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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62)화 (62/139)
  • 62화

    마차의 덜컹거림이 멈추는 순간, 베르나가 긴 한숨을 뱉었다. 빠르게 베르나의 마차 가까이 다가간 호위병이 마차의 휘장을 걷어내고, 앞선 마차에 타고 있던 타론이 베르나를 향해 오른손을 내밀었다.

    “자, 내리시오.”

    타론의 손바닥 위에 곱게 손을 올려 마차에서 내린 베르나가 빠르게 뒤를 따라붙은 필리프를 주시했다. 그가 군마에서 내리며 말의 갈기를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었다. 평소 그가 타던 말의 종류가 아니었다. 베르나가 필리프의 낙상 사고를 계획했을 때의 말과 정확히 같은 종류의 말. 그녀가 가까스로 얼굴이 일그러지려는 것을 참아냈다.

    이제 와 굳이 상기시키겠다?

    “날이 금세 개어서 다행이지. 비가 내렸다고는 하나, 항해에 문제가 있을 정도는 아니고.”

    필리프가 베르나의 앞으로 한걸음 가까이 다가서며 말을 이었다.

    “선박 안에 작은 선물을 준비해 두었으니, 나중에 확인해 보도록 해.”

    “감사합니다, 폐하.”

    베르나가 드레스 단을 잡고 무릎을 가볍게 까딱거렸다. 그녀의 옆에 서 있던 타론이 먼저 필리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머무는 동안 베풀어 주신 모든 것에 감사합니다, 폐하.”

    “감사 인사는 먼저 내 쪽에서 전하는 것이 옳겠지. 대공. 앞으로 황녀, 아니 베르나를 잘 부탁하겠네.”

    필리프가 타론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감흥 없는 눈동자로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본 베르나가 항구 주변을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자 타론을 향했던 필리프의 눈동자가 자신의 눈동자가 향하는 곳을 정확히 따라 쫓는 것이 느껴졌다. 예상한 그대로의 필리프의 반응에, 가벼운 흥분이 일었다.

    하하, 정말 재미있다니까? 그렇게 긴장하실 것 없습니다, 오라버니. 위험 부담이 많은 이곳에서 더 일을 꾸밀 생각은 없으니까. 하지만 당신의 헛물을 켜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짜릿하니, 무언가 남겨 두었다는 뉘앙스 정도는 풍기는 것이 좋겠지요?

    “예상했던 것보다 항구가 적막하군요. 원래 수색용 함선 두 척이 늘 저쪽에 세워져 있지 않았습니까?”

    베르나의 손가락이 항구 우측을 가리켰다. 필리프가 바로 시선을 돌리며 즉답했다.

    “내가 치우라 지시했어. 황녀가 제국을 떠나는 날인데, 시야를 방해하는 것들은 모두 없애는 편이 좋을 것 같았으니까.”

    “참으로 섬세하십니다, 폐하. 이렇게 신경을 써 주시다니요.”

    “그대가 평생 생활할 터전을 옮기는 날인데, 이 정도야 당연한 배려가 되겠지.”

    “마치 저를 다시는 보지 않을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조금 섭섭한데요?”

    내내 머금고 있던 베르나의 상냥한 미소에 실금이 갔다. 동요를 보이지 않은 필리프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먹구름이 사라진 자리를 희미한 햇살이 대신하고 있었다.

    “그럼 더 늦기 전에 배에 오르는 것이 어떤가. 날씨란 것이 워낙 변덕이 심하니까.”

    필리프가 준비된 선박을 가리켰지만, 베르나의 시선은 항구 우측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한참을 뜸을 들이던 베르나가 천천히 선박에 오르고, 수십 명의 시종과 호위병이 차례대로 선박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들 중에는 필리프의 지시로 오랫동안 베르나를 감시해 온 이도 섞여 있었다.

    뿌우우!

    예정된 인원 전부가 선박에 탑승했음을 알리는 뿔피리 소리가 길게 울리고, 곧 느릿하게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폐하. 바로 황궁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잠시.”

    호위병을 물러서라 지시한 필리프가 배가 항구를 완전히 빠져나갈 때까지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베르만 영주에게 똑똑히 지시해 두었겠지.”

    “예, 폐하. 베르만 영주의 저택에서 바다를 바로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저희 쪽 병력을 배치해두었습니다. 이제 항구를 빠져나갔으니 약 두 시간 이후면 베르만 영주의 저택 근처 바다에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음.”

    베르나가 탄 선박이 방향을 바꿀 가능성이 있었다. 필리프는 예상이 가능한 모든 시나리오에 맞춰 철저히 대비책을 세워 놓았다.

    “이제 항구 주변 수색을 시작해. 의심스러워 보이는 것을 모두 찾아내고,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즉각 체포하도록.”

    “알겠습니다, 폐하!”

    항구 주변 수색이 모두 완료될 때까지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군마에 올라탄 필리프가 신중하게 수색대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베르나가 별실을 나섬과 동시에 별실 내외부를 철저히 살필 것을 지시했고 안나가 있는 침실 근처에 평소보다 많은 호위 병력을 배치해 놓았지만, 마음이 완전히 놓이는 것은 아니었다. 어서 빨리 안나에게로 돌아가 그녀가 안전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다.

    “폐하. 근방 수색을 마쳤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빠르게 필리프의 앞에 다가선 수색 총괄 대장이 황제에게 수색 관련 결과를 보고했다.

    “총 다섯 구역으로 나누어 수색한 결과 수상한 물건과 사람 모두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황궁 수색도 아무 이상 없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그저 내가 제 손에 놀아나는 것을 지켜보고 싶어서였나. 희미하게 남은 연민마저 사라지게 하는 행동이군.

    베르나가 몸을 실은 파이만 제국의 선박이 베르만 영주령을 통과했다는 보고를 들은 필리프가 고삐를 잡아당겼다.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었기에 항구 곳곳에 눈에 띄지 않는 병력을 숨겨 놓았고, 근거리에 무기들을 배치해 놓았지만 어떠한 소란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직 긴장을 완전히 놓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근방에 병력을 분산 배치한 필리프가 항구 우측을 돌아보았다. 당장 황궁으로 돌아가 안나를 품에 안고 싶은 생각뿐이었지만,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정찰대를 만나보고 돌아가지.”

    “예, 폐하.”

    필리프는 항구 정찰대가 베르나에게 매수되었다는 심증에 정찰대 전원을 새로운 인물로 교체했다. 매수된 사람들의 징벌 여부를 베르나가 제국을 떠난 이후로 미뤄놓은 것은, 그들에게 더는 기댈 구석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시키기 위해서였다.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정찰대장의 인사를 받은 필리프가 근무 보고서를 받아들었다.

    “폐하께서 말씀하신 근무 보고서입니다. 일분일초의 누락도 없이 철저하게 작성하였습니다.”

    “음. 야간 근무 인력을 더 늘리도록 해. 순찰 반경은 산맥 끝까지 확대하고. 병력의 교대 시간은 초 단위로 적어놓도록.”

    “알겠습니다, 폐하.”

    “그리고… 전임자에 관한 이야기는 들었겠지.”

    필리프가 본론을 꺼내 놓았다. 순간적으로 바뀌는 필리프의 눈빛에 겁을 집어먹은 정찰 대장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제때 입을 열지 않는 자들은 모두 바른 탑 지하로 보낼 생각이야.”

    바른 탑 지하에 설치된 늪을 떠올린 정찰 대장이 바르르 어깨를 떨었다. 어깨까지 잠기게 만들어진 늪은 죄수들의 고문을 위해 만들어졌는데, 한번 몸이 잠기게 되면 늪을 빠져나가는 것이 불가능했다.

    빠져나온 얼굴을 들쥐 떼들에게 뜯어먹히는 고통을 참지 못해 스스로 늪에 얼굴을 담가 목숨을 끊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지나치게 잔인하다는 이유로 선황이 없애버린 늪을 다시 구현해낸 이는 필리프 황제였다.

    “제국의 황제에게 반기를 든 자들에게, 자비란 필요 없는 것이겠지. 안 그런가.”

    황제의 목소리는 낮고 침착했지만, 단어 사이사이에 분노가 스며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바른 탑 지하 늪에 갇혀 고통스러운 신음을 뱉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 정찰 대장이 사지를 부들부들 떨며 답했다.

    “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폐하.”

    허리춤에 찬 칼집 손잡이를 느리게 덧그린 필리프가 정찰 대장과 오래도록 눈빛을 교환했다. 다시는 황제의 감시를 피해갈 수 없을 것이라는 경고를 담은 눈빛이었다.

    “그럼, 수고하게.”

    “감사합니다, 폐하.”

    정찰 대장의 어깨를 잡은 손에 꽉 힘을 주었다가 푼 필리프가 등을 돌렸다. 걸음걸이의 속도를 높인 그가 빠르게 항구의 출구를 벗어났다.

    “황궁으로 돌아가겠다.”

    “예, 폐하.”

    예기치 않게 내린 비로 바닥이 질척거려 마차를 타는 대신 직접 말을 몰기로 선택한 것이 다행이었다. 능숙하게 말의 박차를 가한 필리프가 숲을 벗어났다. 시내로 접어들자 흐렸던 하늘 사이에서 밝은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한참을 달려 황궁 출입구를 눈앞에 두었을 때, 출입구 앞에 세워진 작은 가마 한 대에서 내리는 누군가가 보였다. 가장 먼저 사람의 움직임을 확인한 황제의 호위병이 고삐를 세게 잡아당겨 마차 바로 앞까지 말을 몰았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비취색 숄을 두른 여인이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숄 틈으로 드러난 여인의 얼굴을 확인한 필리프가 여인을 막아서려는 호위병을 제지했다.

    “다들 물러서.”

    “…예, 폐하.”

    웃음기를 머금은 필리프가 말에서 내려 여인에게로 다가갔다.

    “유모.”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필리프의 곁으로 한 걸음 다가선 이레네 칼리프가 필리프의 앞에 고개를 숙였다. 황제와 황녀의 유모였던 이레네와 필리프 사이의 끈끈함은 황궁 내에 널리 알려져 있었기에, 황궁을 지키는 문지기들은 쉽게 그녀를 내치지 못하고 황제가 돌아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유모가 지금 황궁엔 어쩐 일이지. 일전에 입궁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전했던 것 같은데.”

    “폐하께 드릴 것도 있고.”

    이레네가 등에 멘 커다란 보따리로 시선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드릴 말씀도 있어 들렀습니다.”

    “그래. 들어가지.”

    황제가 이레네와 함께 향한 곳은 자신의 집무실이었다. 입을 굳게 다물고 황제의 뒤를 따르던 이레네가 황제의 침실 앞에서 불현듯 발을 멈추었다. 필리프가 침실 문을 뚫어지라 바라보며 선 이레네를 돌아보았다.

    “오늘은 집무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지.”

    “…….”

    “유모.”

    이레네가 침실 방문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떼어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제가 드릴 말씀이 있다고 말씀드렸지요.”

    “그런데?”

    “제가 말씀을 전할 상대는 폐하가 아닙니다.”

    그녀의 시선이 다시 침실 문으로 향했다.

    “제가 말씀을 전하러 온 상대는 지금 이 안에 있는 분입니다.”

    “뭐?”

    “제게 잠시 시간을 허락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레네가 말을 마침과 동시에 침실 문이 열렸다. 방문 앞에서 들리는 필리프의 목소리에 문고리를 잡아당긴 안나의 얼굴이 보였다. 이레네와 눈을 마주한 안나가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필리프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그녀가 무사하다는 사실에 안심하는 것도 잠시, 필리프가 다급하게 몸을 움직였다.

    “방으로 들어가.”

    무의식적으로 빠르게 안나의 앞을 막아선 필리프가 침실 안으로 들어서려는 이레네를 막아섰다. 그런 필리프를 바라보는 이레네의 얼굴에 조금씩 어두운 빛이 스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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