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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73)화 (73/139)
  • 73화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베르나는 필리프를 향해 살짝 무릎을 굽혀 예를 표했지만, 그녀의 고개는 뻣뻣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굳은 낯으로 베르나의 인사를 받은 필리프가 입을 열었다.

    “어쩐 일이지.”

    낮게 잠긴 목소리에서 귀찮음이 역력히 드러났다. 동요의 빛을 보이지 않은 베르나가 새틴 드레스 자락을 나풀거리며 필리프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보낸 서신에 답이 없으셔서 직접 찾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운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베르나가 과장되게 눈가를 찌푸리며 답했다. 웃기지도 않는 그녀의 연기에 장단을 맞춰 줄 기력이 없었다.

    “괜한 걸음을 한 것 같군. 보다시피 난 이렇게 멀쩡하니까.”

    어깨를 으쓱해 보인 필리프가 찻잔을 들어 찻물을 머금었다. 상냥한 미소를 머금은 베르나가 필리프를 향해 상체를 숙였다.

    “얼핏 제국에 떠도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바로 반응해 오리라 생각했는데, 필리프의 표정은 의외로 담담했다. 초조함을 감춘 베르나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황궁 시녀를 찾고 계신다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왜 그대가 그것을 궁금해하지? 설사 그렇다고 해도 그대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일일 텐데.”

    “폐하.”

    “어떤 의도로 이곳에 온 것인지 대충 짐작이 가지만, 그대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게 두지는 않을 거야.”

    필리프가 짧은 조소를 뱉으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성큼성큼 베르나가 앉은 곳으로 다가온 필리프가 무릎을 굽혀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베르나.”

    코앞으로 다가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필리프를 마주한 베르나가 급히 마른 숨을 삼켰다. 자신의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필리프의 모습이 낯설었다.

    “네 가장 큰 문제가 뭔 줄 알아? 바로 늘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을 탐한다는 점이야.”

    베르나가 느리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파르르 떨리는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던 필리프가 그녀의 얼굴에 더 가까이 제 얼굴을 밀착했다.

    “시간이 지나면 단념하는 방법을 배울 줄 알았는데, 내가 너무 낙관했던 모양이야.”

    마치 즐거운 게임을 하는 듯, 필리프의 입꼬리가 사르르 말려 올라갔다.

    “이번에 확실히 말해 두지. 나는 절대 네가 원하는 것을 호락호락 내어 주지 않을 거야. 나는 네 남편처럼 네 말에 쉽게 속아 넘어가 주지 않을 테니까.”

    “말씀이 심하시군요.”

    필리프의 눈을 마주하고 있는 동안, 베르나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들이 빠르게 스쳐 갔다. 그에게 타격을 줄 만한 말을 빠르게 꺼내 놓아야 할 타이밍이었다.

    “폐하는 카마르 제국의 황위 계승자가 될 수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베르나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무릎을 굽히고 있던 필리프가 상체를 세우자 눈높이의 차이가 확연해졌다.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베르나를 응시하던 필리프가 다시 한번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래서.”

    “…예?”

    “내가 황실 적통이 아닌 건 사실이지. 그래서 그게 왜.”

    하루, 베르나에게는 단 하루가 필요했다. 필리프가 황제와 황후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뒷받침할 증거를 찾았고, 지병으로 생사를 넘나드는 아버지를 간신히 구워삶았다.

    아버지는 베르나에게 필리프를 황태자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겠다고 굳게 약속했다. 그녀가 모아둔 증거를 전부 폐기하는 조건에서였다.

    아버지는 황태자의 폐위를 알리기로 했던 당일 숨을 거두었고, 되찾으려 했던 증거는 모두 한 줌 재가 되어 사라져 버린 후였다.

    황실 적통 후계자는 베르나 마티어스 한 명뿐이었기에, 황제의 자리는 원래 제 것이라야 마땅한 것이었다. 그러나 남자가 황제의 자리에 올라야 한다는 썩어빠진 황실의 풍습을 지키기 위해, 황궁 안을 떠돌았던 고아가 황제의 왕관을 쓰게 된 것이었다.

    “왜, 다시 증거를 모을 생각인가? 그 증거를 모아서 대체 어디에서 확인받을 생각이지? 아버지의 무덤? 아니면 어머니의 무덤?”

    필리프가 출생에 얽힌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부모님의 죽음 이후였다. 베르나를 향한 일말의 미안함이 사라진 것은 계속해서 이어지는 음독 시도의 배후에 그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기 때문이었다.

    “네가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자리는 타론 대공의 아내 자리야.”

    필리프가 짐짓 다정한 목소리를 꾸며냈다. 내내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던 베르나의 표정이 무너져 내렸다.

    “그 자리라도 지키고 싶다면, 조용히 돌아가는 편이 좋을 거야. 아, 혹시 알아? 꾸역꾸역 네 자리를 지키다 보면 파이만 제국 황후의 자리에는 오를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필리프 마티어스.”

    “해가 뜰 때까지 상대해 줄 시간이 없을 것 같군.”

    말끝이 반듯하게 떨어졌다. 입술을 부들부들 떨며 쉽게 입을 열지 못하는 베르나를 바라보며 필리프가 다시 한번 말했다.

    “우리 사이에 굳이 배웅은 필요 없겠지.”

    그가 응접실 문을 향해 손바닥을 펴 보였다. 권유가 아닌 명령이었다.

    “그리고 다시 만났을 때는.”

    필리프가 베르나에게 카드 한 장을 건네며 말했다.

    “황제를 알현하기 위한 적절한 예법을 갖추어야 할 거야.”

    필리프가 건넨 것은 황제의 직인이 찍혀 있는 방문 카드였다.

    * * *

    “자, 오늘 하루도 고생 많았어. 우리 내일도 힘내자고!”

    식당이 연일 역대 최고 매출을 경신하고 있어서인지, 민 사장의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 밝았다. 직원 한 명 한 명에게 격려의 말을 건넨 그가 안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안나의 신메뉴는 출시되자마자 손님들의 큰 호평을 끌어내고 있었다.

    “안나 씨 메뉴가 아주 인기야. 내가 연말에 특별 보너스 두둑이 챙겨줄게. 알았지?”

    안나에게 눈을 찡긋해 보인 민 사장이 호탕한 웃음을 지으며 매장을 나섰다.

    “참, 그래도 가게가 바빠서인지 회식 얘기 없는 건 다행이네.”

    “아, 안나 씨 우리 이 근처에서 맥주 한잔하고 들어가려는데, 같이 갈래?”

    은근슬쩍 자리를 피하려던 안나가 고개를 저으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한데, 오늘 제가 약속이 있어서요.”

    “약속? 아니 근데 안나 씨 요즘 너무 한 거 알아? 어째 매번 퇴짜맞는 기분인데?”

    “보면 요즘 너무 바빠? 아니, 혹시 그새 남자친구라도 생긴 거야?”

    회식 자리에도 언제나 빠지지 않고 참석해왔고, 동료들과 술자리도 잘 거절하지 않았던 안나였다. 눈에 띄게 변한 그녀의 모습에 동료들이 하나둘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래. 요즘은 점심시간에도 매번 밖에 나가잖아. 아니, 우리가 뭐 잘못한 거라도 있어? 왜 이렇게 피하는데?”

    “아뇨, 그런 게 아닌데…….”

    “거, 일 끝났으면 바로바로 집에 갑시다. 희만 씨, 내일 와이프 생일이라고 하지 않았어? 맥주 마시지 말고 빨리 들어가. 늙어서 초라하게 쫓겨나고 싶지 않으면.”

    동료들의 말을 끊은 상민이 안나에게 턱짓해 보였다. 상민에게 입 모양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한 안나가 핸드백을 챙겨 들고 잽싸게 식당을 빠져나왔다.

    누구에게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고 식당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안나는 상민과 주방장에게만 건강 문제로 식당을 그만둬야 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전했고, 두 사람과 퇴사 일정을 조율했다.

    ‘사장님께는 내가 따로 말씀드릴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몸이나 챙겨. 건강 회복되면 나중에 언제든 연락하고.’

    ‘네. 감사합니다, 주방장님.’

    삼십 년이란 시간을 보낸 세계에서 작별을 전할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정리할 것이 많이 없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어쩐지 조금 서글픈 기분이 들었다.

    “아무래도 내가 인생을 좀 헛살았나 봐.”

    여전히 큰 변화가 없는 배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중얼거린 안나가 골목 모퉁이를 돌았다. 거리의 네온 등이 환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어? 오랜만이네?”

    “네. 저, 치킨 한 마리만 포장해주세요.”

    “왜, 오늘은 가게에서 안 먹고?”

    “네.”

    식당에서 일이 끝나고 혼자 종종 찾곤 했던 식당 근처 치킨집에 들어서니, 머리가 하얗게 센 여 사장님이 반갑게 안나를 맞아주었다.

    “그럼 생맥주 한잔 마셔. 오랜만에 왔으니까 내가 한 잔 공짜로 줄게.”

    퇴근 후 통닭 한 마리와 차가운 생맥주 한 잔을 떠올리며 힘든 식당일을 견뎌냈던 적이 있었다.

    “아, 아니에요. 요즘 한약을 먹고 있어서 술은 좀…….”

    안나가 황급히 생맥주 기계 손잡이를 잡는 사장님을 만류했다.

    “그래? 응. 그럼 잠시만 기다려. 금방 튀겨 줄 테니까.”

    고소한 기름 냄새가 작은 가게 안을 가득 채웠다. 사장님이 치킨 무와 젓가락, 소금을 봉투에 담는 사이에 안나가 핸드백 속 작은 쇼핑백을 꺼내 들었다.

    “자, 다 됐어, 아가씨. 여기 받아.”

    “저, 사장님. 이거 받으세요.”

    “응? 이게 다 뭐야?”

    안나가 내민 쇼핑백 안을 들여본 사장님이 놀라 눈썹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쇼핑백 안에는 핸드크림과 화상용 물집 연고 몇 종류가 들어있었다.

    “아, 저… 그냥 지나가다가 보여서 산 거예요. 그냥 쓰시라고… 그럼 안녕히 계세요.”

    쑥스러운 표정을 지은 안나가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데스크에 올려놓고 서둘러 가게를 빠져나왔다. 등 뒤에서 ‘아가씨, 잔돈 가져가야지’ 외치는 사장님의 소리가 들려왔지만, 발을 멈추지 않고 그대로 골목 귀퉁이를 돌았다.

    “자, 그럼 작별인사는 다 끝난 건가?”

    홀가분한 기분을 느낀 안나가 새까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 따위 보이지 않는 서울 하늘이었지만, 언젠가 이 하늘이 떠오를 날이 있을지도 모른다.

    잠시 자리에 멈춰 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안나가 부지런히 발을 움직였다. 최근 며칠 내내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지만,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맑았다.

    약속된 시간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집으로 돌아온 안나가 침대 옆에 놓아둔 커다란 가방을 집어 들었다. 제대로 준비한 것인지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확실할 것이라는 희망에 기대를 걸어 보는 수밖에 없었다.

    가방을 열어 손바닥 정도 크기의 약병에 넣어둔 연고가 새지 않았는지, 단단한 끈으로 묶은 종이 뭉치에 이상이 없는지, 얼음팩으로 단단하게 포장한 꾸러미에 이상이 없는지 꼼꼼하게 확인했다.

    “이제 다 된 건가.”

    집안 가구와 가지고 있던 잡동사니를 전부 처분하고, 유일하게 남긴 자그마한 침대 위에 몸을 뉘었다.

    ‘내가 원하는 것을 가지고 온다면, 그곳으로 가지고 갈 수 있는 것 하나를 허락해 주겠습니다. 신중하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당신이 그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게 해줄 유일한 힘이 될 것으로…….’

    어차피 선택은 정해져 있었다.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지기 시작하고 느릿하게 눈꺼풀이 감겨 내려갔다.

    안나. 안나.

    의식이 수면 밑으로 가라앉기 직전, 희미하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놓을 듯 처절한 외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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