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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66)화 (66/139)
  • 66화

    식사를 시작하고 한 시간이 훌쩍 지났는데도 안나의 접시는 쉽게 줄어들지 않았다. 식사 시간을 늦춰서 헤어짐의 시간을 미룰 수 있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알면서도 도저히 음식을 씹어 삼킬 수가 없었다.

    체한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져서 거듭 찻물을 들이켰다. 묵묵히 접시를 비워나가던 필리프가 힐끗 안나를 올려다보았다.

    “다 식은 것 같은데, 이것으로 먹지.”

    그가 아직 열기가 남아 있는 냄비로 손을 뻗었다.

    “아, 전 괜찮아요. 아까 간을 너무 많이 봤나 봐요.”

    “술 한잔하지 않겠어? 향이 아주 괜찮은데.”

    “전 그냥 차를 마실게요. 산딸기 향이 너무 좋네요.”

    과실주를 특히 좋아하던 그녀였는데, 며칠 전부터 의식적으로 술을 피하는 모습이었다. 단호하게 술잔을 밀어놓은 안나가 찻물을 들이키며 필리프의 시선을 피했다.

    “푹 익은 양배추가 이렇게 맛있는 줄 몰랐는데?”

    침묵이 길어지는 것을 원치 않아, 필리프가 빠르게 주제를 바꾸었다. 잘 익은 양배추는 몇 번 씹지 않아도 부드럽게 입안에서 녹아내렸다. 안나가 만든 음식은 꼭 그녀를 닮아있었다. 화려하지 않았지만, 따뜻했다.

    “오랜만에 너무 많이 먹었어.”

    필리프가 배를 두드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의 접시가 깨끗하게 비어 있었다.

    “다행이에요. 너무 평범한 음식이라 걱정했었는데.”

    “이런 음식이 훨씬 더 맛있는데? 황궁에 돌아가면 주기적으로 먹어야 하겠어.”

    “…….”

    “왜, 설마 또 해 줄 생각은 없다는 거야?”

    농담으로 물은 말이었는데 그녀는 답을 하지 않았다. 잠시 멍하니 필리프의 접시를 바라보고 있던 안나가 빈 필리프의 술잔을 채워 주었다.

    “디저트를 가져올까요? 너무 급하게 만들어서 맛은 자신할 수 없긴 한데…….”

    “앉아있어. 내가 가져오지.”

    “아니에요.”

    안나가 급히 몸을 일으켰지만, 어느새 안나의 앞으로 성큼 다가선 필리프가 그녀의 어깨를 잡아 내렸다. 멀찌감치 물러서 있던 시종들이 깜짝 놀라 필리프의 앞으로 다가왔지만, 그가 가볍게 손을 내저어 그들을 물렸다.

    오래 지나지 않아 필리프가 커다란 접시를 들고 돌아왔다. 급하게 만드느라 모양이 엉성한 크림 파이를 보며 안나가 안타까운 탄식을 뱉었다.

    “아… 파이 모양이 영…….”

    “모양이 무슨 상관이야. 맛이 좋으면 그만이지.”

    대수롭지 않게 답한 필리프가 안나의 손에 디저트 포크를 쥐여 주었다.

    “…….”

    안나가 포크를 파이 접시로 뻗으려는데, 필리프가 태연히 파이를 집은 자신의 포크를 뻗어왔다. 문득, 그의 침실을 처음 찾았을 때가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왜 웃어?”

    “그냥 예전 상황이 떠올라서요.”

    그도 같은 상황을 떠올리는 듯 미소를 지었다. 안나가 망설이지 않고 입을 벌려 포크를 입안에 넣었다.

    “많이 변한 거 알아? 그때는 오래 사양했던 것 같은데.”

    진한 웃음기가 섞인 말투였다. 열심히 파이를 씹어 삼킨 안나가 아무렇지 않게 그의 말을 받았다.

    “말씀하셨잖아요. 결국은 전부 폐하가 원하는 대로 될 거라고.”

    “그랬나?”

    능청스럽게 되물은 필리프가 다시 한번 파이를 집은 포크를 내밀었다. 길고 유려한 손가락을 잠시 바라보던 안나가 얌전히 입을 벌렸다. 그가 파이를 씹는 안나를 지켜보며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정리해주었다. 이마에 닿는 손가락이 다정하고 따뜻했다.

    많은 대화가 오갔다. 필리프는 자신이 어린 시절부터 황위에 오르기까지 있었던 일과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털어놓았다. 그가 그리는 미래에 자신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눈물 나게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나 서러운 기분에 목이 뜨겁게 조여들었다.

    여전히 마음의 확신이 서질 않았다. 이레네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필리프를 떠나는 것이 정말 옳은 일인지.

    그의 마음을 산산이 부숴 놓고 원래의 삶으로 돌아간다 한들, 제대로 된 삶을 살아낼 수 있을까? 벌어질 모든 위험성을 제쳐두고 그의 곁에 남아, 아이를 잃는 것까지 감수하는 것을 옳은 일일까?

    “폐하.”

    어차피 도돌이표처럼 되풀이되는 생각이었다. 마음을 다잡은 안나가 먼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침실 구경을 제대로 시켜주시지 않았잖아요.”

    안나의 말에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는 이내 평소의 여유로움을 되찾았다.

    “글쎄, 구경할 시간이 있을까?”

    얼굴 가까이 내민 그의 손을 맞잡은 안나의 발걸음에 조급함이 섞여들었다. 복도를 뛰듯이 걸어 침실 문 앞에 선 필리프가 짧은 숨을 토해내며 방문을 열었다.

    “안나.”

    그의 목소리로 불리는 자신의 이름이 너무도 특별하게 들렸다. 안나가 눈을 감으며 입을 열었다.

    “다시 한번 불러 주세요.”

    적어도 이 이름만큼은 온전히 내 것이니까.

    “안나.”

    필리프가 이름 전체를 뱉기 전 안나가 먼저 그의 입술 위로 제 것을 겹쳤다. 꽉 겹쳐진 몸으로 뭉근한 열기가 전해졌다. 온전히 감정에 솔직할 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가쁜 숨을 토해냈다. 맞닿은 그의 단단한 허벅지 사이에서 흥분의 증거가 드러났다.

    안나의 젖은 눈가를 쓸어내린 필리프가 안나의 뒷머리를 잡고 깊게 입을 맞추었다. 적극적으로 혀를 섞고 숨결을 교환하는 사이, 안나의 등이 침대 매트리스에 닿았다.

    “하아…….”

    그녀의 허벅지 사이에 몸을 고정하자 눌러 참고 있던 신음이 흘렀다. 두 눈이 질끈 감기는 모습에 필리프는 온몸을 관통당하는 듯한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 평정심을 잃고 쾌락에 붉어진 눈동자는 자신의 얼굴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의 얼굴 가득한 눈부신 미소에 몸이 그대로 녹아내릴 것 같았다.

    자신의 삶에 사랑은 사치라 생각했고, 어쩌면 평생 경험해 보지 않아도 괜찮다고 느꼈다. 그랬던 필리프의 메말랐던 가슴에 뜨거운 물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가쁜 호흡을 삼키면서도 안나는 필리프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완벽하게 빚어진 도자기 같은 남자. 방안을 밝히는 촛불이 조금 더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씩 눈가가 젖어 들어 눈꼬리 밑으로 눈물이 떨어지기 직전, 그의 입술이 안나의 눈가를 부드럽게 핥아주었다. 그녀의 이마에 뺨에 머물렀던 말캉한 혀가 안나의 입안 가득 밀려들어 왔다. 키스 하나만으로 두 사람의 영혼이 엉키고 뭉쳐졌다.

    “하아… 필리프… 필리프.”

    내내 붙어 있던 입술이 떨어지는 순간을 기다렸다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마음껏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필리프는 아주 소중한 것을 대하듯 안나의 몸 구석구석을 뜨거운 혀로 달래듯 애무했다.

    끈질기게 전희의 시간을 이어가던 그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안을 파고들었다. 애가 탈 정도로 느리고 부드러운 움직임이었다. 쾌감에 바르작거리는 안나의 몸을 내리누른 그가 그녀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너뿐이야. 내게는 오직 너 하나야.”

    필리프의 말에 잠시 고개를 떨구었던 안나가 턱을 올려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끓어오르는 감정을 삼키며 크게 심호흡한 그가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절정의 시간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서로의 몸을 탐했고, 쾌락을 좇아 몸을 움직였다. 땀에 젖은 안나의 등허리를 매만지는 그의 손길에서 조건 없는 애정이 느껴졌다. 생에 처음 느껴보는 충만한 감정이었다.

    사랑한다는 말이 귓가에 닿았다. 뜨거운 숨결과 진심 어린 고백에 안나의 몸이 잘게 소스라쳤다. 나도 그렇다고 답해주고 싶었지만, 입술을 아프게 깨물며 그저 고개만을 끄덕거렸다.

    야속하게 흐르는 시간을 붙잡을 수 없기에, 더 열정적으로 그의 어깨에 매달리고 그의 허리에 두 다리를 감았다. 몇 번이나 쾌감에 까무러치며, 체력을 한 자락도 남기지 않고 소진했다. 필리프의 눈꺼풀이 천천히 감기는 것을 바라보던 안나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 * *

    시린 바람이 온몸 구석구석을 찌르듯 파고드는 느낌이 들었지만, 필리프는 쉽게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뻣뻣하게 굳은 몸을 일으키기 전, 필리프가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다.

    분명히 온기가 느껴져야 하는데, 손끝을 스치는 것은 지독히도 싸늘한 냉기뿐이었다. 벌떡 몸을 일으킨 필리프가 텅 비어 있는 침대 옆자리를 내려다보았다. 불길한 예감에 순간 온몸의 피가 식는 기분이 들었다.

    침대를 박차고 일어선 필리프가 알몸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고 침실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 어느 곳에서도 그녀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았다. 혹시 하는 마음에 창문 근처를 살폈지만, 단단한 창살로 가로막힌 창문 밖을 벗어났을 리 없었다.

    필리프가 지독한 수마에 눈을 내리감기 직전, 마지막으로 흐릿한 시야 끝에 잡혔던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분명 입꼬리를 올려 웃고 있는 것 같았는데, 반대로 울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눈을 떠서 그녀의 표정을 좀 더 자세히 살피고 싶었지만, 도저히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설마.

    필리프가 거칠게 침실 문 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문 앞을 지키고 서 있던 호위병이 애써 놀란 기색을 감추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어디 있지?”

    “…예?”

    호위병 두 명이 멀뚱멀뚱 서서 잠시 시선을 주고받았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호위병들의 태도 앞에 필리프의 불안감이 점점 크기를 키웠다.

    “저, 폐하. 무슨 말씀이신지…….”

    “안나 스완. 그녀는 어디 있지.”

    소름 끼치게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었다. 황제가 끓어오르는 화를 간신히 참고 있다는 것이 느껴져 황급히 입을 열었다.

    “폐하.”

    “그녀가 귀신이 아닌 이상, 흔적도 없이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 리 없지.”

    “하지만 폐하.”

    “이제 대답해 봐. 언제 이곳을 빠져나갔지?”

    극한의 두려움을 느낀 호위병들의 어깨가 바짝 움츠러들었지만, 황제의 앞에 거짓을 고할 수는 없었다.

    “폐하. 송구하오나 저희 호위병들은 잠시도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내내 방문을 지켰지만, 방문이 열린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필리프가 말없이 호위병들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들의 표정에서 거짓을 읽어낼 수가 없다는 사실에 분통이 터졌다.

    그녀가 흔적도 없이 증발해 버렸다? 나보고 그 사실을 믿으라고?

    순식간에 침실 바로 앞 거울이 산산이 조각났다. 날카롭게 잘린 유리의 단면이 필리프의 손가락을 찢고, 찢긴 상처를 따라 붉은 선혈이 새어 나왔다.

    “…폐하…….”

    “수색대를 불러모아. 지금 당장!!!”

    절규와도 같은 필리프의 고함이 저택 전체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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