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익숙하지만 어쩐지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소리가 울렸다. 반사적으로 뻗은 안나의 손끝에 딱딱한 물체가 걸렸다. 순간적으로 숨을 멈추며 손을 거뒀지만, 끈질기게 울리는 소리는 그칠 줄을 몰랐다.
귀를 틀어막을까 잠시 고민하던 안나가 눈꺼풀을 들어 올려 시끄럽게 울리는 핸드폰의 액정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니까 정말, 돌아왔다. 원래 서안나가 살던 세계로.
여보세요? 안나 씨? 내 얘기 듣고 있어?
“…….”
―아니, 내내 전화도 안 받고 어제 말없이 결근해서 얼마나 걱정했다고.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지? 응, 안나 씨? 오늘은 출근하는 거지?
하룻밤. 고작 하룻밤이었다. 그간 경험했던 그 많은 시간은, 고작 하룻밤으로 한데 뭉쳐 사라져 버렸다.
“…….”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답답함을 느낀 민 사장이 작은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아니 무슨 일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말없이 결근하면 업장에도 피해가 있잖아? 오늘은 나오는 거지? 아니, 안나 씨 요리가 정식 메뉴로 채택되기 일보 직전이잖아. 조금만 더 노력하면.
“오늘은… 출근하겠습니다.”
―그래? 응, 그래, 안나 씨. 그럼 이따 봐. 오늘은 꼭 나와야 한다? 알겠지?
침대 옆 램프 불을 켠 안나가 멍한 표정으로 핸드폰 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7시. 부지런히 출근 준비를 하고, 늦더라도 7시 40분 안에 집을 나서 지옥철에 몸을 실어야 한다.
비척비척 창가 앞으로 다가선 안나가 희끄무레한 어둠으로 가득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동안 그렇게 하늘만을 응시하던 그녀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커다란 전신 거울에 서안나의 모습이 비쳤다.
“이게 정말… 나야?”
외출복을 입고 화장도 지우지 않고 그대로 잠들었던 모양이었다. 어색하게 느껴지는 얼굴 위로 손을 올리며, 이제는 어렴풋하게 느껴지는 이곳 세상에서의 기억을 더듬었다. 늦은 시간까지 이어졌던 회식 자리를 끝까지 지켜냈고, 집으로 돌아와 그대로 잠들었다.
어쩌면 정말 모든 것이 꿈이 아니었을까? 만약 전부 지독하게도 생생하게 느껴지는 꿈이었다면.
아니, 절대 아니다. 거칠게 고개를 저은 안나가 필리프와의 마지막을 떠올렸다. 그의 숨이 규칙적으로 변하기를 기다렸다가, 그의 심장 소리가 들리는 곳에 가만히 얼굴을 묻었다. 쿵쿵 뛰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미안하다는 말을 뱉고, 또 뱉었다.
눈물로 눈앞이 흐려진 것이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고는 절대 고할 수 없었던 이별이었다. 약병을 끝까지 비워내면서 눈을 감았다. 어쩌면 그 순간 이 모든 것이 꿈이기를 바랐는지 모른다.
안나가 억지로 몸을 움직이며 출근 준비를 시작했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물로 샤워를 하고, 평소에는 잘 입지 않는 화려한 색깔의 옷을 골라 입었다. 여전히 제 것 같이 느껴지지 않는 얼굴에 진한 화장을 하고, 급히 집을 나서 어둠이 깔린 골목길 모퉁이를 돌았다.
떠나오기 전 그곳은 분명 여름이었는데, 지금 몸에 와 닿는 것은 초겨울 칼바람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걸친 얇은 재킷 사이를 시린 바람이 파고들었지만, 이상하게도 추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발은 익숙한 지하철 통로로 안나를 안내했다. 두꺼운 재킷과 점퍼를 걸친 사람들이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거나 음악을 듣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는 너무도 익숙하게 느껴졌던 광경들이 이제는 한없이 어색하기만 했다.
시끄러운 도시 속에 홀로 남겨진 느낌.
도착한 지하철에 올라타지 못한 안나가 타고 내리는 사람들에 휩쓸려 계단 밖으로 밀려났다.
“아니, 이 여자가 미쳤나. 저리 안 비켜!”
바삐 걸음을 재촉하던 한 남자의 욕설을 듣고서야 간신히 멍한 정신을 다잡을 수 있었다. 가까스로 발을 떼어 내고 기다란 줄 끝에 다가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하철이 도착하고 스크린 도어가 열렸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멍하니 지하철에서 내리고, 다시 올라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쥐고 있던 핸드폰으로 시선을 내렸다. 수십 번을 확인했지만, 변한 것은 없었다.
그래. 어제와 다르지 않을 오늘. 이대로 평소 같은 하루를 이어나가면 되겠지.
내리는 사람들에 이끌려 지하철 문밖으로 발을 내밀었다. 순간 지하철과 문밖 사이의 공간이 절벽의 끝처럼 느껴졌다. 자신도 몰래 그 아득한 공간에 발을 들이밀려는 순간, 누군가가 안나의 어깨를 강하게 낚아챘다.
* * *
벌써 세 시간째 수색이 이어지고 있었다.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고 바람처럼 자취를 감춘 안나는, 단 한 명의 목격자도 남겨두지 않았다.
“폐하. 저택을 샅샅이 조사하였지만, 안나 스완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수색 범위를 넓혀.”
“저, 폐하.”
“그리고 저택 고용인들을 철저히 조사하도록. 한 치의 거짓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목을 베어버릴 거야. 조금이라도 아는 것이 있으면 입을 여는 것이 좋을 거야.”
수색대장을 물린 필리프가 수행원을 불러들였다.
“폐하. 말씀하신 대로 일정을 조절하였습니다.”
“황녀의 움직임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안나의 실종과 황녀가 관련되어 있다는 의심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저택을 빠져나가는 일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분명 쥐새끼를 심어 놓은 거야. 분명해.”
안나가 제 발로 자신을 떠났을 가능성은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 놓았다. 사랑을 나누며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 거짓은 하나도 섞여 있지 않았다. 그 정도의 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할 머저리는 아니었다.
“폐하. 다른 일정은 전부 조절이 가능하지만, 지방 영주와의 회의에는 꼭 참석해 주셔야 합니다.”
짧게 고개를 끄덕인 필리프가 착복 시중을 들였다. 안나를 수색하는 것에 온 정신을 집중하느라 자신이 얇은 숄 하나만을 간신히 걸치고 있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했다.
“바로 황궁으로 가지. 자네는 이곳에 남아 진행 상황을 보고하도록. 조금이라도 허튼수작을 부리는 자가 있다면 바로 잡아들이라 해.”
“알겠습니다, 폐하.”
금세 평소와 같은 완벽한 군주의 모습으로 변한 필리프가 침실 문 앞 거울 앞에 모습을 비춰보았다. 그대로 문을 나서려는데, 발치에 걸리는 자그마한 약병 하나가 발걸음을 잡아 붙들었다.
“…이건.”
약병 하단에 쌀알처럼 작게 새겨진 글자를 읽은 필리프가 급하게 침실을 벗어났다. 빠르게 복도를 벗어나 저택 입구에 세워진 마차에 올라탄 그가 마부에게 목적지를 일러 주었다.
“당장 라이젠 산으로 가.”
* * *
멍했던 정신이 제대로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머리가 사납게 지끈거려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는데, 새까만 현기증이 일었다.
“안나 씨. 왜 멀쩡한 핸드 블렌더를 두고 손으로 젓고 있어? 자, 여기 받아.”
“…예? 아, 네. 감사합니다.”
안나에게 블렌더를 건넨 상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햇수로 3년째 안나와 함께 일해왔지만, 그녀가 오늘처럼 주방에서 잦은 실수를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런데 정말 어디 안 좋은 거 아냐? 몸이 안 좋으면 내가 주방장님께 말씀드릴 테니까 좀 쉬어.”
“아니에요. 정말 괜찮아요, 선배님.”
출근길 지하철역에서 마주친 안나는 말 그대로 혼이 빠져나간 사람 같았다. 열차와 승강장 틈에 발이 빠지기 직전 그녀의 어깨를 낚아채 사고를 피할 수 있었지만, 상민을 바라보는 안나에게서 고맙다는 표정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자, 그럼 소스는 내가 마무리할 테니까 안나 씨는 샐러드를 준비해.”
“네, 선배님. 감사합니다.”
싹싹하고 밝은 성격의 안나는 음식을 대하는 태도가 매우 진지했고, 음식을 만들 때면 그 누구보다 행복한 미소를 짓곤 했었다. 그랬던 안나의 얼굴에서 미소가 완벽하게 사라진 상태였다. 하룻밤 사이 그녀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한 느낌이었다.
“정말 이상하네.”
혼잣말을 중얼거린 상민이 안나가 만든 소스 통을 받아들었다. 소스 통 안에는 상민이 요청했던 간장 소스가 아닌, 타르타르 소스가 담겨 있었다.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상민이 소스 통을 그대로 개수대로 가져갔다.
기계적으로 샐러드용 채소 손질을 마친 안나가 고개를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10시. 그곳 주방이었다면 한창 황제의 점심을 준비했을 시간이었다.
그가 좋아하는 채소볶음과 숯불 향을 입힌 양고기구이를 메인으로 한 식사 상을 떠올렸다. 정갈하게 포크를 움직이는 크고 기다란 손가락, 음식을 천천히 씹어 넘기는 남자다운 목울대가 차례로 머릿속에 그려졌다.
“뭐야. 안나 씨, 울어?”
내내 안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상민이 그녀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안나의 곁으로 하나둘 사람들이 몰려들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네고 질문을 쏟아부었다. 모든 것들이 실제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이것 참, 아무래도 안 되겠네. 안나 씨. 오늘은 이만 들어가서 쉬어. 상민 씨가 안나 씨 택시 타는 것 좀 봐 주고.”
등 뒤로 바빠 죽겠는데 큰일이라는 민 사장의 푸념이 들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달리는 택시 안이었다.
주머니 속이 부르르 진동했다. 꺼내든 핸드폰 액정에 이상민 선배라는 이름이 찍혀 있었다.
[안나 씨 집에 들어가는 것까지 봐주려 했는데, 알다시피 주방이 너무 바쁘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오늘 푹 쉬고 기운 차려.]
답장을 작성하려던 안나가 그대로 핸드폰 전원을 끄고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과 화려한 간판으로 수 놓인 도시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조금씩 어둑해지는 거리에 노란 가로등이 켜지고 있었다. 어쩐지 이곳에 자신이 속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기, 기사님! 잠시만요!”
신호에 택시가 정차한 사이 안나가 다급하게 외쳤다.
“예?”
“여기서 세워 주세요!”
어느새 밖에는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 급하게 택시에서 내린 안나가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택시 안에서 봤던 약국을 찾았다.
“어서 오세요.”
“…….”
“손님. 뭐 드릴까요?”
확실하게 확인해 두어야 했다. 정말 너무나도 생생하고 가슴 아픈 꿈을 꾼 것인지.
“손님?”
만일 꿈이 아니라면,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을 경험한 것이라면. 사랑했던 그를 버리고 이 삶으로 돌아온 것이 사실이라면.
“…임신 테스트기 하나만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