간단한 요리를 파는 선술집이었는데, 사람들이 잘 드나들지 않는 시장 북쪽 구석에 있는 곳이었다. 시장 초입 선술집들과 비교해 손님은 현저하게 적었지만, 가게 앞을 지키는 여자 사장의 인상이 몹시 인자했던 것이 기억났다.

    고개를 숙이며 골목 사이사이를 걷던 안나가 허름한 노점을 발견하고 반가움에 터져 나오려는 환호성을 삼켰다.

    “저…….”

    “응? 아, 들어오세요.”

    가게 문 앞을 지키고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던 여사장이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며 안나를 가게 안으로 안내했다.

    “저, 혹시 사람을 구하시나 해서 찾아왔습니다.”

    “…응? 사람?”

    텅 빈 가게 안을 한 번, 안나의 얼굴을 한 번 바라본 여사장이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눈이 잘 안 보이긴 하지만 꽤 어린 친구 같은데, 혹시 가출이라도 한 거야?”

    가까이서 마주하니 여사장의 얼굴 곳곳에는 깊은 주름이 패 있었다. 다행히 눈이 밝지 않아 자신의 정체에 대해 크게 의심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 세월의 흔적이 여실히 드러나는 그녀의 손을 잠시 바라보던 안나가 간절하게 호소했다.

    “돈은 주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제가 음식도 만들고, 시키시는 일은 다 할게요. 지금 전부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제가 당장 갈 곳이 없어서요.”

    푹 수그러진 안나의 정수리를 안쓰럽다는 듯 바라본 여사장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설마 파리 날리는 가게에 도적질하러 들어온 것 같지는 않고. 자, 이쪽으로 와.”

    허락한 건가? 눈치를 살핀 안나가 사장의 뒤를 따랐다. 그녀가 향한 곳은 검은 천으로 구분된 가게 안 주방이었다.

    “어째 종일 굶은 눈치인데, 맞아?”

    대답 대신 다시 고개를 푹 숙이는 안나를 보며 끌끌 혀를 찬 사장이 주방 찬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지금 있는 건 귀리 죽뿐인데, 좀 먹어볼 테야?”

    “감사합니다!”

    사장에게서 죽 그릇을 받아든 안나가 죽을 허겁지겁 입안에 밀어 넣었다. 조금도 간이 되지 않은, 차갑게 식은 죽이었지만, 지금 안나에게는 산해진미 못지않은 맛처럼 느껴졌다. 그릇에 눌어붙은 부분까지 싹싹 긁어먹은 안나가 아쉽다는 표정으로 한동안 빈 그릇을 내려다보았다.

    “온종일 장사해 봤자 몇 푼 벌지 못해. 그나마도 항구가 개방되는 날엔 이국 사람들이 와서 벌이가 되긴 하지만, 다른 날은 맨날 이렇게 파리만 날리지.”

    안나에게서 빈 그릇을 받아든 사장이 한숨 섞인 말을 뱉었다. 안나가 기대와 불안이 섞인 눈동자로 사장의 얼굴을 응시했다.

    “머물 곳이 생길 때까지 잠은 재워 줄게. 귀리 죽이라도 괜찮으면 같이 밥도 먹고.”

    “정말이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허락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안나가 사장의 어깨를 와락 껴안았다.

    “아이고, 숨 막혀. 삐쩍 마른 처녀가 왜 이렇게 힘이 세?”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실망하지 않으시도록 최선을 다할게요.”

    이제 시작이었다. 사장의 앙상한 어깨에 얼굴을 묻은 안나가 눈가에 고이기 시작한 눈물을 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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