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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71)화 (71/139)

71화

타론 대공가의 아침은 평소보다 유난히 소란스러웠다. 하얀 레이스와 연분홍 리본으로 장식한 진줏빛 드레스를 입은 베르나가 하녀들을 닦달하며 잔소리를 퍼부어대고 있었다.

“아니, 저 꽃병은 테이블 정 중앙에 놓아야 균형이 맞지. 대체 일을 한 지가 몇 년째인데 이런 사소한 것까지 내가 신경 써야 하지?”

“죄송합니다, 마님. 당장 옮기겠습니다.”

“샹들리에 촛불에서 밀랍 타는 냄새가 너무 심하니, 새 촛불로 바꿔 놓도록 해.”

“예, 마님.”

타론 대공 저에서 생활한 지 이제 열흘. 그동안 베르나에 의해 다섯 명의 시종이 일자리를 잃었다. 모두 그녀의 심사를 뒤틀리게 했다는 사소한 이유에서였다.

“와인을 내와. 나쟐 영주에게 받은 것으로.”

제국에서 가장 큰 수도원을 가지고 있는 나쟐 영주는 해마다 질 좋은 와인 몇 병을 타론 대공에게 바치고 있었는데, 대공은 이 와인을 몹시 아껴 저택의 중요한 행사를 제외하고는 병을 오픈하는 것을 꺼렸다.

“뭐 하는 거지? 당장 내오지 않고.”

당장 안주인의 심기를 거슬렀다가는 그대로 저택을 떠나야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하녀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예, 예. 바, 바로 준비해오겠습니다.”

부리나케 응접실을 빠져나간 하녀가 오래지 않아 과실주 병과 치즈, 크래커가 담긴 쟁반을 들고 베르나 앞에 섰다. 하녀가 들고 온 와인잔을 거칠게 빼앗아 든 베르나가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저으며 하녀를 물렸다. 풍미 좋은 와인을 한 모금 머금은 베르나가 서너 시간에 걸쳐 치장한 머리 장식과 드레스를 거실 정 중앙 전신 거울에 비쳐 보았다.

제국 내에서 유행하는 머리인 백 금발 가발을 쓰고 화장을 하는 것에만 서너 시간이 넘게 걸렸다. 성가신 일이었지만, 오늘 저녁 열릴 만찬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감수해야 할 일이었다.

“마님. 대공님의 마차가 도착하였습니다.”

“음.”

베르나가 반쯤 남은 와인을 한 번에 들이키자 하녀가 익숙하게 빈 잔을 정리했다. 거울에 꼼꼼하게 자신의 모습을 비춰본 베르나가 허브차를 머금으며 입안에 남은 과실주의 흔적을 지워냈다. 그녀가 우아한 걸음걸이로 복도를 지나쳐 이제 막 저택 입구에 들어서는 타론을 마주했다.

“오셨어요?”

베르나가 눈웃음을 지으며 대공의 코트를 받아들었다.

“음. 벌써 준비를 마친 거야?”

“그럼요. 아까부터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는걸요.”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타론이 베르나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만찬까지 시간이 좀 남을 것 같은데.”

타론의 눈동자가 평정심을 잃고 붉게 번들거렸다. 베르나가 힘을 실은 채 허리를 감싸오는 타론의 손끝을 가볍게 밀어내며 입을 열었다.

“먼저 제게 해 줄 말씀이 있지 않나요? 어차피 우리는 만찬 이후에 여유롭게 즐길 수 있으니 말이에요.”

아쉬움에 입맛을 다신 타론이 베르나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그래. 그럼 응접실로 가지.”

응접실 주변의 시종을 모두 멀찌감치 물린 베르나가 타론의 맞은편 의자를 그에게로 바짝 당겨 앉았다.

“좀 알아보셨어요?”

카마르 제국에 있는 자신의 연락병을 통해 필리프 황제의 동태를 면밀하게 감시하고 있는 베르나였지만, 최근 들려오는 소문이 심상치 않았다. 그 소문의 진위에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는 타론의 도움이 필요했다.

“황제가 총애하던 시종 기억하지? 당신과 내가 도주시키려고 계획했었던.”

“계속 말씀하세요.”

베르나가 타론에게 바짝 몸을 밀착하며 이야기를 재촉했다.

“그 시종이 사라졌다는 소문을 들었어. 황제가 주변 입단속을 철저히 시킨 것인지, 이 사실이 그리 많은 이들의 귀에 들어간 것 같지는 않던데.”

사라졌다? 안나 스완이? 그녀 혼자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사라지는 것은 불가능해. 그렇다면 누구의 도움을 받았다는 뜻인가? 설마 케이든 기사와 관련된 것인가?

“지금 현재 카마르 제국 황궁이 조금 뒤숭숭한 분위기라고 해. 아무래도 황제가 그 시종에게 생각보다 더 깊이 빠져 있었던 모양이야.”

타론은 자신이 알아낸 정보를 낱낱이 베르나에게 일러 주었다. 필리프 황제가 많은 수색병을 대동해 시종을 찾으려 했다는 사실과 최근에는 주술사와 최면술사까지 황궁에 불러들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야기를 듣는 베르나의 입술이 조금씩 말려 올라갔다.

“아무래도 서신의 내용은 바꾸는 것이 좋겠지?”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베르나가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그녀의 얼굴 가득 잔잔한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지금 다른 서신을 보낸다고 해도 활자가 그의 눈에 들어올 리 없겠죠.”

“그럼 어떻게 하지?”

“선박을 준비해 주세요. 제가 직접 확인하고 올 테니까.”

온몸에 가볍게 이는 전율을 즐기며 바르르 몸을 떤 베르나가 타론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 * *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것이 꿈이기를 바랐지만, 현실은 참담했던 어제와 다르지 않았다. 긴 한숨을 내쉰 필리프가 뻑뻑한 눈을 깜빡이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검은 머리의 낯선 여자가 내뱉었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나의 그녀가 아닌 얼굴이, 나의 그녀가 아닌 목소리로 내뱉었다. 어째서 나의 그녀가 아닌 이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것일까.

가만히 어두컴컴한 창밖을 바라보던 그가 종 줄을 잡아당겨 수행원을 호출했다.

“폐하, 기침하셨습니까.”

“오늘 일정은.”

“오전에 재정 회의가 있고, 오후에는 대신들과의 만찬에 참석하셔야 합니다.”

수행원이 반드시 만찬에 참가해야 한다는 사실을 한 번 더 강조했다. 필리프가 셔츠 단추를 잠그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의 입은 무엇보다 빨랐다. 황제와 황궁 시종 사이의 로맨스와 관련된 가십이 제국 곳곳으로 퍼져나갔으니, 아무리 단단히 입단속을 하려 해도 안나 스완의 실종 소식이 알려지는 것은 순간이었다. 더 늦기 전에 대신들과 귀족들에게 상황을 설명하는 편이 옳았다.

“만찬 이후에 루이스를 부르도록.”

“…알겠습니다, 폐하.”

황제가 찾는 이는 최면술사인 루이스 반디야르였다. 벌써 삼 일째 황제는 루이스를 침실로 불러들이고 있었다.

“그럼 나가봐.”

황제가 최면술사를 찾는 일이 잦아지는 것이 걱정스러웠지만, 지금 자신의 염려가 황제의 귀에 제대로 닿을 리 없었다. 안나 스완이 사라지고 난 후 황제는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처럼 위태로운 모습을 보였다.

부모님을 잃고도 바로 다음 날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업무를 처리했던 황제였다. 그랬던 그가 자신의 유약함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다과를 준비하겠습니다.”

이번에도 당연한 거절의 말이 들려오리라 생각했지만, 황제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도의 숨을 내쉰 수행원이 침실을 나서고 곧 착복 시종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간단히 요기한 필리프가 바로 회의실로 향했다.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대신들의 보고를 듣고 적당한 피드백을 뱉었다. 시간은 지독히도 더디 흘렀다.

“폐하. 전실로 모시겠습니다.”

대신들과의 식사 자리가 이어졌다. 필리프는 준비했던 말을 뱉었다. 많은 이들이 각자의 목소리를 내었지만, 제대로 귓가에 와 박히는 이야기는 없었다. 필리프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듯한 표정을 꾸며내는 것뿐이었다.

“루이스를 부르겠습니다.”

모든 일정을 마무리한 필리프가 안락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댔다. 극심한 피로감에 무릎이 휘청일 정도였지만, 가슴은 기분 좋게 뛰고 있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곧 루이스가 침실에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폐하를 뵙습니다.”

“바로 시작하지.”

시간을 지체할 이유는 없었다. 눈을 뜬 필리프가 침실 한쪽 끝, 짚단이 수북이 깔린 곳으로 이동했다.

“편히 호흡하십시오. 셋을 세겠습니다.”

다시 또 그녀가 아닌 이를 마주하게 될까? 분명 머리로는 눈앞에 보였던 여자가 자신이 애타게 찾는 여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심장은 그 낯선 여인을 향해 미칠 것처럼 반응하며 뛰었다.

“폐하. 깊게 호흡하십시오. 절대 호흡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떠나간 안나의 흔적을 찾으려 했다. 어떻게든 그녀의 얼굴을 다시 마주하고 싶어,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시작한 최면이었다.

하지만 늘 눈앞에 나타나는 이는 떠나간 안나가 아닌 낯선 여인이었다. 반드시 이유를 알아내야 했기에 다시 그녀를 마주해야 했다.

“그분의 과거가 보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눈앞에 두 개의 문이 보이십니까.”

최면에 걸리는 순간 눈앞에 커다란 돌문이 보였다. 필리프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 보이는 문을 여십시오. 조금 더 희미하게 보일 것이고, 손잡이 빛이 바래 있을 것입니다.”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뎌 두 번째 문으로 다가갔다. 자욱한 안개 때문에 손잡이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더듬더듬 손을 움직이며 손잡이를 잡으려는데 축축한 안개가 손등과 얼굴, 머리카락에 치덕치덕 달라붙었다.

한참이나 손을 움직이며 손잡이를 찾았고, 마침내 문손잡이가 손에 잡혔지만, 단단하게 잠긴 문이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봉인하고 싶은 기억일수록 접근하기 힘겨울 수 있습니다. 손잡이가 열리지 않으면 그분의 과거를 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아니. 아니야.”

거칠게 고개를 저은 필리프가 손잡이를 잡은 손에 온 힘을 실었다. 간절함 때문이었을까. 잡아 쥔 손잡이가 느릿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세게 깨문 입술이 터진 것인지 입안에서 쇠 맛이 느껴졌다.

“들어가셨습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잊은 필리프가 어둠 속에 제대로 보이지 않는 인영을 찾아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바람이 어두운 방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느껴지고, 한쪽 구석에서 어슴푸레한 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보이는 이는 자그마한 등을 잔뜩 구부린 채 떨고 있는 어린아이였다. 바짝 마른 어깨가 안쓰러운 마음에 손을 뻗는데 갑작스레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네가 이제껏 돈 한 푼 제대로 벌어다 준 적이 있었어? 어디다 대고 큰 소리야!

너 말 다 했어? 너는 뭘 그렇게 잘했는데! 참아주니까 이제 막 나가겠다는 거야?

이거 안 놔!

주변 소음이 심해지면서 아이의 어깨는 점점 더 움츠러들었다. 아이의 눈에서 뚝뚝 흘러내리기 시작한 눈물이 바닥에 물웅덩이를 만들었지만, 흐느끼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는 듯 고사리 같은 손으로 제 입을 아프게 틀어막고 있었다.

뻗은 필리프의 손이 아이의 어깨에 닿기 직전, 동그란 고개가 돌아갔다. 땀과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한 아이의 눈을 뚫어지라 응시했다.

분명 낯설어야 하지만, 너무나 익숙하게 느껴지는 까만 눈동자가 피하지 않고 필리프의 시선을 맞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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