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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68)화 (68/139)
  • 68화

    집으로 돌아온 안나가 잠시 멍하니 집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빠르게 뛰는 심장 박동이 여전히 가라앉지 않았다. 사 온 임신 테스트기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후 곧바로 욕실로 향했다.

    먼저 꿈처럼 흐릿하기만 한 정신을 다잡고 싶었다. 샤워기를 튼 안나가 물의 온도를 조절했다. 한참 뜨거운 물을 맞고 있으니 몸 근육의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작게 몸을 웅크리고서도 내내 뜨거운 물을 맞았다. 손가락 끝이 퉁퉁 불어 터질 때까지 물을 맞다가 간신히 샤워기 레버를 내렸다.

    보드라운 수건의 감촉이 좋았다. 그곳에서는 엄청나게 까끌까끌한 천을 수건 대용으로 사용했었지. 잠시의 틈이 생기면 어김없이 그가 있는 세계에서의 삶이 떠올랐다.

    욕실 밖으로 나가 임신 테스트를 집어 든 안나가 다시 욕실로 들어왔다. 하얗게 김이 서려 있는 욕실 거울을 닦아내니 잔뜩 긴장한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크게 심호흡한 그녀가 상자를 열어 테스트기를 꺼냈다.

    눈을 감고 변기 위에 앉아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렸다. 샤워기 노즐에서 뚝뚝 떨어지던 물방울 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을 무렵, 안나가 꾹 감고 있던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하나… 둘.”

    테스트기에 선명하게 새겨진 빨간 색 선 두 줄. 눈을 비비고 몇 번이나 테스트기를 확인해 보았지만, 뚜렷하게 새겨진 빨간 색 두 줄은 사라지지 않았다.

    힘이 풀린 몸이 바닥으로 쓰러지기 직전 안나가 세면대를 붙잡아 간신히 몸을 지탱했다. 몸의 온기가 한 번에 식어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모든 것이 확실해졌다. 생생한 꿈을 꾼 것이 아니라 실제로 경험한 것이었다. 갑자기 흐릿했던 머릿속이 맑아지기 시작했다.

    부스스 몸을 일으켜 세운 안나가 욕실을 나서 옷장 앞으로 향했다. 깨끗하게 빨아놓은 겨울 잠옷을 입고 도톰한 양말을 꺼내 신었다.

    머리카락의 물기를 꼭꼭 닦아낸 안나가 다시 거울 앞에 섰다. 자신의 얼굴이지만, 그 얼굴에 드러난 감정을 제대로 읽어낼 수가 없었다. 그녀가 양손을 들어 검지를 입술 끝에 가져다 댔다.

    손끝에 힘을 주어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만들어낸 안나가 푸스스 바람 빠진 웃음을 뱉었다.

    잠시 넋을 놓고 있다가 제 배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에 번뜩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 보니 온종일 제대로 먹은 것이 없었다. 특별히 배가 고프지는 않았지만, 뭐라도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의자에서 바로 몸을 일으켰다.

    “뭐가 좋을까.”

    냉장고 안에 휑했다. 유통기한을 하루 남겨놓은 두부 한 모, 표면이 자글자글하게 쪼그라든 오이 하나, 반쯤 남은 우유 한 통 그리고 맥주 한 캔.

    “정말 너무 먹고 싶은데, 아무래도 이건 안 되겠지?”

    보기만 해도 시원한 맥주캔을 집어 들고 군침을 삼킨 안나가 배를 내려다보았다. 다시 실없이 웃은 그녀가 맥주캔을 원래의 자리에 내려놓았다.

    “음. 뭘 좀 사 와야겠는데. 뭐가 좋을까.”

    그를 잃었다는 상실감에 빠져 모든 삶을 놓아 버릴 수는 없었다. 일단은 살아야 했다. 자신을 위해서도 또 배 속 아이를 위해서도.

    꺼 두었던 핸드폰의 전원을 켜고 인터넷 창을 켰다. 한참 임산부에게 좋은 음식을 검색한 안나가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섰다. 내딛는 발걸음에 조금씩 힘이 실리고 있었다.

    * * *

    이레네의 움집 앞에 도착한 필리프가 재킷 주머니 속에 넣어 둔 약병을 꺼내 들었다. 그에게 너무도 익숙한 마크였다. 끝으로 갈수록 획이 진해지는 필리프 이름의 약자. 이레네가 직접 만들어준 것들에 늘 새겨져 있던 표식이었다.

    “유모.”

    필리프가 움집 입구 천막을 걷어냈다. 움집의 구조가 얼마 전과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움집 전체를 빼곡하게 채우고 있던 약초 다발과 각종 약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고, 다양한 종류와 크기의 돌들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이레네가 움집 가장 안쪽 돌탑 모양으로 지어진 공간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늘 단정하게 고정되었던 백발 머리카락을 어깨 밑으로 늘어뜨린 그녀의 손에는 두꺼운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앉으시지요.”

    갑작스러운 필리프의 방문에도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은 이레네가 평평한 돌이 놓인 곳을 가리켰다. 미동하지 않은 필리프가 바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내가 너무 안일했던 모양이야.”

    “…….”

    “유모가 단지 안나의 건강을 걱정하여 황궁을 찾을 사람이 아니란 것을 충분히 눈치채고 있었으면서도.”

    들고 있던 책을 돌 위에 내려놓은 이레네가 치렁치렁하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을 한 손에 모아 잡았다. 단정하게 머리를 묶은 그녀가 필리프의 앞으로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섰다.

    “폐하.”

    “그대는 나 이외 다른 누군가의 안위를 걱정해 본 적이 없잖아. 내 말이 틀렸나?”

    웃음기를 찾아볼 수 없는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낯선 것을 대하듯 차가운 눈동자. 이레네가 처음 마주하는 필리프의 눈빛이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예전에도, 또 지금도 제가 걱정하는 분은 폐하뿐입니다.”

    망설임 없는 이레네에 답에 필리프가 헛웃음을 뱉었다.

    “시간 낭비는 하지 않겠어. 어디 있지?”

    주어가 빠진 물음을 이해하지 못할 그녀가 아니었지만, 닫힌 입술이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날카로운 침묵이 이어졌다. 나직한 웃음기가 섞인 이레네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필리프가 재촉하듯 물었다.

    “내 질문이 이해되지 않는 건가?”

    이레네가 돌 위에 얹은 책을 집어 들었다. 책의 중간 즈음을 펼친 그녀가 무덤덤한 표정으로 필리프에게 책을 넘겨주었다.

    [나의 제단에 영혼을 바친 이는 또 하나의 삶을 얻을 것이다. 순리를 거스르는 죄의 대가는 기다림이다.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한다.]

    “이게 무슨 말이지?”

    필리프에게서 다시 책을 받은 이레네가 눈꺼풀을 느리게 깜박였다.

    “어차피 말미가 정해져 있는 운명이었습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이레네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당긴 필리프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불안하게 일렁거렸다.

    이제 다시는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게 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물안개처럼 서서히 필리프의 몸을 적셨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하염없이 속삭였던 안나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왜 이유를 묻지 않았을까. 그녀가 미안해하는 이유를. 그녀의 말이 뒤늦게 가슴에 비수로 와 박히는 기분이 들었다.

    “영혼을 바친 이의 복수 자체를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복수?”

    “그자가 원했던 것은 오직 하나. 폐하의 고통이었습니다. 저는 폐하를 위해 그 고통의 크기를 줄여드린 것뿐입니다.”

    * * *

    안나가 향한 곳은 집 앞 구멍가게가 아닌 집에서 30분 이상을 걸어야 하는 대형 마트였다. 부지런히 걸어 마트 입구에 도착한 그녀가 플라스틱 바구니를 집어 들고 수산 코너를 찾았다.

    싱싱한 굴과 조개류를 담고 바로 옆 육류 코너로 이동해 한우 반 근을 담았다. 쉴 틈 없이 싱싱한 채소를 고르고 과일을 고르다 보니 바구니가 금세 묵직해졌다.

    “배송해드릴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종량제 봉투 하나 주세요.”

    평소 한 달 식비에 육박하는 금액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계산한 안나가 계산원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이며 마트를 빠져나왔다.

    얼굴에 닿는 바람이 차가웠다. 입고 있던 재킷을 단단히 여민 안나가 발걸음에 속도를 붙였다.

    밤거리는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다른 이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목적지를 향해 바삐 걸어가고 있었고, 밝은 불빛을 내는 차들이 도로변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다.

    다시 그곳에서의 밤이 떠올랐다. 눈을 감으면 풀벌레 소리와 바람 소리 이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던 그곳의 고요함이 그리웠다.

    삐삐삐삑.

    도어록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 안에 들어선 안나가 쉬지 않고 봉투 속 재료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깨끗하게 재료를 손질해 빠르게 음식을 완성했다. 자그마한 테이블 가득 음식 접시를 채운 안나가 물기 젖은 손을 닦으며 의자에 앉았다.

    막상 잘 차려진 식탁을 보니 무섭게 허기가 치밀어, 먼저 싱싱한 굴을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천천히 맛을 음미하며 굴을 삼킨 그녀가 바짝 구운 고기 한 점을 바로 입에 넣었다. 그리고는 유자 드레싱을 뿌린 샐러드를, 그리고 다시 굴을 차례로 맛보았다.

    음식을 먹을 때마다 불현듯 그의 생각이 났다. 해산물을 즐기지 않는 그의 입에 생굴 하나를 넣어주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분명 좋아하지는 않겠지만, 성의를 생각해서 뱉어내지는 않겠지? 그 잘생긴 미간을 잔뜩 찌푸리면서도 내 기분이 상하지 않게 맛있다는 말을 해 줬을 거야.

    씁쓸하게 웃은 안나가 고개를 저으며 머릿속에서 필리프의 잔상을 지워냈다. 그리고는 부지런히 젓가락을 움직여 음식 접시를 비워 냈다. 깨끗하게 비운 접시를 개수대에 넣은 안나가 부푼 배를 두드리며 침대에 앉았다.

    어쩌면 길이 있을 수도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을 실제로 경험한 것이 사실이라면, 다시 그 세계에 돌아가는 것이 허황하기만 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확인해야 할 것은 아이가 안전할 것이라는 보장뿐이었다.

    해야 할 일의 순서를 정하고 효과적으로 시간을 활용해야 한다. 그가 있는 세계에서 두 달이 넘는 시간을 보냈지만, 이 세계에서는 고작 하룻밤이 지났을 뿐이었다. 머뭇거림을 길게 가져갈 수 없었다.

    핸드폰 인터넷 검색창을 켠 안나가 먼저 근처 산부인과의 위치를 검색하고 전화번호와 주소를 캡쳐해 저장했다. 그리고 바로 메모창을 켜 그 세계에서 겪었던 일을 꼼꼼하게 기록하기 시작했다.

    “내가 할 수 있을까?”

    안나가 부푼 배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물었다. 그렇게 한동안 배를 바라보고 있던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서 창가로 향했다. 창문을 열고 별 하나 보이지 않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꼭 돌아갈게요.”

    두 손을 모으고 간절한 소원을 빌었다.

    부디 그와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이 돌아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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