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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69)화 (69/139)

69화

안나가 머릿속으로 요리법을 꼼꼼하게 복기했다. 수도 없이 만들어 몸으로 익힌 요리법이었지만, 작은 실수 하나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집중해 완성한 요리를 접시에 옮겨 담고, 파슬리 가루를 뿌려 김선우 주방장의 앞으로 내밀었다. 작은 숟가락으로 음식을 덜어낸 주방장이 민 사장과 함께 요리를 맛보았다.

“와, 안나 씨. 어째 더 맛있어진 것 같은데? 안 그래?”

동그랗게 눈동자의 크기를 키운 민 사장이 동의를 구하듯 주방장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인 주방장이 다시 신중하게 음식 맛을 본 뒤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괜찮은 것 같습니다. 지난주 블라인드 테스트도 통과했으니, 당장 다음 주부터 신메뉴에 올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렇지? 그래. 그럼 먼저 메뉴판부터 손봐야겠네. 자, 자기들은 그럼 오픈 준비해. 수고하고.”

민 사장이 콧노래를 부르며 주방을 빠져나갔다. 이유 없이 무단결근했던 안나가 어제 온종일 나사 하나 빠진 모습을 보여 내심 마음에 불안이 있었는데, 다행히 오늘 안나는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식당에서 최근 일 년간 선보였던 신메뉴가 신통치 않은 반응을 보였기에, 이번 안나가 개발한 새로운 음식에 사활을 걸어야 했다. 아직 안나의 레시피를 전부 계량화하지 못한 상황이었기에 누구보다 간절하게 안나의 컨디션 회복을 바라고 있던 민 사장이었다.

“아, 그리고 자기들. 우리 신메뉴 출시 기념으로 오늘 회식 어때? 간단하게 삼겹살에 소주 좋지 않아?”

주방을 나섰던 민 사장이 다시 주방 안으로 빼꼼히 고개를 들이밀며 물었다.

또 삼겹살에다 소주라니. 주방에 있던 인원들 전부가 다시 한번 민 사장의 쪼잔함에 혀를 내둘렀다. 평소 직원들이 회식에 빠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민 사장이었기에 모두 울며 겨자 먹기로 싸구려 삼겹살집 회식에 동의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 다들 괜찮은 거지? 자, 그럼 내가 예약할게.”

“아, 저 사장님.”

“응?”

“죄송하지만 저는 오늘 선약이 있어서요.”

물기 묻은 손을 앞치마에 닦아낸 안나가 민 사장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

“오늘은 죄송하지만 참석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안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직원들이 하나둘 안나의 곁을 둘러싸며 말을 이었다.

“아, 안나 씨 선약이 있었구나. 그럼 이걸 어쩌나. 안나 씨 메뉴 출시 축하 자리에 본인이 빠지는 건 말이 안 되잖아.”

“맞습니다, 사장님. 아무래도 나중에 안나 씨 괜찮을 때로 다시 시간을 잡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그래. 어제 보니까 안나 씨 몸도 별로 좋지 않은 것 같던데 이번 주는 편히 쉬는 게 좋지 않겠어요?”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직원들의 이야기를 듣던 민 사장이 짭짭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그럼 다음에 하는 거로 하자고.”

민 사장이 주방을 완전히 나가자 안나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직원들이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렸다.

“아니, 진짜 전생에 돼지만 잡던 백정이었나. 왜 저렇게 삼겹살을 못 먹어서 안달이래?”

“누가 아니래? 아니, 오늘도 안나 씨 아니었으면 또 그 기름때 자글자글한 테이블에 앉아 누린내 나는 삼겹살 먹으며 감탄사 내뱉을 뻔했잖아.”

한참을 민 사장의 쩨쩨함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던 직원들이 안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지나가듯 물었다.

“그나저나 안나 씨, 정말 괜찮아? 어제 얼굴이 많이 안 좋아 보이던데.”

“네, 괜찮아요. 아무래도 그 전날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랬나 봐요.”

“그래. 안나 씨도 이제 슬슬 술 조절해야 할 나이이긴 하지.”

“자, 이제 오픈 준비합시다.”

주방장의 한 마디로 주방 안 소음이 한꺼번에 사그라들었다.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 직원들이 메뉴를 준비하기 시작했고, 주방 안에 금세 희뿌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저, 주방장님.”

나물 반찬을 마무리한 안나가 주방장의 곁으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

“왜, 안나 씨.”

“저, 점심시간에 잠시 나갔다 와도 될까요? 병원 예약을 해 두어서요.”

어제 귀신처럼 창백했던 안나의 안색을 떠올린 주방장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녀와. 혹시 늦을 것 같으면 미리 연락하고.”

오픈하자마자 여러 테이블의 주문이 밀려들었다. 최근 민 사장의 공격적인 SNS 마케팅 덕분인지 식당은 연일 사람들로 북적였고, 이에 직원들은 식당 안 간이 테이블 안에서 간단히 점심을 해결하고 있었다.

“늦지 않게 다녀오겠습니다.”

오전 장사의 설거지를 마친 안나가 앞치마를 푸르며 작은 손가방을 집어 들었다. 식당 근처 병원을 예약했으니, 부지런히 움직이면 늦지 않게 돌아오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평일인데도 병원은 제법 많은 사람으로 북적였다. 만삭 임산부의 배를 넋 놓고 바라보던 안나가 황급히 카운터로 다가가 신분증을 내밀었다.

“저쪽에 잠시만 앉아서 기다리세요. 이름 부르면 간호사분 따라 들어가시면 돼요.”

“네.”

안나가 카운터 바로 앞 의자에 앉아 정면으로 보이는 벽시계를 바라보았다. 이제까지 한 번도 느끼지 못했는데, 시계의 초침이 너무나도 빨리 움직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안나 님?”

“네!”

“이쪽으로 오세요.”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안나가 차트를 든 간호사의 뒤를 쫓았다. 살짝 열려있는 문틈으로 흰 가운을 입은 중년 여의사의 모습이 보였다. 안나의 얼굴을 올려다본 의사가 얼굴에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앞자리로 손을 뻗었다. 다행히 그 미소에 저릿저릿 등줄기를 타고 오르던 긴장이 조금 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쪽에 앉으세요.”

“네.”

길게 심호흡한 안나가 의사의 맞은편에 자리했다.

* * *

“헉!”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필리프가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커튼이 쳐져 있지 않은 창문 밖은 여전히 어둠이 가득했다. 아직 날이 밝으려면 한참이 남은 시간이었다.

또 이 꿈인가.

질척하게 젖은 침의를 벗어낸 필리프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벌써 이틀째 반복되고 있는 악몽에, 제대로 된 잠을 자는 것이 불가능했다.

테이블 앞으로 다가가 자그마한 약병을 손에 들었다. 길었던 전쟁 이후,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약 없이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을 때 먹었던 수면제였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약병을 테이블 서랍 깊숙이 밀어 넣고 궐련 상자를 집어 들었다. 어차피 잠을 도피처 삼아봤자 달아날 수 있는 곳은 한정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공중에 진주 같은 눈물을 흩뿌린 안나가 자신에게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꿈. 발악하며 길게 손을 뻗어봐도 내민 손끝이 도저히 그녀에게 닿질 않았다. 가만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던 필리프가 궐련 파이프에 불을 붙였다.

뿌연 궐련 연기를 뿜으며 꿈에서 보았던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런 식으로라도 그녀의 얼굴을 보는 것이 달가웠지만, 허상인 그녀의 모습만을 쫓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진저리쳐지게 한심하게 느껴졌다.

‘폐하와 그분 두 사람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헛소리하지 마!’

‘어차피 기억은 차츰 옅어질 것이고, 시간이 지나면 완전하게 지워내는 것이 가능해질 것입니다. 그러니, 불가능한 일에 힘을 쏟지 마십시오.’

“불가능한 일이라.”

이레네의 말을 떠올린 필리프가 낮게 읊조렸다. 궐련 파이프를 비스듬하게 문 필리프가 창문을 열었다. 희뿌연 궐련 연기와 섞인 미지근한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헝클였다. 눈가를 간지럽히는 머리를 귀찮다는 듯 걷어낸 그가 수행원을 호출했다.

“예, 폐하.”

“잠시 걷고 들어오지.”

“호위병을 부르겠습니다.”

“아니. 필요 없어.”

수행원의 말을 자른 필리프가 얇은 재킷을 손에 들었다. 수행원이 며칠 사이 부쩍 야윈 황제의 얼굴을 근심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황제는 벌써 이틀째 식사를 거르고 있었다.

“폐하. 조금이라도 식사를 하셔야 합니다. 가벼운 식사를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나중에.”

필리프가 빠른 걸음으로 침실을 벗어났다. 초조한 표정으로 그의 뒤를 따라붙던 수행원을 눈빛으로 무르며 황궁 밖 중앙 정원으로 향했다. 어두웠던 하늘에 조금씩 희끄무레한 빛이 섞이고 있었다.

이레네는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남긴 채 뒤돌아섰다. 그런 그녀의 팔을 붙잡아 절박하게 외쳤다.

‘그녀를 찾아줘. 내가… 이렇게 부탁하니.’

‘스스로 떠나기를 결심한 사람입니다. 진심으로 그녀를 원하신다면, 그녀의 선택을 존중해 주시지요.’

이레네를 닦달하며 추궁해 보기도 했고, 위협 섞인 협박을 내뱉어도 보았다. 하지만 고집스럽게 닫힌 그녀의 입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지지부진한 수색도 마찬가지였다. 제국 곳곳에 퍼진 수색대를 전부 불러들여 대대적인 수색을 펼치고 있지만, 안나의 흔적은 그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말 그대로 증발해버린 것이다.

정말 이대로 끝난 것인가? 이레네의 말대로, 그저 잊어보려 노력하면 되는 건가?

자문하는 사이, 정원 가장 안쪽에 당도했다. 흐드러진 나뭇가지를 걷어내고 정원 연못 옆 의자에 다가선 필리프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지독한 피로감이 몰려들었다.

“하아…….”

눈을 감으면 어김없이 안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조금 더 집중하면 제 얼굴, 그리고 몸 곳곳에 와 닿던 그녀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필리프… 필리프…….

뜨거운 온도를 지닌 그녀의 빨간 입술이 벌어지고, 입술 사이에서 자신의 이름이 뱉어졌다. 더 참지 못하고 그녀의 입술에 제 입술을 겹치려는 순간, 거짓말처럼 그녀의 모습은 사라진다.

시야에 보이는 것은 어두컴컴한 공간에 혼자 남겨져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자신뿐이었다.

눈을 떠 어둠이 걷히고 있는 하늘을 올려다본 필리프가 재킷 속에 들어있던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묻었다. 그녀의 모든 흔적이 사라진 지금, 자신에게 남겨진 것은 이 싸구려 손수건 하나였다.

손수건에 코를 묻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지만, 희미하게 남아 있던 체향은 모두 사라진 후였다.

“폐하! 폐하! 괜찮으십니까!”

제 주위를 동그랗게 둘러싼 호위병과 수행원의 얼굴이 보이고, 그제야 필리프는 자신이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폐하!”

“소란 떨 것 없어. 그만 돌아가지.”

아무렇지도 않게 자리에서 일어선 필리프가 몸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걸음을 옮겼다. 가슴이 고통스럽게 조여들어 길고 길게 호흡해 보았다. 제대로 숨을 쉬고 있었지만, 살아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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