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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70)화 (70/139)
  • 70화

    알람 소리에 번쩍 눈을 뜬 안나가 핸드폰 액정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6시. 조금 피곤하긴 했지만, 조금이라도 먼저 하루를 시작하려면 바로 몸을 일으켜야 했다. 오늘은 그녀가 애타게 기다려 온 주말이었다.

    ‘식사는 잘 하고 계시죠? 영양 상태가 불균형하면 당연히 태아에게 좋지 않습니다. 입맛이 없더라도 삼시 세끼를 꼬박꼬박 챙겨 드셔야 해요. 자, 이 책을 가져가셔서 읽어보세요.’

    여의사의 말을 떠올린 안나가 가장 먼저 냉장고로 향했다. 미리 장을 봐 두어서인지 작은 냉장고 안이 틈 없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음. 샐러드만 먹을 수는 없으니까.”

    샐러드용 채소를 꺼내든 안나가 어젯밤 미리 냉동에서 꺼내 놓은 소고기의 상태를 확인했다. 아직 살얼음이 살짝 끼어 있어, 미지근한 물에 담가 두고 바로 채소를 손질했다.

    “다른 아이들처럼 너도 네가 먹고 싶은 걸 알려주면 좋겠는데.”

    참깨 드레싱을 곁들인 샐러드 위에 구운 소고기를 얹은 안나가 테이블 위에 접시를 내려놓으며 혼잣말을 뱉었다. 임신 사실을 알게 되고 배 속 아이를 위해 억지로 꼬박꼬박 음식을 먹고 있긴 했지만, 도무지 식욕이 나질 않았다.

    임신하면 평소에는 즐기지 않았던 음식이 먹고 싶어지고 식욕이 왕성해지는 경우도 많다던데, 어찌 된 것이 먹고 싶다는 생각 자체가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그래도 먹다 보면 괜찮아지겠지?”

    배를 쓰다듬으며 혼잣말을 이은 안나가 억지 미소를 띠며 포크를 들었다. 소화가 잘 되게 천천히 음식물을 씹어 넘기며 깨끗하게 접시를 비워냈다. 쉼 없이 접시 설거지를 마친 안나가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오늘은 굉장히 바쁠 거야. 고단하겠지만, 함께 힘내자!”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인 그녀가 향한 곳은 시립 도서관이었다. 미리 꼼꼼하게 적어둔 노트를 보며 도서를 대출하고 바로 다음 목적지를 향해 지하철에 올라탔다. 원하는 도서를 판매하는 곳은 서울에 단 한 곳뿐이었데, 지하철로 한 시간 이상 걸리는 거리에 있는 곳이었다.

    주말 오전 지하철 안이 꽤 북적였다. 한 시간 걸리는 거리를 내내 서서 갈 자신이 없어 빈자리를 찾아 고개를 돌렸지만, 빈자리는 임산부 배려석뿐이었다.

    저기에 앉아도 되나.

    안나가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는 사이 빈자리에 사람이 앉았고, 한숨을 내쉰 안나가 지하철 가장 안쪽으로 이동했다.

    멍하니 서 있으면 바로 필리프를 떠올리게 될 것 같아 바로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손에 들었다. 가지고 있는 것은 작디작은 실마리뿐. 이 실마리를 바탕으로 그가 있는 곳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정신없이 책을 읽는 사이 안나가 내릴 역의 이름이 들렸다. 들고 있던 책을 가방에 넣은 안나가 지하철에서 내려 빠르게 계단에 올랐다.

    “어라? 길이 이상하네.”

    부지런히 움직이던 발을 멈춘 안나가 다시 꼼꼼하게 핸드폰 지도를 확인했다. 분명 지도에 표시된 길은 하나였는데, 눈앞에는 두 개로 갈라진 길이 보였다.

    잘못 왔나? 아닌데. 분명히 제대로 왔는데.

    지도를 보는 것, 길을 찾는 것에는 누구보다 자신 있다고 자부해왔는데 혹시 실수가 있었나?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안나가 도로와 연결되어 있지 않은 쪽으로 발을 뻗었다. 어차피 아직 시간이 이르니 길을 잘못 들었다는 것이 확실해지면 다시 돌아와도 될 일이었다.

    “여기에서…….”

    꼬불꼬불 미로 같은 길이 이어졌다. 계속해서 같은 곳을 걷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발을 멈출 수가 없었다. 주변을 꼼꼼히 확인한 안나가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한 시간쯤 걸었을까? 언덕 하나를 넘고 나니 갑작스레 주변 풍경이 바뀌었다.

    마치 습한 안개가 자욱한 골짜기에 발을 디디는 느낌이었다. 음침하고 괴기스러운 기운이 온몸을 휘감았지만, 제대로 발을 들여놓은 곳에서 이대로 도망쳐 버릴 수는 없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안나가 자신에게 주문을 거는 듯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조금씩 안개가 걷히고 자그마한 건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 같은 길 한 가운데 신기루처럼 자리한 건물. 꿀꺽 마른침을 삼킨 안나가 건물 가까이 다가갔다.

    불투명한 건물 유리에는 검은색 커튼이 쳐져 있었고, 그 어디에도 서점을 나타내는 표식이 없는 곳이었지만 이곳이 제가 찾는 곳이 맞는다는 확신이 들었다.

    똑똑.

    안나가 문을 두드리고 응답이 들려오길 기다렸다. 아무리 기다려 봐도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 귓가를 문가에 바짝 가져다 대는데, 소리도 없이 문이 열렸다.

    “들어가도… 되나요?”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고개를 넣었지만, 상점 안은 고요하기만 했다. 긴장감에 손바닥에서 축축한 땀이 배어 나왔다. 축축한 손바닥을 바지에 닦은 안나가 상점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상점 안으로 들어섰을 때 처음 느껴지는 것은 언젠가 맡아본 적 있는 기묘한 향이었다.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던 적이 언제였는지를 떠올리는데 갑자기 멀리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들짝 놀라 몸의 중심을 잃고 바닥에 넘어지기 직전, 안나가 배를 감싸 안았다.

    “무슨 일로 이곳을 찾았습니까.”

    다행히 몸은 푹신한 솜이 여러 겹 깔린 곳에 낙하했다. 황급히 정신을 추스른 안나가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수많은 고서가 빽빽이 꽂혀있는 책장 옆으로 사람의 인영이 보였다.

    “혹시 필요한 것이 있습니까?”

    멀리서 들렸던 목소리가 조금 또렷하게 들려왔다. 젊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저…….”

    앉은 곳에서 몸을 일으킨 안나가 조심스럽게 남자의 앞으로 다가갔다. 어둠에 가려져 있던 남자의 얼굴이 드러나기 직전,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먼저 내가 원하는 것을 가지고 와야지요.”

    * * *

    “자, 이제 눈을 감으십시오, 폐하. 잠시 호흡이 일정해지기를 기다리겠습니다.”

    짚으로 된 침대에 누운 필리프가 살짝 빨라진 심장 박동이 정상으로 가라앉길 기다렸다.

    “자, 제가 셋을 세면 폐하께서는 그분이 있을 만한 공간으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 둘, 셋.”

    최면술사의 손가락이 마찰함과 동시에 익숙한 곳이 시야에 들어왔다. 라이젠 산의 입구였다.

    “폐하. 무엇이 보이십니까.”

    “산. 라이젠 산이 보여.”

    “조금 더 올라가 보겠습니다.”

    뭉게구름이 잔뜩 몰려와 산봉우리를 뒤덮고 있었다. 짙은 안개에 주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어려웠다.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알아볼 만한 것을 찾는 사이, 굵은 빗줄기가 내리치기 시작했다. 흐릿했던 사방이 짙은 어둠에 잠겨 들었다.

    “너무 어두운데…….”

    쿵!

    갑자기 번개가 치더니 공간의 명암이 뒤바뀌며 누군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필리프가 다급하게 인영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끝에 축축하게 젖어 있는 무언가가 잡혔다.

    “…얼굴이, 얼굴이 보이지 않아. 옷… 옷을 잡은 것 같은데…….”

    “자, 그럼 조금 밝은 곳으로 이동하겠습니다.”

    최면술사의 말이 끝나자 공간이 뒤바뀌었는데, 자신이 이제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공간에 서 있었다.

    광활한 들판 구석에 있는 꾸불꾸불한 비탈을 지나 잠시 걸으니, 커다란 소나무 두 그루와 작은 연못이 보였다. 누군가 연못가에 지저귀는 산새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녀는 커다란 모자를 쓰고 있었다.

    “보이십니까.”

    고개를 끄덕인 필리프가 천천히 발걸음을 떼어냈다. 여인이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가냘픈 어깨에 손을 얹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그대로 입을 열었다.

    “안나.”

    다시 한번 커다랗게.

    “안나.”

    그녀가 쓰고 있던 크림색 모자가 바람에 흔들렸다. 모자챙을 잡은 손가락이 희고 길었다. 그녀에게 눈높이를 맞춰 주려 무릎을 굽힌 필리프가 그녀가 고개를 돌리기를 기다렸다.

    “…필리프.”

    그녀가 고개를 돌리기 전 먼저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아니다, 그녀가 아니다.

    그녀의 목소리와는 다른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필리프가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분명 낯선 목소리였는데, 희한하게도 익숙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필리프.”

    다시 한번 필리프의 이름을 부른 여자가 온전히 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넓은 모자챙 아래 너무나도 낯설기만 한 여자의 얼굴이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아니, 아니야.”

    필리프가 거칠게 고개를 저었지만, 마음과는 다르게 뻗어진 손이 낯선 여자의 얼굴에 닿았다. 여자의 얼굴에 닿은 손이 제멋대로 움직이며 눈물이 번진 그녀의 얼굴 곳곳을 훑었다.

    이마, 눈썹, 콧대, 콧방울, 입술 그리고 뺨.

    모든 것이 달랐다. 느껴지는 감촉에 어느 하나 익숙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폐하. 그분을 만나셨습니까.”

    최면술사의 질문에 아니라고 즉각적인 답을 내뱉을 수가 없었다.

    “만나지 못하셨다면, 마지막으로 장소를 한 번 더 이동하겠습니다.”

    “아니! 잠시만.”

    황급히 최면술사의 말을 자른 필리프가 두 눈에 힘을 주며 눈앞 여자의 얼굴을 응시했다. 여전히 그의 손은 그녀의 얼굴 곳곳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누구야.”

    눈앞에 있는 여자는 분명 안나가 아닌 것을 알고 있는데, 어째서 그녀의 얼굴에서 손이 떨어지지 않는 것일까. 끝이 살짝 아래로 처진 눈매, 동그란 눈동자, 끝이 뾰족한 작은 코, 턱 끝을 스치는 까만 머리카락. 낯선 여인의 생김새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기다란 속눈썹이 한 번 크게 깜빡이고 그녀의 새까만 눈동자와 정면으로 시선이 맞닿았다.

    “기억해 주세요.”

    “…뭐?”

    울음 섞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시간이 멈춘 듯 주변 모든 상황이 진공 상태로 바뀐 기분이 들었다. 그대로 여자에게서 등을 돌려 달아나고 싶은 마음과 조금 더 가까이에서 그녀를 보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치열하게 격돌했다.

    “부디 저를…….”

    여자가 무언가를 더 내뱉으려는 순간 숫자를 세는 최면술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셋!

    최면술사가 셋을 셈과 동시에 눈을 뜬 필리프가 누워있던 곳에서 벌떡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온몸에 식은땀이 흥건했다.

    “폐하.”

    “왜 최면을 풀었지?”

    이마에 흐른 땀을 신경질적으로 닦아낸 필리프가 최면술사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내뱉는 말투에서 고스란히 드러나는 사나움에 잠시 어깨를 움츠린 최면술사가 고개를 떨구며 답했다.

    “최면 상태가 깊어지려는 조짐이 보였습니다.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그렇게 되면 나중에는 최면을 푸는 것이 불가능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내일 같은 시간에 보는 것으로 하지.”

    “…….”

    이틀 연속으로 최면에 빠지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모르는 황제가 아니었기에, 그를 제지할 방법이 없었다. 잠시 망설이던 최면술사가 황제에게 들리지 않을 작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알겠습니다,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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