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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63)화 (63/139)
  • 63화

    마주하고 앉은 이레네와 안나 사이에 긴 침묵이 흘렀다. 이레네는 안나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며 황제에게 잠시 자리를 피해줄 것을 청했지만, 필리프는 이레네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참 많이 변하셨습니다.”

    이레네가 안나에게서 시선을 떼어 내지 않으며 말했다. 분명 이레네의 시선은 자신을 향해있지 않았지만, 필리프가 바로 그녀의 말을 받았다.

    “그런가.”

    필리프는 내내 안나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이레네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새파랗게 질려버렸던 안나의 얼굴이, 다행히 조금씩 원래의 빛을 회복하고 있었다.

    이레네는 쉽게 입을 열지도, 그렇다고 안나에게서 시선을 떼어내지도 않고 있었다. 답답함을 느낀 필리프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대가 안나에게 전할 말이 무엇이지?”

    안나와 이레네가 얼굴을 마주했던 것은 단 한 번, 다친 안나의 다리가 염려스러워 이레네에게 상처에 좋은 약초를 처방받았을 때였다. 필리프는 당시 안나를 내려다보던 이레네의 표정이 그리 밝지 않았던 것을 기억해냈다.

    “이렇게 계속 시간을 보낼 생각인가.”

    조급한 필리프의 물음에 이레네가 안나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어 내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불안한 안나의 눈동자가 황급히 이레네의 움직임을 좇았다.

    “저를 믿으십니까.”

    “뭐?”

    “말씀 그대로입니다. 폐하께서 저라는 사람을 신뢰하는지 여쭈었습니다.”

    필리프가 헛웃음을 뱉었다. 부모님에게조차 제대로 의지할 수 없었던 황태자 시절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온전히 이레네의 도움이 있어서였다.

    “당연한 이야기 아닌가.”

    “그럼 저를 믿고 잠시만 시간을 주십시오.”

    “유모.”

    필리프가 입을 열려는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안나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전 괜찮습니다. 유모님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허락해 주십시오.”

    필리프가 안나와 이레네를 단둘이 남겨두지 않은 것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이레네와 마주한 순간 죽은 꽃처럼 파스스 생기를 잃었던 안나의 눈동자를 정면으로 마주했기 때문이었다.

    “저도 마침 여쭐 것이 있었습니다. 약초에 관한 것인데, 잘 알고 계실 것 같아서요.”

    안나가 여전히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필리프의 손등을 부드럽게 쓸며 그를 달래듯 말했다.

    “어차피 제 몸 상태 때문에 더 여쭙고 싶은 것도 있었습니다. 대화를 짧게 마무리할 테니 시간을 주세요.”

    “그럼 나는 이곳에 있도록 하지.”

    필리프가 응접실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인 이레네가 다시 의자에 앉으며 안나를 올려다보았다. 이레네의 맞은편 의자에 앉은 안나가 불안하게 뛰는 심장을 잠재우며 입을 열었다.

    “말씀하십시오.”

    이레네의 시선이 안나의 발목을 향했다. 이레네에게 받은 약병을 숨긴 곳이었다.

    “손목을 내밀어 보십시오.”

    “…손목이요?”

    이레네가 지나가듯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다른 사람들이 사실을 눈치챌 수 없도록 주문을 걸어 놓았습니다. 효력이 유효한지 확인해야 합니다.”

    아이에 관한 이야기다. 테이블 위로 천천히 팔을 뻗은 안나가 이레네의 얼굴 앞에 손목을 내밀었다.

    안나의 손목 위에 손끝을 댄 이레네가 두 눈을 내리감았다. 작은 미동 하나 하지 않은 이레네는 가만히 얕은 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모습이 마치 그대로 굳어버린 얼음조각처럼 느껴졌다.

    “아슬아슬했습니다.”

    “…….”

    “그분이 알게 되면 곤란해질 테니, 다시 한번 주문을 걸어드리지요.”

    이레네의 말이 끝나자마자 방안에 캄캄한 어둠이 찾아 들었다. 바로 고개를 돌린 안나가 필리프가 있는 쪽을 돌아보았지만, 사방은 무엇 하나 제대로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다.

    “쉿.”

    안나가 입을 벌리려는 순간 이레네의 손가락이 안나의 입술 위에 닿았다. 입술에 닿은 손가락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녀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주문 같은 것이었는데, 지난번 바다에서 그녀에게 구조되었을 때 읊었던 주문과는 다른 것이었다. 흐릿해지려는 정신을 다잡은 안나가 이레네의 목소리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알아내려 하지 마십시오.”

    안나의 입술에 놓여 있던 이레네의 손가락이 안나의 어깨를 스치고 그녀의 등 뒤를 향했다.

    “안 돼!”

    놀란 안나가 바로 몸을 피했지만, 이레네의 손은 손쉽게 안나가 등 뒤에 감추고 있던 꾸러미를 낚아챘다.

    “돌아오려 하지도 말고, 시간을 미루려 애쓰지도 마십시오.”

    “…돌려주십시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

    “당신은 약속한 대로 행동하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 모두 괜찮아질 것입니다.”

    이레네가 꾸러미 속 묵직한 종이 더미를 공중에 들어 올렸다. 이레네가 뱉었던 주문, 지금 자신이 있는 황궁의 정확한 위치와 대략적인 시대상, 만났던 인물 모두의 인상착의와 성격 그리고 자신에게 벌어졌던 믿을 수 없는 모든 일을 정확하게 적어 보관한 것이었다.

    미약하지만, 가능성을 열어 두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에게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싶었다.

    “헛된 일에 시간을 쏟지 말고, 당장은 남은 시간을 소중히 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레네가 들고 있던 종이 더미가 모두 가루가 되어 공중에 흩날렸다.

    “다시 이 불청객의 방해를 받고 싶지 않으시다면 말입니다.”

    파박!

    눈앞에 번갯불 같은 섬광이 지나가면서, 어두웠던 공간이 한순간에 밝아졌다. 눈앞에 앉은 이레네는 여전히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 기우였습니다.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군요.”

    몸을 일으킨 이레네가 필리프가 앉은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무게감이 느껴지는 발걸음이 빨랐다. 이레네의 코앞으로 다가온 필리프가 먼저 안나의 안색을 살폈다.

    “무슨 말이지?”

    “폐하께서 신뢰하는 분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제가 있는 곳을 이분께 노출시키지 않으셨을 테니까요.”

    “그런데.”

    “좋지 않은 기운이 느껴졌던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이레네가 고개를 돌려 안나를 바라보았다. 이레네의 입가에 자연스러운 미소가 걸려있었다.

    “건강을 살피고자 했던 것뿐입니다. 다행히, 건강에는 아무 이상이 없는 것 같군요. 기운이 좀 쇠약해진 것 같긴 하나, 운동량이 늘어나면 곧 평소의 모습을 되찾을 것입니다.”

    내내 긴장하는 모습을 숨기지 못하던 필리프가 순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폐하.”

    용건을 마친 이레네가 내내 등에 메고 있던 보따리 속 약초 다발을 필리프의 앞에 내밀었다.

    “다시 뵐 때까지 건강히 지내십시오, 폐하.”

    이레네는 방을 나가기 직전 고개를 돌려 안나와 눈을 맞추었다. 소름 끼칠 만큼 차가운 경고의 눈빛이 안나의 숨통을 조여왔다.

    * * *

    안나의 체온이 평소보다 높다는 사실을 깨달은 필리프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레네가 황궁을 떠나고 미뤄 두었던 업무를 처리하느라 고작 두 시간 자리를 비운 사이, 안나의 안색이 눈에 띄게 창백해 있었다.

    “열이 좀 있는데.”

    작게 고개를 저은 안나가 힘이 들어가지 않는 눈꺼풀에 애써 힘을 주었다.

    “아니에요. 조금 전 주치의가 다녀갔는데, 아무 이상이 없다고 이야기했어요. 잠시 졸다 일어나서 그런 것 같아요.”

    침대에 걸터앉은 필리프가 안나의 이마에 손등을 얹었다. 그녀의 건강에 전혀 무리가 없다는 주치의의 보고를 들은 이후였지만, 손등에 닿은 이마가 무서울 정도로 화끈거려 걱정이 사라지지 않았다.

    “뭐라도 좀 먹어 보겠어? 아니면 마실 것이라도?”

    안나의 어깨를 받쳐 든 필리프가 그녀의 몸을 반쯤 일으켜 세웠다.

    “마셔 봐.”

    안나의 등을 받친 필리프가 안나의 입술 위로 반쯤 식은 찻잔을 기울이자, 달콤한 산딸기 향이 안나의 콧속을 파고들었다. 안나가 입술을 벌리고 미지근한 액체를 삼켰다. 그녀가 찻잔을 모두 비우는 것을 확인한 필리프가 안나의 옆에 몸을 뉘었다.

    “산책하고 싶어요.”

    “산책?”

    “네. 너무 오래 방에만 있었더니 조금 답답해서요.”

    “지금은 시간이 너무 늦었으니, 내일 함께 하는 것으로 하지.”

    “잠시면 돼요. 함께 가 주세요.”

    모든 일에 좀처럼 고집을 부리지 않는 안나가 드물게 고집을 부렸다.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인 필리프가 바로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럼 중앙 정원으로 가지. 지금 시간에 황궁 밖으로 나가는 건 아무래도 좀 무리니까.”

    “네. 좋아요.”

    그녀의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번졌다. 마른 몸을 끌어안자, 그녀가 습관처럼 목에 손을 감아왔다. 맞춘 듯 품에 들어차는 몸에 여전히 열기가 남아 있었다.

    수행원 몇을 정원 밖에 대기시킨 필리프가 안나의 속도에 맞춰 걸음을 늦춰주었다. 고요한 여름밤 정원을 채우는 것은 풀벌레 울음소리뿐이었다.

    안나가 커다란 정원 창가 앞에서 걸음을 멈춰 섰다. 열어놓은 창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선선한 바람을 깊게 들이킨 그녀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이제 여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요. 바람이 무겁지 않게 느껴져서 기분이 좋아요.”

    “그래도 밤바람은 조심해야 해.”

    필리프가 안나의 어깨에 걸쳐진 숄을 단단히 여미어 주었다.

    “폐하께서 만일 과거의 한 시점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으세요?”

    안나가 밝은 표정으로 필리프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창밖을 짧게 내려다본 필리프가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지금까지는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너를 만나고 생각이 바뀌었어.”

    고개를 돌린 필리프가 안나와 눈을 맞추었다. 인정하기까지 주저함이 있었지만, 한 번 인정한 마음은 매일 걷잡을 수 없이 그 크기를 키웠다. 더 빨리 인정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흘려보냈던 시간이 너무나도 아까웠고, 선택을 늦춘 자신이 한없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조금 더 일찍 너를 만날 방법을 찾겠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확신에 차 있는 목소리와 눈빛이었다. 뜨겁게 눈가가 달아올라, 안나가 황급히 고개를 떨구었다.

    “넌. 언제로 돌아가고 싶은데.”

    쉽게 답을 하지 못하고 주저하던 안나가 느릿하게 입술을 떼어 냈다.

    “폐하를 처음 만났던 순간이요.”

    원하던 대답을 들은 필리프의 눈가가 부드럽게 휘었다.

    “그때로 돌아가면… 좀 더 현명하게 행동할 수 있을 텐데. 바보같이 저는.”

    안나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필리프가 빠르게 그녀의 어깨를 잡아 돌려세웠다. 그녀의 눈가와 코끝에 벌건 울음기가 맺혀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고개를 저은 안나가 금세 쾌활한 목소리를 냈다.

    “아니요. 폐하 앞에서 자꾸 실수했던 기억이 떠올라서요. 매번 이상한 모습만 보인 것 같아서… 만약 돌아가면 더 좋은 모습을 보일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했어요.”

    필리프가 헛웃음을 뱉으며 안나의 눈가와 코끝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오래도록 맞닿았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서로의 입술을 찾았다.

    풀벌레 울음소리가 잦아들고, 창가 너머 달 끄트머리에 조금씩 푸른빛이 섞여 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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