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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74)화 (74/139)
  • 74화

    너무나도 이른 눈이 내렸다. 어둠이 가득한 새벽하늘에 재처럼 진눈깨비가 흩날렸고, 곧 눈발은 부피를 키우기 시작했다. 안나가 태어나서 처음 맞아보는 함박눈이었다.

    안나는 정신없이 하늘을 올려다보다 다시 부지런히 걸음을 걷고, 또다시 멈춰서 하늘을 올려다보기를 반복했다. 점점 굵어지는 눈발 때문에 시야가 흐려졌지만, 내딛는 발걸음이 가벼워 시간을 크게 지체하지는 않았다.

    “오셨습니까.”

    노크도 하지 않고 서점 문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남자의 목소리는 들리는데,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문 앞에 선 안나가 조용히 남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쉽지 않은 날입니다. 예상치 못했던 눈이 내리는군요. 길이 잘 보이지 않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안나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들려오는 목소리가 지난번과는 미묘하게 달랐다. 좀 더 낮았고, 말끝에 미세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안나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남자의 얼굴을 마주했다.

    “그곳으로 가져갈 것에 대해 잘 생각해 보았습니까.”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던 남자가 노인의 모습으로 뒤바뀌어 있었다. 언젠가 꿈에서 보았던, 바로 그 얼굴이었다. 그의 얼굴을 마주한 안나가 흠칫 뒤로 몸을 물렸다. 파르르 떨리는 두 눈과 핏기없는 얼굴에서 싸늘한 죽음의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다.

    “저… 여기 있습니다.”

    놀란 기색을 감추기 위해 바로 시선을 떨군 안나가 그에게 들고 온 가방을 건넸다. 안나에게서 가방을 넘겨받은 남자가 내용물을 확인하지 않고 안나의 얼굴을 응시했다.

    “아쉽지는 않습니까. 이대로 이곳에서의 삶을 전부 놓아버리는 것이.”

    반드시 돌아가야지. 돌아가게 되면 뭐부터 할까? 그래, 먼저 삼겹살에 소주를 먹어야겠어. 아니, 아니. 치킨에 맥주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어. 그간 못 먹었던 음식을 배불리 먹으면서 보지 못했던 드라마와 영화도 실컷 봐야지. 그리고 주말에 늘어지게 늦잠도 자고 또… 또 뭘 하지?

    다시 원래 자신의 삶으로 돌아오게 되면 하고 싶었던 일들이 너무도 많았다. 하지만 막상 다시 돌아온 지금, 그 모든 것이 전부 의미 없게 느껴졌다. 그러니까.

    “아쉽지 않습니다.”

    단호한 안나의 대답에 남자가 희미한 미소를 보였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치채기 힘들 정도로 금세 사라진 미소였다.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흔쾌히 내놓기 쉽지 않았을 텐데요. 결과를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지 않습니까.”

    안나는 전세금과 적금 통장에 들어있던 돈 전부를 결손 아동 후원금으로 기부했다. 한 치의 망설임 없는 결정이었다.

    “그곳에 가져간다고 해도 휴짓조각이 될 돈이니까요. 아무렇지 않았습니다.”

    마치 죽은 사람처럼 파리하게 굳어 있던 남자의 얼굴에 조금씩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안나에게로 가까이 다가온 그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럼 첫 질문을 다시 하지요. 그곳으로 가져갈 것에 대해 잘 생각해 보았습니까.”

    고개를 끄덕인 안나가 자신의 배 위에 손바닥을 얹었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배 속 아이와 함께 갈 수만 있다면요.”

    짧게 고개를 끄덕인 남자가 안나의 배를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처음이군요. 세상의 빛을 보기 전에 두 개의 시간을 모두 경험한 생명체는.”

    남자가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서점 속 물건들이 차례차례 사라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바닥에 깔린 수북한 짚이, 그리고는 고서가 꽂힌 책상이 마지막으로는 서점 벽마저 자취를 감추었다. 한순간에 불어온 눈발 섞인 바람이 안나의 시야를 완전히 가려놓았다.

    “당신은 오직 길을 열 수 있을 만큼만을 내놓았습니다.”

    사납게 불어오는 바람이 안나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헝클어뜨렸다. 눈동자에 바짝 힘을 준 안나가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한걸음 가까이 다가섰다.

    “그 길에 도착한 이후의 삶은 오직 당신이 감당해내야 할 몫.”

    “…알고 있습니다.”

    눈보라는 멈추지 않았다. 날카로운 바람이 안나가 입은 옷 사이를 파고들고, 칼처럼 맨살을 찔러댔지만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쾅!

    갑작스럽게 하늘을 울릴 정도로 커다란 소리가 울리고, 시야를 가리던 눈발이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안나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린 하늘 저 멀리 푸른 빛의 달이 보이기 시작했다.

    “길을 따라가십시오.”

    고개를 내리지 어두운 바닥에 새겨진 푸른빛이 보였다. 안나가 고개를 돌려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가 어슴푸레한 빛이 쏟아지는 곳에 안나가 가져온 가방을 던지고, 곧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뒤바뀌었다.

    손바닥을 쫙 뻗어 나아갈 곳을 가리키는 그를 향해 짧게 고개를 끄덕인 안나가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여전히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걸으며 나지막하게 그의 이름을 읊조렸다.

    필리프. 필리프.

    간절함을 담은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닿을 수 있기를.

    * * *

    손가락 하나 꼼짝하기 싫을 정도로 몸이 무거웠다. 깊은 수면에 빠지기 직전 무언가 툭툭 뺨 위로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조금씩 돌아오는 의식 속에서 안나가 무의식적으로 필리프의 이름을 읊조렸다.

    “으으음… 필리프…….”

    간신히 눈을 떴지만, 정신은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한참 눈만 느리게 끔벅이던 안나는 자신이 자그마한 구덩이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황급히 정신을 차린 그녀가 손을 더듬거리며 빠져나갈 만한 곳이 있는지 확인했다.

    “어! 그래. 여기야!”

    한참을 더듬거려 간신히 어두운 빛이 새어 들어오는 구멍을 찾아냈다. 기쁜 마음에 저도 모르게 환호성을 내지른 안나가 구멍 주변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물에 젖어 무거운 흙을 파내기를 한참, 드디어 동전 크기 정도였던 빛이 얼굴 전체를 밝히기 시작했다. 흙 속에서 얼굴을 빼낸 안나가 몸부림을 치며 구덩이 안을 빠져나왔다.

    여기가 어디지?

    눈앞에 보이는 것은 빼곡하게 우거져 누구에게도 시야를 내주지 않을 것처럼 완강해 보이는 빽빽한 수풀이었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주변을 살핀 안나가 상체를 낮추며 수풀 사이 틈을 찾기 시작했다.

    “엄마! 깜짝이야!”

    빠져나갈 곳을 찾는 것에만 너무 열중한 탓인지 발밑을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 하마터면 썩은 낙엽 속 움푹한 구덩이 안에 빠질 뻔한 안나가 간신히 몸의 중심을 잡았다.

    안나가 한참 빠져나갈 곳을 찾고 있는데 산새 한 마리가 후루룩 날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하늘 멀리 날아갈 것처럼 비상한 산새가 급작스럽게 비행 방향을 바꾸었다. 산새가 내려앉은 수풀을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가는데, 바로 눈앞에 몸이 통과할 정도 크기의 틈이 보였다.

    “어?”

    안나가 수풀 틈을 발견함과 동시에 산새는 푸드덕 깃을 치며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산새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하늘을 올려다본 안나가 빠르게 수풀 틈을 통과했다.

    안나는 자신이 잔뜩 젖어있는 숲의 한 가운데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야는 확 트여있는 곳이었지만, 도저히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제대로 돌아온 게 맞는 건가? 설마 어딘가에 실수가 있었다면 어떡하지? 모든 것을 버리고 돌아오는 것을 선택했지만, 그를 만날 수 없는 시간으로 와 버린 것이라면. 혹시 우리의 시간이 어긋나 버렸다면.

    뱃속에 불안감이 차오르기 시작했지만, 일단은 이곳이 어디인지 알아내야 했다. 확실한 것은 지금 자신이 해가 지기 일보 직전 숲에 남겨졌다는 사실 뿐이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돌아온 첫날, 산짐승의 밥이 되어 사라질 수는 없을 노릇이었다.

    비에 젖은 바닥에 미끄러지지 않으려 발가락에 힘을 주며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디뎠다. 평평한 길을 따라 잠시 걸으니 삐뚤빼뚤하게 이어져 있는 능선이 보였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하늘에 빠르게 어둠이 섞이고 있었다.

    지금 당장 산중을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일단은 오늘 밤을 무사히 지낼만한 공간을 찾는 게 좋겠어. 숲이 더 어두워지기 전에 빠르게 움직이자.

    두 주먹을 불끈 쥐여 보인 안나가 구불구불한 능선에 접어들었고, 구부러진 능선이 갈라지는 곳에 있는 커다란 바윗돌을 발견했다.

    “어? 여긴.”

    바윗돌 가까이 다가간 안나가 우측으로 고개를 돌리니 희미한 물소리가 들렸다. 어둠 때문에 위치를 정확히 알아낼 수는 없었지만, 공간의 익숙함이 느껴졌다. 필리프와 자신이 이레네를 찾아갈 때 잠시 땀을 식혔던 계곡 앞 바윗돌인 것 같았다.

    “…정말… 제대로 돌아온 거야?”

    그제야 안나는 자신이 제대로 시간을 거슬러 돌아왔음을 실감했다. 긴장이 한 번에 풀리고 찾아든 안도감에 온몸에 힘이 풀렸다. 바윗돌 위에 털썩 주저앉아 멍하게 흐르는 계곡 물소리를 듣다가 부엉이 울음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집중하자, 서안나. 그때 보았던 것을 떠올리자. 하룻밤을 지새울만한 곳이 있었는지 생각해 보자.”

    필리프의 등에 업혀 지났던 길을 떠올린 안나가 눈을 감았다. 그의 등에 얼굴을 기대고, 길이 짧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던 순간이 고스란히 머릿속에 되살아났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정신 차려, 서안나!”

    휘휘 고개를 돌린 안나가 다시 집중해 당시 보았던 풍경을 떠올렸다. 계곡 옆으로 뻗어, 빛이 완전히 가로막혀 있던 골짜기가 기억났다. 사람 한 명이 간신히 몸을 통과할 만큼 좁았기 때문에 잘하면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하룻밤 몸을 숨길 수도 있을 공간이었다.

    “그러니까 계곡을 앞에 두고 좌측으로… 그래. 이 길을 따라 걸으면 될 거야.”

    방향을 정한 안나가 급하게 발을 움직이는데, 몇 걸음 걷기도 전에 새까만 어둠이 안나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자신의 손가락 하나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의지할 만한 빛이라고는 하늘을 밝히는 별들뿐이었다.

    상체를 완전히 낮춘 안나는 바닥을 기어가는 방법을 선택했다. 가뜩이나 미끄러운 바닥 근처에 계곡이 있었다. 자칫 발을 헛디뎌 계곡물에 입수했다가는, 차가운 산바람을 버티지 못하고 얼어 죽을 것이 뻔했다.

    “어, 여기 같은데…….”

    바닥을 뒹구는 나뭇가지에 긁혀 몸 이곳저곳에 생채기가 생겼지만, 아픔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드디어 앞을 헤매는 손바닥에 움푹 패어 들어간 곳이 만져졌다. 안나가 쾌재를 부르며 잽싸게 골짜기 안으로 몸을 숨겼다.

    “몇 시간만 버티면 돼. 몇 시간만.”

    안나가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몸을 옹그렸다. 체온을 잃으면 큰일이었지만, 당장은 몸을 따뜻하게 유지할 만한 무언가를 찾을 도리가 없었다.

    눈에 힘을 주며 깜깜한 어둠을 바라보는데, 이내 졸음이 눈꺼풀을 무겁게 짓눌렀다. 안나가 감기는 눈꺼풀을 애써 다잡으려 해 보았지만, 내려앉기 시작한 눈꺼풀이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래. 그럼 딱 한 시간만.

    눈을 깜빡거리던 안나가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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