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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75)화 (75/139)
  • 75화

    회의를 마친 필리프가 바쁘게 황궁 출입구로 나섰다. 오늘은 크리스토 백작의 가면무도회에 참석하기로 한 날이었다.

    “폐하, 이쪽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발을 옮기던 필리프가 그 자리에 우두커니 멈춰 섰다. 순간적으로 불어온 미지근한 바람에 섞인 익숙한 향. 아니, 설마.

    눈을 치켜뜬 필리프가 미세하게 떨리는 눈동자로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지루하리만큼 익숙한 황궁의 풍경이었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음. 가지.”

    마차에 올라타 눈을 감은 필리프가 양손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짙은 그녀의 그림자는 도저히 색을 지우려 들지 않았다.

    “먼저 가볍게 정찬을 드시고 무도회가 열리는 회장으로 이동하시겠습니다.”

    “음.”

    필리프가 마차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눈을 감으며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잡생각을 없애기 위해 세기 시작한 숫자가 천 단위로 접어들었을 때 마차의 덜컹거림이 멈추었다.

    “폐하. 방문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저택 정문 앞에 선 크리스토 백작이 직접 황제를 맞이했다. 그의 옆에는 커다란 백금발 가발을 뒤집어쓴 루이사 백작 부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백작 부인의 앞으로 다가간 필리프가 살짝 무릎을 굽히며 그녀의 손등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발갛게 볼을 물들이는 백작 부인에게 초대해 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건넨 필리프가 감흥 없는 눈길로 저택 전체를 훑어보며 백작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저택이 아주 근사해 보이는데.”

    “하하. 올해 저택을 증축하였는데, 식사 후에 차근차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그럼 안으로 드시지요, 폐하.”

    크리스토 백작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필리프를 저택 내 식당으로 안내했다.

    “저희가 평소에 먹는 대로 식사를 준비하긴 했는데, 폐하의 입에 잘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

    필리프가 안내된 자리에 앉아 준비된 그릇에 담긴 물로 손을 씻으며 고풍스러운 정찬 테이블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각자의 자리 앞에는 냅킨과 식전 빵, 나이프와 포크류, 와인 잔이 반듯하게 놓여 있었다.

    “폐하. 먼저 와인 한잔하시겠습니까? 친한 영주에게 받아온 와인이 있는데 그 맛이 아주 훌륭합니다.”

    “음. 그러지.”

    당도가 높은 와인을 시작으로 성대한 코스 요리가 차례차례 서빙되었다. 산해진미로 가득 채워진 음식을 눈앞에 두고 있으면서도 식욕이 조금도 생기질 않았다.

    “폐하. 폐하께서 송로버섯을 특히 즐기신다고 들었습니다. 어렵게 구한 것인데 한번 드셔보시지요.”

    황제의 포크에 집요하게 달라붙어 있던 시선을 들어 올린 크리스토가 등 뒤 시종에게 눈짓을 주었다. 바로 테이블 앞으로 다가온 시종이 황제의 접시에 잘 구운 송로버섯 한 덩이를 올려놓았다.

    “음. 향이 아주 좋군.”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린 필리프가 자른 송로버섯구이를 입에 넣었다. 향신료를 많이 넣지 않아 원재료의 맛이 풍부하게 느껴지는 맛이었다. 버석거리는 입을 움직여 버섯을 삼킨 필리프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한 맛이네.”

    “아, 그렇습니까? 그럼 더 드시지요. 뭐 하는 거냐. 어서 폐하의 접시에 놔 드리거라.”

    “예, 백작님.”

    거절의 의사를 밝히기도 전에 필리프의 접시에 다시 커다란 버섯구이가 놓였다. 필리프가 잠시 포크를 내려놓고 과실주 한 모금을 입에 머금는데, 누군가 주방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아니, 너는 먼저 회장으로 가기로 하지 않았어?”

    “예, 아버지. 그 전에 긴장이 되어서 과실주 한 잔만 청할까 하여 들렀습니다.”

    과장되게 눈썹을 끌어올리며 당황한 표정을 꾸미는 크리스토와 필리프를 흘끔거리며 준비된 말을 뱉는 그의 딸 마리안. 웃기지도 않는 연기에 실소가 터지기 직전이었지만, 필리프는 가까스로 표정 관리를 해냈다.

    “폐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레이디 마리안.”

    필리프가 마리안의 손등에 짧게 입을 맞추며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가슴골이 깊이 파인 상아색 민소매 드레스를 입은 마리안이 필리프의 옆자리에 앉자, 길게 늘어진 옷자락을 끌던 시녀 두 명이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났다.

    “마리안. 폐하의 잔이 비었는데, 다음 잔은 네가 한 잔 따라 드리는 것이 어떠냐.”

    “아, 제가 한 잔 올려도 괜찮겠습니까, 폐하.”

    미리 연습이라도 한 듯한 부녀의 합이었다. 잠시 그들의 장단에 맞춰 주기로 한 필리프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과하지 않은 아양과 교태로 자신의 매력을 어필하는 마리안과 유심하게 필리프의 표정을 살피는 크리스토 백작 사이에서 필리프는 간신히 한 잔의 술을 비워냈다.

    “폐하. 제가 한 잔 더 올리겠습니다.”

    “아니,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군.”

    술병을 잡는 마리안을 저지한 필리프가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자, 이제 충분히 먹은 것 같은데 회장으로 이동하는 것이 어떤가.”

    “저, 폐하. 디저트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아니. 디저트는 사양하겠네.”

    “아, 예. 그럼 바로 모시겠습니다, 폐하.”

    짐짓 아쉬운 표정을 지은 크리스토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서 필리프의 앞으로 다가왔다. 에스코트를 바라듯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는 마리안의 모습이 필리프의 시야에 담겼다.

    “레이디 마리안.”

    내민 손바닥 위에 다소곳하게 손을 얹은 마리안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필리프의 손바닥에 손을 얹기가 무섭게 손끝에 강하게 힘을 실은 마리안이 부끄럽다는 듯한 태도로 눈꺼풀을 내리감았다.

    ‘왜, 내가 손을 잡는 게 싫은 거야?’

    ‘아, 아닙니다. 시, 싫은 게 아니라.’

    ‘아니라?’

    ‘그게… 좀 떨려서요.’

    안나의 손을 잡고,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제 손을 얽었던 순간이 떠올랐다. 바르르 떨리는 가느다란 손가락이 제 손등을 간질였던 순간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했다.

    또, 또 그녀의 생각이다. 필리프가 거칠게 고개를 저으며 안나의 기억을 몰아내자, 곁에 서 있던 마리안이 고개를 들어 필리프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게 자연스럽게 손을 거둔 필리프가 빠르게 주방을 벗어났다. 마리안이 금세 자신의 곁을 따라붙었지만, 한번 거두어진 필리프의 시선은 다시 그녀에게로 향하지 않았다.

    * * *

    잠을 깨운 것은 시끄럽게 울리는 핸드폰 알람 소리가 아닌 귓가를 간지럽히는 산새 소리였다.

    “엄마야!”

    부스스 눈꺼풀을 들어 올린 안나가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신이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던 곳은 썩은 낙엽과 땅벌레들이 우글거리는 깨진 돌 사이였다.

    파드득거리며 치마 위에 들러붙는 벌레를 털어낸 안나가 골짜기를 빠져나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서 따뜻한 가을 햇살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 그럼.”

    황급히 골짜기를 벗어난 안나가 계곡 앞으로 다가섰다. 깨끗한 계곡물에 비친 자신은 서안나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찰랑거리는 금발 머리카락도, 생기있는 하얀 피부도 사라진 평범한 원래 자신의 모습. 자신의 원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다시 잊고 있었던 마음속 불안이 되살아났다.

    이런 모습으로 그를 만나, 그가 사랑했던 사람이 자신이었음을 이해시킬 수 있을까? 아니, 제대로 설명할 기회를 얻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안나가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전부 자신의 선택이었다. 부딪혀보지도 않고 미리 실망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래. 일단은 빨리 움직이자.”

    계곡물에 비친 제 얼굴을 내려다보던 안나가 급히 세수하고 일어나 길을 확인했다. 필리프와 함께 걸어 본 적이 있던 길이라 출구로 향하는 길은 기억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숲을 벗어나기 전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않는 일. 이곳에서 생활하며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을 종종 본 적이 있으니 머리 색은 굳이 바꿀 필요가 없었지만, 서양인과는 너무도 다른 외모가 문제였다.

    “당분간은 무조건 가리고 다니는 수밖에 없겠어.”

    안나가 입고 있던 원피스 속치마를 뜯어내 머리 위에 두르고 계곡물에 제 모습을 비춰보았다. 그래. 그래도 눈을 가리니까 훨씬 나은 것 같아. 고개를 푹 숙이고 걸으면 차림새로 수상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없을 거야.

    만족하듯 고개를 끄덕인 안나가 계곡 옆 폭이 좁은 길로 들어섰다. 이 길을 걷다 보면 넓은 평지가 나올 것이고 평지를 지나 조금만 더 걸으면 산 입구에 다다르게 될 것이다. 그 전에 잠깐.

    걸음을 멈춘 안나가 주변을 돌아보았다. 필리프와 숲을 걷다가 들개의 습격을 받았던 일을 기억해냈기 때문이다.

    가만. 그가 뭐라고 했었더라.

    ‘그런데 어떻게 그리 쉽게 들개를 잡으셨어요? 폐하께서는 장검을 가지고 계셨잖아요. 검을 빼는 데 시간이 걸렸을 것 같은데…….’

    ‘그거야 이 숲 곳곳에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숨겨 놓았으니까. 공격에 좀 더 효과적인 창을 사용했지.’

    ‘무기를 어디에 숨겨 놓으셨는데요?’

    안나가 집중하며 필리프가 해 주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액막이 풀을 몸에 지니고 다녔어. 악마나 마녀로부터 몸을 지켜준다고 믿었거든. 무기는 그 액막이 풀 근처에 숨겨 두었고.’

    ‘네…….’

    ‘그런데 무기의 위치는 왜 묻지?’

    ‘그냥, 궁금해서요.’

    ‘혹시나 하는 상황에서 무기를 찾아 나를 지켜 주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뭐. 폐하를 공격한다면 그게 사람이든 짐승이든, 제가 다 없애버릴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오, 그래? 네 말을 들으니까 이제야 좀 안심이 되는데?’

    “그래, 오레가노!”

    향이 강한 오레가노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약초를 찾아낸 안나가 수북하게 자란 덤불 근처 땅을 파고 팔목 길이 정도의 창과 돌을 깎아 만든 검을 발견했다.

    “음… 이건 너무 크고, 그래. 이게 좋겠어.”

    돌 검을 쥔 안나가 덤불 안에 창을 두고 다시 좁은 길에 들어섰다. 당장 필리프를 만나러 황궁으로 돌진할 수는 없으니, 그를 만나는 날까지 이 검을 무기 삼아 목숨을 부지해야 한다.

    검을 쥔 안나의 손에서 송골송골 땀이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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