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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72)화 (72/139)
  • 72화

    원하는 것을 묻는 안나의 말에도 한참을 가만히 입을 닫고 있던 남자가 천천히 입술을 떼어냈다.

    “먼 북방 왕국에 아름다운 용모와 온화한 성품을 지닌 황태자가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사랑하는 연인이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국력 강화를 위해 타국의 황녀를 황태자의 정혼자로 삼게 되었습니다.”

    잠시 말을 멈춘 남자가 시선을 낮추었다. 모자 아래 가려져 있던 남자의 얼굴이 드러나는 순간, 안나가 자신도 모르게 날카로운 비명을 내질렀다.

    “다, 당신은.”

    확실하다. 안나가 꿈에서 보았던 그 얼굴, 노인의 얼굴에서 소년의 얼굴로 변했던 그였다. 부들부들 몸을 떠는 안나를 아무렇지도 않게 흘끔 내려다본 남자가 이야기를 이었다.

    “황태자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 사랑은 오직 자신의 연인 하나뿐이었으니까요. 그래서 그는 자신의 아버지와 대립하게 되었고,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은 아들에게 격분한 아버지에 의해 황태자의 직위에서 물러날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남자에게서는 이렇다 할 표정이 드러나지 않았다. 그의 이야기가 제대로 귓가에 와 박히지 않았지만, 당장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 자세를 바로 한 안나가 남자의 얼굴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황태자는 제국의 황제가 되겠다는 꿈을 포기할 수도, 사랑하는 연인을 포기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영혼을 팔아 악마와 계약을 맺게 됩니다.”

    딱 하는 소리가 들리고 어둑어둑했던 주변에 환한 빛이 쏟아졌다. 남자의 말에 집중하고 싶었지만, 정신은 점점 아득해져 갔다.

    “황태자는 황제가 되었고, 사랑하는 연인을 황후로 삼았습니다. 제국은 평화롭게 번영했고, 황제와 황후는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지요. 그리고 시간이 흘러, 악마와의 계약일이 다가왔습니다.”

    본론이 가까워짐을 느낀 안나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안나의 코앞으로 다가온 남자의 얼굴에 미묘한 웃음기가 걸려 있었다.

    “소원을 들어준 대가로 악마에게 영혼을 빼앗긴 순간 황태자는 지옥의 불더미 아래 달궈지게 되어있었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황태자의 얼굴에서 그 어느 때보다 환한 미소가 피어났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행복하게 웃으며 악마에게 영혼을 내주었지요.”

    “…….”

    “그는 왜 그리 행복하게 웃었을까요?”

    길었던 남자의 이야기 끝은 질문이었다. 내내 벌어져 있던 입을 다문 안나가 바닥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 순간 문득 필리프가 들려주었던 오페라의 내용이 떠올랐다.

    사랑해서는 안 될 여인을 사랑하게 된 사제는 사랑을 위해 믿음을 져버렸다. 그는 사랑을 지키기 위해 악마와 손을 잡게 되었고, 사랑하는 이를 남겨두고 떠나게 된다. 마지막으로 여인에게 작별 인사를 전한 사제는 악마로 변하게 되고, 홀로 남은 연인은 평생 이유도 모른 채 그를 기다리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너무 가슴 아픈 내용이네요.’

    ‘흠.’

    심드렁한 표정으로 답한 필리프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바보 같은 선택 아닌가?’

    ‘누군가를 정말 너무너무 사랑하면, 가끔은 바보 같은 짓을 하게 되죠. 결국은 홀로 남은 연인이 너무 가여워요.’

    벌떡 상체를 일으켜 세운 필리프가 안나의 눈동자에 똑바로 시선을 고정했다.

    ‘내가 바보 같다고 말한 건, 홀로 남은 여인이야.’

    ‘네?’

    ‘내가 그녀였다면 먼저 악마와 계약했을 거야. 사랑하는 이와 함께 있기 위해서.’

    얼빠진 표정을 짓는 안나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은 필리프의 눈동자에서 진한 소유욕이 드러났다.

    ‘지옥 불이라도 함께 있는 편이 낫겠지.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고 혼자 남겨지는 것보다는.’

    ‘…….’

    ‘왜 그런 표정을 짓지? 넌 나와 함께 있고 싶지 않은 거야?’

    ‘전 그냥 평범하게 함께 있고 싶은데요. 뜨거운 지옥 불이 아니라.’

    ‘그래? 아무래도 네 몸이 뜨거움에 익숙해져야 할 것 같은데.’

    그의 뜨거운 입술이 온몸을 느릿하게 적셔나갔던 순간을 떠올리자 안나의 몸에 짜릿한 전율이 일었다.

    사랑하는 연인을 남겨 두고 떠나면서 행복하게 웃을 수 있었다면. 그렇다면.

    떨어뜨렸던 고개를 든 안나가 남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잠자코 안나의 입이 벌어지기를 기다리는 남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사랑하는 연인을 남겨 두고 떠나면서 행복하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악마가 그의 정혼자와도 계약을 맺은 것이겠죠.”

    남자의 검은 머리카락이 묘하게 일렁였다. 안나가 떨림을 감추기 위해 급하게 숨이 들이마셨다.

    “그럼, 마지막으로… 내 이름은?”

    안나가 꿈에서 보았던 안나 스완과 케이든의 대화를 떠올렸다. 안나 스완에게 미색 보자기를 건네며 케이든이 덧붙였던 말은.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이름을 알아냈습니다. 오피르수스. 이 이름을 기억하십시오.’

    ‘…감사합니다, 기사님.’

    고개를 끄덕인 안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피르수스.”

    안나의 얼굴에 머물던 남자의 시선이 바닥으로 이동했다. 바닥에는 빛바랜 종이 한 장이 떨어져 있었다.

    “내가 원하는 것입니다.”

    종이를 잡은 안나가 내용을 읽기 전 그가 빠르게 덧붙였다.

    “서둘러야 할 것입니다. 알겠지만, 이곳에서의 시간은 그곳에서의 시간과 같이 흐르지 않으니까요.”

    상체를 숙여 안나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인 남자가 용건이 끝난다는 듯 등을 돌려 고서 틈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가 사라지고도 한동안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안나가 후들거리는 무릎을 일으켜 세웠다.

    얼마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서점을 나서니 밖은 이미 어둠이 까맣게 들어차 있었다. 어둠에 읽을 수 없는 종이를 가방 깊은 곳에 넣은 안나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 가장자리에 슬며시 자리하는 푸른 빛. 블루문은 시간의 문을 열어주는 매개체였다.

    그러니까 정말, 시간이 많지 않았다.

    * * *

    사병의 폐지를 명한 필리프는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수도 중앙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에 각 지방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병력만을 허락받은 군주들의 불만이 이어지고 있었다.

    “폐하. 샤를 영주의 서신이 도착하였습니다.”

    읽고 있던 서류에서 눈을 떼어내지 않은 필리프가 턱을 까딱거렸다. 황제의 턱이 가리킨 곳에 서신을 내려놓은 수행원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폐하. 아무래도 이번 무도회에는 참석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제국 최대 부호인 라이만 남작의 호화로운 가면무도회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빠져나갈 구실이야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지만, 지금 필리프에게는 수도 귀족들의 도움이 절실했다.

    “일정을 잡도록 해.”

    “알겠습니다, 폐하.”

    “그럼 나가 봐.”

    예상치 못한 축객령에 놀란 수행원이 눈동자의 크기를 키웠다. 안나 스완이 사라진 지 두 달. 황제가 처음으로 수행원에게 안나 스완의 수색 상황에 관해 묻지 않았다.

    “뭐해. 나가 보라니까.”

    “예? 아, 알겠습니다, 폐하.”

    매일 밤 침실로 부르던 최면술사를 찾지 않게 된 지 일주일, 최근 황제는 지나칠 정도로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황제의 과중한 업무량이 걱정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란 예감에 수행원은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제멋대로 황제의 곁을 떠난 시종 하나 때문에 황제의 삶이 통째로 흔들리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

    황제가 잠시 눈을 감고 눈 위에 손바닥을 얹었다. 상상할 수 없는 업무량을 소화하고 있는 그의 얼굴에서 짙은 피로가 드러났다.

    “폐하.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오늘은 전실에 준비해.”

    “알겠습니다, 폐하.”

    필리프가 책상 위에 쌓인 서류를 하나하나 유심히 훑어보았다. 늘 자신의 것이었던 스트레스와 중압감이었다. 어차피 자신의 짐이었으니 그 무게가 무겁다고 불평하고 싶지 않았다.

    “하아…….”

    서류의 마지막 장에 서명한 필리프가 의자 등받이에 깊게 등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노크 소리가 들리고 식사가 준비되었다는 수행원의 말소리가 들렸지만,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살짝 열린 창문 틈으로 이제는 제법 쌀쌀해진 바람이 불어왔다. 그녀를 찾지 못한 채 맞이하게 된 가을이었다.

    눈을 감으면 안나와의 추억이 머릿속에서 느릿하게 되살아났고, 잠시라도 눈을 붙이면 그녀는 늘 꿈에 나타나 추억을 각인시켰다.

    바로 눈앞에 있는 것처럼 선명했던 그녀의 모습이 조금씩 희미해지기 시작한 것은, 최면 속 검은 머리카락의 여인을 마주한 이후였다. 최면술사를 찾지 않기로 한 것은, 안나가 아닌 다른 여인을 마주하길 원하는 자신의 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이것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나.”

    필리프가 자조적으로 읊조리며 감았던 눈을 떴다. 자기 자신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스스로를 비웃게 되는 순간이었다. 메말랐던 가슴에 뜨거운 물을 채워 준 안나. 제 삶의 여자는 그녀뿐이라고 생각했다. 안나 한 명으로 빈틈없이 채워져 있던 필리프의 가슴 속에 낯선 여인이 스며들려 하고 있었다.

    그래. 배신감 때문에 일시적으로 느껴지는 감정일 수 있다. 그래, 어림없는 소리야.

    벌떡 자리에서 일어선 필리프가 재킷을 손에 들었다.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행원이 바로 그의 뒤를 따라붙었다.

    “호위는 필요 없어.”

    뒤따르는 호위병을 차갑게 내친 그가 빠르게 중앙 복도를 통과했다. 멈추지 않고 내딛던 발걸음이 멈춘 곳은 안나가 일하던 황궁 주방 앞이었다. 이제 막 저녁 식사 준비가 마무리된 시간이라 주방 안 시종들이 삼삼오오 모여 식사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폐하.”

    얼마나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었을까. 필리프의 모습을 발견한 카라나 주방장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폐하.”

    갑자기 머리가 아득해지고, 가슴이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주춤주춤 발을 물린 필리프가 빠르게 복도를 지나쳐 황궁 밖으로 향하는 대리석 계단을 내려갔다.

    분명 두 발로 땅을 지탱해 움직이고 있는데, 공중에 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금방이라도 휘청이는 몸이 바닥으로 쓰러져 내릴 것 같았지만, 필리프는 이를 악물며 걸음을 재촉했다.

    미친 사람처럼 걷고 또 걸어 황궁 출입구에 도착한 필리프가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는 사이, 출입구를 지키고 있던 문지기가 그의 곁을 둘러쌌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그저 막막했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폐하.”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기묘한 표정의 황제는 멍한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등 뒤를 몰래 뒤따르던 호위병들이 멀찌감치 물러서 황제의 상태를 살피는 것이 보였다.

    “마릴 저택에 다녀올 테니 마차를 준비해.”

    한참 입을 열지 않던 필리프가 잠긴 목소리로 명했다.

    “알겠습니다, 폐하.”

    황제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지만, 황제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는 없었다. 황제의 마차가 출입구에 도착하고, 필리프가 마차에 몸을 싣기 직전 저 멀리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말에서 내린 남자가 필리프의 앞에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폐하를 뵙습니다.”

    마린 항구 주변 수색대의 기마병이었다.

    “무슨 일이야.”

    “항구에 선박이 도착하였습니다. 베르나 황녀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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