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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64)화 (64/139)
  • 64화

    “왈츠요? 아니, 왈츠라면… 지금 혹시 춤 말씀하시는 거예요?”

    안나가 화들짝 놀라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후다닥 반응하는 모습이 재미있어, 그녀를 조금 놀려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필리프가 웃음이 피어오르려는 입매를 단속하며 입을 열었다.

    “그래, 왈츠. 왈츠가 춤 이외에 다른 뜻이 있었나? 아니면 혹시 왈츠가 뭔지 모르는 거야?”

    안나가 당황스러움에 촉촉하게 젖은 눈망울로 필리프를 응시했다. 어딘가 조금 억울해 보이는 발그스름한 눈가가 그저 귀엽게만 느껴졌다.

    “아, 아뇨. 당연히 저도 알긴 알죠. 그런데 갑자기 왜 춤을…….”

    베르나가 황궁을 떠난 다음 날 오후, 필리프는 시종을 시켜 안나에게 왈츠 드레스 한 벌을 가져다주었다. 크림색 망사와 거즈로 드레스 곳곳이 장식되어 있고 옷깃이 파인 데다 소매가 짧은, 화려한 디자인의 드레스였다.

    멍한 표정으로 드레스를 바라보는 안나를 바라보며 필리프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함께 왈츠를 추기 위해 준비한 옷이라는 설명을 짧게 덧붙였다.

    “너와 춤을 추고 싶은 것에, 꼭 이유가 필요해?”

    “아니, 그게 아니라요. 너무 갑작스러워서요. 왈츠라니.”

    당황한 안나의 표정을 본채 만 채, 필리프가 자신이 입을 연미복을 꺼내 보였다. 검은 연미복에 흰 타이, 남색 베스트. 그 옷을 입은 필리프의 모습이 얼마나 근사할지 상상되어 잠시 눈을 감았던 안나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니,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갑작스러워서… 대체 언제, 아니 어디서 춤을 추시겠다는 소리세요?”

    춤이라곤 노래방에서 덩실덩실 몸을 흔들어 댄 것이 평생의 전부라고 할 정도인 안나였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왈츠를 추는 장면을 본 기억은 있지만, 자신이 그 춤을 추게 되리라고 상상해 본 적은 없었다.

    “아름다운 아가씨께서 갑자기 왜 이렇게 흥분하셨을까?”

    빙긋 미소지은 필리프가 안나의 허리를 휘어 감았다. 능글능글한 멘트를 뱉으면서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이 존경스러울 지경이었다.

    “아뇨, 저는 흥분한 게 아니라요.”

    “오늘은 단둘이 자축하는 자리를 가지고 싶었을 뿐이야.”

    안나의 손에 들려 있던 드레스를 부드럽게 낚아챈 필리프가 그녀의 손에 제 손을 얽어 잡았다.

    “어쩌면 오늘이 우리가 살면서 가장 안심할 수 있는 날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아무렇지 않게 지나갈 수는 없었어.”

    늘 자신의 자리를 호시탐탐 노려왔던 베르나의 악의 화살이 방향을 바꿔 안나를 향하게 되진 않을까, 베르나가 제국을 완전히 떠난 것을 확인하기까지 내내 가슴을 졸여왔던 필리프였다.

    “술 한 잔으로 오늘 같은 날을 자축하기에는 좀 아쉬울 것 같지 않아?”

    “아, 저… 그게.”

    “혹시 춤이 익숙하지 않아 걱정하는 것이라면, 그럴 것 없어.”

    “네?”

    잡고 있던 안나의 손을 놓은 필리프가 침실 한가운데에 있는 테이블을 번쩍 들어 올렸다.

    “아니, 왜 그걸 혼자!”

    필리프에게로 달려간 안나가 손을 보태려 했지만, 그는 오히려 방해된다는 표정으로 안나를 물러서게 했다.

    “자, 이 정도 공간이면 충분할 것 같은데.”

    “네?”

    “혹시 네가 미숙하게 춤을 추더라도, 그 모습을 보게 될 사람은 나뿐이라는 얘기야.”

    눈꼬리를 접어 웃은 필리프가 한 손으로는 안나의 허리를, 다른 손으로는 안나의 손을 감싸 잡았다.

    “내가 리드할 테니까, 그냥 따라오기만 하면 돼. 알겠지?”

    믿음직스러운 그의 말에 홀린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안나의 손을 놔준 그가 다시 드레스를 그녀의 손에 쥐여 주며 말을 이었다.

    “삼십 분 정도면 충분하겠지? 착복 시종을 불러 주지.”

    “아, 아니에요. 제가 혼자 입을 수 있어요.”

    “그래, 그럼. 잠시 후에 뵙도록 하죠.”

    쓰지도 않은 모자를 벗는 시늉을 하며 고개를 까딱 숙인 필리프가 연미복을 든 채 침실을 나섰다.

    마음의 혼란이 가라앉지 않아 서 있는 자세 그대로 가만히 숨을 내뱉은 안나가 손에 쥐고 있던 드레스를 들고 옷방으로 향했다. 보통 입을 옷 전부를 옷방에 보관하지 않은 필리프는 비어 있는 공간 하나를 통째로 안나에게 사용하라고 말하며 그녀의 몸에 맞는 다양한 드레스를 준비해 주었다.

    이 옷을 딱 한 번씩 입어 볼 시간만이라도 주어졌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옷걸이에 걸린 드레스를 손바닥으로 훑으며 생각에 잠겨 있던 안나가 고개를 흔들며 우울한 감상을 떨쳐냈다.

    그래, 지금은 오직 필리프와의 시간에만 온 정신을 기울여야 해. 정신 차려, 서안나.

    안나가 빠르게 입고 있던 옷을 벗고 그가 준비해 준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드레스는 맞춘 것처럼 안나의 몸에 꼭 들어맞았다. 치맛단을 꼼꼼히 점검한 그녀가 아무렇게나 풀어헤쳤던 머리카락을 한데 모아 깔끔하게 묶고 입술 위에 양홍 염료를 발라 생기를 더했다.

    “아직 시간이 남았나? 화장이라도 조금 해 볼까? 화장품이 이것저것 많았던 것 같은데.”

    안나가 필리프가 선물해 준 칠기 함으로 손을 뻗으려는 순간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거울 속 제 모습을 확인한 안나가 방문을 돌아보며 외쳤다.

    “아, 들어오세요.”

    후다닥 방문 앞으로 향해 필리프가 들어오길 기다리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방문이 열리질 않았다. 그리고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뭐지? 직접 열어 달라는 소리인가?

    고개를 갸우뚱한 안나가 문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헉!”

    그야말로 헉 소리가 절로 나오는 비주얼의 남자가 문 앞에 서서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맵시 있는 연회복을 입은 필리프는 평소와 달리 매끄러운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모아 묶은 모습이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네? 네? 아, 네네.”

    어버버 거리며 팔을 방 안으로 쭉 뻗은 안나가 가빠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근사한 그의 외모에 이제 어느 정도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저 자신의 큰 오산이었을 뿐이었다.

    가만, 이제 뭘 해야 하지? 아! 구두를 안 신었잖아. 빨리 갈아신고 와야겠다.

    너무 급하게 준비하느라 마지막에 구두로 갈아신는 것을 깜빡하고 말았다. 뒤늦게 슬리퍼를 신은 제 발을 내려다본 안나가 필리프 쪽으로 몸을 돌렸다.

    “저…….”

    “레이디, 저와 한 곡 추시겠습니까.”

    살짝 무릎을 굽힌 필리프가 안나의 얼굴 바로 아래 즈음으로 오른 손바닥을 내밀었다. 차마 이런 상황에서 분위기를 깨고 신발을 갈아신고 오겠다고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긴장감에 차오른 침을 모아 삼킨 안나가 필리프의 손바닥 위에 손을 올렸다.

    “으, 음악은.”

    설마 무반주 댄스인가요? 필리프의 품에 안긴 안나가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뭐가 그렇게 신나고 재미있는지 그의 입꼬리가 최대치로 올라간 것이 보였다.

    “음악이 있으면 더 긴장할 것 같아서. 자, 내가 움직이는 대로 천천히 따라오면 돼.”

    하긴, 왈츠 음악이 얼마나 빠른데, 그 음악에 맞춰서 내 몸이 빠릿빠릿하게 움직여 줄 리가 없을 거야. 안나가 수긍하며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필리프가 하체에 힘을 실었다.

    안나가 예상하지 못한 움직임에 터지려는 비명을 꾹꾹 눌러 삼키며 그의 발을 밟지 않는 것에만 온 정신을 집중하며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왈츠를 출 때는 파트너의 눈을 바라봐야지.”

    필리프가 바닥을 향해 있는 안나의 시선을 끌어올렸다. 낮고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네가 내 발을 밟는다고 해도 내가 아프다고 엄살떨 일은 없을 테니까, 걱정할 것 없어.”

    필리프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안나의 허리를 바짝 당겨 안았다. 분명 그의 연미복과 자신의 드레스로 막혀 있는데, 이상하게도 천을 뚫고 나온 열기가 맞닿는 기분이었다. 필리프의 입술이 발그스름해진 안나의 귓바퀴를 스치듯 훑었다.

    자신의 어깨에 내려앉은 안나의 작은 손에 꾹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낀 필리프가 입가를 비집고 흐르는 웃음을 삼켰다.

    “믿을 수 있겠지?”

    안나가 필리프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그가 느리지만 정확한 동작으로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분명 고요하고 적막한 방안을 가득 채우는 것은 노련한 그의 발소리와 자신의 어설픈 발소리뿐인데, 어디선가 격정적인 왈츠곡이 울려 퍼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몸이 틈 없이 맞닿으면서 평소보다 조금 빨라진 그의 심장 박동이 안나의 몸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속도를 맞춰 뛰고 있는 심장 박동 때문인지, 아니면 정신없이 몸을 움직이고 있기 때문인지 온몸에서 뜨거운 열기가 피어올랐다.

    필리프의 발을 밟기를 여러 차례, 조금씩 왈츠의 박자감이 익숙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저도 모르게 자신감을 찾은 안나의 얼굴에 피어오르는 미소를 읽은 필리프가 갑자기 빙그르르 턴을 돌았다.

    “으앗!”

    과격한 동작에 놀란 안나의 몸이 휘청거리자 필리프가 그녀의 어깨와 허리를 단단하게 받쳐 안으며 더 상체를 낮추게 했다. 가까이 다가온 입술이 가볍게 맞물렸다가 떨어져 나갔다.

    “마무리가 제법 근사한데?”

    활자로 휜 안나의 상체를 일으켜 세운 그가 다시 신사처럼 고개를 숙이며 왈츠의 끝을 알렸다. 왈츠가 대체 어떤 박자인지 조금 감을 잡기가 무섭게 끝나버린 것에 조금 아쉬움이 들었다. 안나의 아쉬움을 읽은 것인지, 필리프가 그녀의 등허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한 번에 너무 오래 춤을 추면 힘들어서 안 돼. 가뜩이나 요즘 체력이 약해진 것 같아 걱정인데.”

    “아, 저는 그런 생각을 한 게 아니고요.”

    “아무래도 몸이 완전한 상태가 아니니 술은 좋지 않을 것 같아서 간단한 다과를 내오라고 했는데 괜찮아?”

    “아, 네. 전 좋아요.”

    에스코트하듯 안나의 허리를 받쳐 의자에 앉힌 필리프가 종 줄을 잡아당겼다. 다과를 준비하라고 미리 일러둔 것인지 방에 들어온 수행원의 손에 은쟁반이 들려 있었다.

    “자, 힘들었을 텐데 차를 한 잔 들어.”

    찻잔에 직접 차를 따라 안나의 손에 들려준 필리프가 열꽃이 피어오른 듯 벌게진 안나의 얼굴을 감상했다. 처음 춰보는 춤에 기진맥진한 것인지 그녀의 입가에서 여전히 거친 숨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거 먹고, 그다음엔 뭘 해요?”

    찻잔을 반 잔 정도 비운 안나가 필리프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기대감이 가득 섞인 동그란 눈망울. 여기서 더 장난을 친다면 잔뜩 뾰로통해진 얼굴을 볼 수 있을 텐데.

    낮게 웃은 필리프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 오늘만큼은 그대에게 점잖은 신사가 되어주지.

    “레이디. 괜찮으시다면 한 번 더 춤을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살짝 고개를 숙인 그녀가 필리프가 내민 손을 기꺼이 맞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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