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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65)화 (65/139)
  • 65화

    자, 다음 발표는 서안나. 자, 앞으로 나와서 장래 희망에 관해 이야기해 볼까?

    저는… 저는…….

    희망찬 꿈들로 공책 한 바닥을 빼곡하게 채웠지만, 단 한 마디도 입 밖으로 꺼내 놓을 수가 없었다.

    안나야. 그럼 선생님이랑 같이 읽어 볼까?

    선생님의 도움을 받은 안나는 간신히 써온 글을 소리 내어 읊기 시작했다.

    [일곱 살 생일에 제가 직접 김밥을 말아본 적이 있었어요. 그냥 냉장고에 있는 반찬을 꺼내서 만들었는데, 엄마 아빠가 정말 맛있다고 칭찬해주셨어요. 저는 그때부터 요리사가 되고 싶었어요. 제가 만든 요리를 맛있게 먹어줄 사람들을 생각하면 너무너무 행복하니까요.]

    어? 너 엄마 없잖아.

    맞아요, 선생님! 쟤네 엄마 도망갔대요.

    그리고 쟤네 아빠는 맨날 술 마시고 동네 돌아다녀요. 우리 엄마가 쟤랑 놀지 말랬어요.

    꽉 채운 종이의 절반도 읽지 못한 안나는 그대로 울음을 터뜨렸고, 선생님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친구들을 점잖게 꾸짖었다.

    자, 모두 조용히 하세요. 친구한테 그런 소리 하면 안 되지? 친구끼리는 모두 사이좋게 지내는 거야. 알겠니?

    그때부터였다.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있어도 안나는 절대 소리 내어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야.”

    어느새 안나의 곁으로 다가온 필리프가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에 손가락을 넣었다. 가만히 앉아 그의 손가락의 움직임을 느끼던 안나가 고개를 들어 필리프와 눈을 마주했다.

    “폐하께 음식을 만들어 드리고 싶어요.”

    “음식?”

    거창한 요리사가 되었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실제로 자신이 만든 음식을 손님들이 맛있게 먹어 주었을 때 처음으로 살아있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필리프를 만나 그가 자신의 요리 실력을 알아봐 주었을 때, 비로소 충만한 행복감을 느꼈다.

    “이제 힘들게 일하지 않아도 좋다고 한 것 같은데.”

    “제가 만든 음식 좋아하셨잖아요. 만들어 드리고 싶어요.”

    원하는 것을 언제고, 어느 때고 말해도 괜찮은 상대. 늘 자신의 편이 되어주는 상대가 안나의 머리카락 사이에서 손가락을 빼내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리하지 않는 선이라면.”

    “식사 한 끼 만들어 드리는데 무리라니요.”

    밝은 표정의 안나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소매를 걷는데, 필리프가 바로 침실을 나서려는 안나를 돌려세웠다.

    “지금 주방에 가서 사람들의 시선을 독차지하고 싶은 거야?”

    “아…….”

    제국 황제와 황궁 주방 시종의 러브스토리.

    필리프는 안나와의 관계를 애써 숨기려 하지 않았고, 귀족 사교계를 중심으로 퍼지기 시작한 소문이 황궁 전체에 퍼지는 것은 순간이었다.

    안나는 특히 주방 시종들 사이에서 큰 화젯거리로 떠올랐다. 처음에는 시샘 어린 질투의 시선으로 안나를 바라봤던 시종들이었지만, 이제는 자신들도 신데렐라 스토리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마음에 품게 되었다.

    “아무래도 좀 그렇겠네요.”

    안나가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자 필리프가 오늘 일정이 적힌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내일 있을 국무 회의에 대비해 서류를 검토해야 했지만, 밤잠을 미룬다면 충분히 해낼 만한 업무량이었다. 그가 의자에 걸쳐둔 재킷을 손에 쥐었다.

    “저녁 시간은 괜찮을 것 같은데, 밖으로 나갈까?”

    “어디를요?”

    “가보면 알아. 요리는 그곳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으니까.”

    가볍게 안나의 손목을 잡은 필리프가 그녀의 어깨에 숄을 걸쳐 주었다.

    “폐하.”

    “마차를 준비해. 마릴 저택에 다녀오겠네.”

    “…아, 예. 알겠습니다, 폐하.”

    영문을 모르고 필리프를 따라 황궁 밖으로 나온 안나가 예전 그와 함께 타 본 적이 있는 허름한 마차에 몸을 실었다.

    “폐하. 저택 관리인에게 말을 전해 놓겠습니다.”

    “그래.”

    수행원과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은 필리프가 마차에 올랐다. 말에 올라탄 마부가 우렁찬 기합 소리를 내며 고삐를 잡아당겼다.

    안나가 마차의 창 너머 저물어져 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붙잡고 싶었던 시간은 덧없이 흘러가고, 결국 그와의 안녕을 전해야만 하는 밤이 찾아왔다.

    “바쁘신데 괜히 저 때문에 곤란하신 거 아니에요?”

    “아니. 오히려 나에게 더 필요한 시간이야. 요즘 내내 긴장하고 있어서 좀 쉬고 싶은 생각이 들었거든.”

    호화로운 대저택 몇 채를 차례로 지나쳐 구불구불한 비탈길에 접어들었다. 마차의 바퀴는 신나게 굴러갔고, 그와 가벼운 대화 몇 마디를 주고받는 사이 목적지가 가까워졌다.

    “자.”

    먼저 마차에서 내린 필리프가 안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리니 크기가 그리 크지 않은 저택 입구가 보였다. 입구 철책 근처에 서 있던 문지기가 저택 문을 열고 필리프를 향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이쪽으로.”

    안나를 에스코트한 필리프가 저택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우리 어머니가 잠시 지내시던 곳이었어.”

    주변을 둘러보는 안나를 돌아보며 필리프가 지나가는 듯한 말투를 뱉었다.

    “네?”

    “어머니께도 잠시 숨 쉴 만한 공간이 필요했던 거였겠지.”

    필리프가 자신의 어머니가 남몰래 사용하고 있던 저택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어머니의 죽음 이후였다. 어머니가 사적으로 소유하고 있던 재산은 모두 필리프에게 승계되었고, 필리프는 광산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저택을 허물지 않고 그대로 남겨두었다.

    복도를 걷던 필리프가 초상화 앞에서 잠시 발을 멈추었다. 반듯한 그의 미간에 주름이 잡히는 것이 보였다.

    “주방은 이쪽이야.”

    빠르게 씁쓸한 표정을 갈무리한 그가 복도 우측을 가리켰다. 하얀 커튼으로 가려져 있던 공간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오랫동안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곳이라도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급하게 치워 놓으라 알리긴 했는데, 원하는 재료가 있으면 말해 봐.”

    “엄청 깨끗한데요? 도구도 엄청 많아요.”

    빠르게 사용할 도구를 꺼낸 안나가 주방 테이블에 놓인 식자재를 살폈다. 필리프의 명에 의해 급히 준비된 재료였지만, 한 끼 식사를 만들기에 큰 부족함은 없었다.

    “그럼 나가서 쉬고 계세요. 제가 다 만들면 말씀드릴게요.”

    머릿속으로 만들 음식을 정한 안나가 사용할 채소를 고르는데, 얼굴에 내려앉는 진득한 시선이 느껴졌다. 느릿하게 고개를 드니, 의자를 끌어온 그가 테이블에 턱을 괴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가 계시면…….”

    “왜, 나 신경 쓸 필요 없어.”

    신경이 쓰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곤욕스러운 표정의 안나와는 반대로 필리프는 태연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본격적으로 관찰자의 태도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냥 밖에 나가 계셨으면 좋겠는데요.”

    “어차피 혼자 하려면 힘들지 않겠어? 내가 좀 도와주지.”

    진짜 요리를 도우려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모습에 화들짝 놀란 안나가 손사래를 쳤다. 아무리 그래도 제국의 황제를 주방보조로 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 아닙니다. 그럼 그냥 거기 앉아 계세요.”

    “그럼 그럴까?”

    태연한 모습을 보니 어쩐지 조금 속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그에게 들리지 않게 작은 한숨을 내쉰 안나가 빠르게 채소를 씻고 손질을 시작했다.

    “신기한데? 칼을 다루는 솜씨를 보니, 검술을 제대로 익혀도 좋을 것 같아.”

    테이블에 턱을 괴고 앉은 그가 안나의 행동 하나하나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어색한 웃음으로 답을 대신한 안나가 주방 한가운데 있는 벽난로로 향했다. 빠르게 안나의 곁에 다가온 필리프가 안나의 손에서 부지깽이를 빼앗아 들었다.

    “이쪽은 내가 더 전문일걸?”

    그가 능숙하게 벽난로의 불씨를 살리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불씨가 활활 타올랐다. 안나가 벽난로 갈고리에 커다란 냄비 하나를 매달았다.

    “갑작스럽게 준비하는 거라, 대단한 음식을 해 드리는 건 무리일 것 같아요. 그냥 따뜻한 음식을 해 드릴게요.”

    냄비 안에 손질한 양배추와 양파, 버섯, 훈제 고기를 넉넉히 넣고 내용물이 잠기게 물을 부은 안나가 월계수 잎 몇 장을 넣은 뒤 냄비 뚜껑을 닫았다.

    “오래 끓일수록 맛있는 음식이라 좀 기다려야 하는데…….”

    사용한 주방 조리대를 정리하고 사용할 그릇을 꺼내 놓은 안나가 등을 돌렸다. 그녀의 등 바로 뒤에 서 있던 필리프가 눈을 접어 웃으며 목소리 톤을 낮추었다.

    “그러니까, 음식이 완성되기까지 시간이 충분히 남았다는 소리지?”

    “아… 오래 끓일수록 부드럽고 국물이 진해지니까…….”

    그가 시선을 내리는 안나의 허리를 잡아 가슴에 잡아 가두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에 가벼운 키스가 내려앉고, 곧 그녀의 얼굴 전체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온종일 보고 있을 수도 있겠어.”

    “…네? 어떤 것을요?”

    “네가 요리하는 모습.”

    채소를 다듬고, 재료를 손질하는 안나의 얼굴에는 내내 포근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진심으로 행복한 표정을 짓는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말인데.”

    안나의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어 손을 얽은 필리프가 안나의 손바닥을 부드럽게 쓸며 말을 이었다.

    “네가 정말 좋아하는 일이라면 따로 공간을 마련해 주려 해. 원하는 대로 마음껏 음식을 만들어도 좋아.”

    안나를 황후의 자리에 앉히기까지 많은 난관이 예상되지만, 그녀를 배필로 삼을 것이라는 필리프의 다짐은 굳건했다.

    “오직 나를 위한 음식을 만들어 주었으면 하는데. 너무 욕심인가?”

    기뻐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고개를 푹 숙인 안나는 아무런 말을 뱉지 않았다. 필리프가 허리를 숙여 안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물론 본격적으로 요리를 공부하는 것도 좋아. 원한다면 제국의 유명 요리사를 전부 불러 줄 테니까.”

    안나가 고개를 숙인 채로 팔을 뻗었다. 필리프의 어깨를 감은 그녀의 손에 강한 힘이 실려 있었다.

    “…죄송해요.”

    한참이나 말없이 필리프의 품에 안겨 있던 안나가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짰다.

    “뭐가.”

    “그냥… 전부요.”

    필리프가 그런 그녀의 머리와 등허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녀가 필사적으로 울음을 참는 것이 느껴졌다. 무엇 때문에 그녀가 미안하다고 말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당장은 그녀에게 다그쳐 묻고 싶지 않았다.

    “저 저택을 좀 구경하고 싶어요.”

    꾸역꾸역 울음을 삼켜낸 안나가 그의 어깨에서 손을 풀었다.

    “침실부터?”

    필리프의 목소리에서 짓궂은 웃음기가 묻어났다. 어이가 없어서 그를 따라 웃은 안나가 필리프의 등을 밀었다.

    “어디든 좋아요. 자, 어서 가요.”

    그와 함께 커튼 사이를 빠져나와 복도를 걷던 안나가 발을 멈추며 뒤를 바라보았다.

    “아, 저 음식만 잠깐 살펴보고 갈 테니까 잠깐만 기다리세요.”

    함께 가자며 뻗어오는 필리프의 손을 가볍게 뿌리치며 종종걸음으로 주방을 향해 걸었다. 벽난로 앞에 선 안나가 안간힘을 쓰며 참고 있었던 눈물을 쏟아냈다. 화드득 소리를 내며 타들어 가는 벽난로 속 장작이, 간신히 안나의 울음소리를 감춰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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