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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61)화 (61/139)

61화

“이제 거의 다 됐어.”

안나의 등 뒤에 바짝 몸을 밀착한 필리프가 그녀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 오늘은 베르나 황녀와 타론 대공이 황궁을 떠나기로 한 날이었다. 황녀가 원래 계획되었던 날보다 빠르게 황궁을 떠난다는 것이 다행이었지만, 황녀가 완전히 제국을 벗어난 것을 확인할 때까지는 긴장을 놓을 수가 없었다.

필리프는 베르나의 눈에 띄지 않는 선에서 시시각각 그녀를 주시했다. 무슨 다른 꿍꿍이가 있는지는 파악하지 못했지만, 다행히 제국을 떠나는 날인 오늘까지 별다른 수상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한참 필리프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던 안나가 고개를 돌려 창밖을 주시했다.

“오늘… 날씨가 너무 좋지 않은데요.”

새벽부터 내리기 시작한 빗방울이 억수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온 하늘이 찢어질 것처럼 괴성을 지르는 듯했다. 시꺼먼 암흑이 켜켜이 쌓인 하늘을 올려다보던 안나가 다시 필리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혹시 태풍이면 어쩌죠? 괜찮으시겠어요?”

“마지막 배웅까지 생략할 수는 없으니까.”

“그런데 오늘 같은 날 배가 뜰 수 있을까요? 사방을 제대로 분간할 수 없어서 시야 확보가 어려울 것 같은데요.”

“음.”

안나를 창가에서 물러나게 한 필리프가 창문을 열어 어두워진 하늘과 빗줄기의 방향을 꼼꼼히 살폈다. 분명 그리 오래 내릴 비는 아니었지만, 비의 양이 문제가 될 수 있었다.

“비가 일찍 그친다면 항해하는 것에 큰 무리는 없을 거야. 어서 비가 그치길 빌어봐야지. 예정된 날짜에 베르나를 떠나보내야 우리의 마음이 좀 편해지지 않겠어?”

곧 필리프의 곁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남은 소중한 시간을 그저 흘려보낼 수는 없었다. 베르나라는 위험인물이 곁에서 사라진다면 필리프와 조금 더 편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고개를 끄덕인 안나가 필리프의 공단 재킷 위로 두꺼운 가죽 갑옷을 걸쳐주었다. 필리프와 함께 침실에서 생활한 이후 그의 착복을 돕는 일은 안나의 몫이 되었다.

“그럼 언제 출발하세요?”

“빗줄기가 약해지면 바로 출발할 예정이야.”

필리프가 벽난로 위 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이제 슬슬 내려가 봐야 할 것 같아.”

잠시 그와 떨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아쉬워져 안나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침실을 나서려던 필리프가 발을 멈춰서 벽난로 앞으로 다가갔다. 그가 화드득거리며 활활 타들어 가는 벽난로 속으로 참나무통 몇 개를 집어넣었다. 삽시간에 방 전체에 후끈한 열기가 퍼졌다.

“저 안 추워요. 사실 이제 좀 더운데.”

“어젯밤에 추운지 몸을 많이 떨던데?”

“제가요?”

예고 없이 퍼붓기 시작한 비 때문인지 간밤 안나는 여러 차례 몸을 작게 웅크렸었다. 안나가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침대를 벗어난 필리프는 벽난로에 닥치는 대로 장작을 밀어 넣었고, 안나가 땀을 흘리며 스스로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낼 즈음이 되어서야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내내 걱정하며 살폈던 그녀의 몸 상태는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여전히 앙상한 몸에 살이 붙지 않는 것이 걱정되었지만, 며칠 전보다는 먹는 양이 조금씩 늘어 다행이었다.

“오늘은 함께 점심 먹을까? 베르나를 배웅하고 떠난 것을 완전히 확인하려면 아마… 서너 시간 정도는 걸릴 것 같은데.”

“좋아요. 기다릴게요.”

“그렇다고 아침을 걸러서는 안 돼.”

필리프가 테이블 위 깨끗한 천이 덮인 쟁반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안나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그녀를 닦달하고, 원하는 메뉴를 고르게 해 미리 준비하라 이른 아침 식사였다.

“네가 원한 대로 샐러드 위주의 간단한 식사니까 말끔하게 비우도록 해.”

제법 엄격한 표정을 짓는 필리프의 얼굴을 살짝 올려다본 안나가 눈동자의 틈새를 새초롬하게 좁히며 물었다.

“혹시 명령이신가요?”

피식, 바람 빠진 웃음을 뱉은 필리프가 안나의 귓바퀴를 가볍게 물었다가 놓으며 귓구멍 바로 앞에서 속삭임을 뱉었다. 이제는 익숙해질 만도 한데, 여전히 그의 숨결이 닿는 순간 안나가 몸을 움찔거리며 어깨를 움츠렸다.

“명령이 아닌, 부탁이라고 해 두지.”

분명 새빨갛게 달아올랐을 얼굴을 감추려, 안나가 시선을 낮춘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아, 혹시 먹고 싶은 것이 있다면 미리 시종에게 말해 둬. 그게 무엇이든.”

“무엇이든지요?”

“그럼. 원하는 것이라면 그 즉시 눈앞에 대령시킬 수 있는 것, 바로 제국 황제의 특권이지.”

실로 오랜만에 보는 그의 오만한 표정이었다.

“그럴게요. 이제 정말 가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시간이 되면 수행원이 알아서 저 문을 두드릴 테니까 걱정하지 마. 가만히 보니까, 은근히 나를 내쫓고 싶은 눈치인데? 대체 혼자서 뭘 하려고?”

“아니, 하긴 뭘 해요. 그런 게 아니라, 저 때문에 늦어지실까 봐 그러죠.”

안나가 걸친 실크 숄 끈을 잡아 쥐는데, 필리프가 그녀의 손등을 덮어 잡았다.

“벗으려고? 안 돼. 여름 감기가 얼마나 지독한 줄 알고 있어? 이런 날에는 최대한 몸을 따뜻하게 해야 해.”

“감기요? 지금 제가 걸치고 있는 옷을 보시고도 그런 소리를 하시나요?”

안나가 어이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뱉었다. 안나의 몸은 겨울용 실크 숄로 단단히 싸매어져 있었다. 안나의 목덜미 밑으로 내려온 실크 끈을 잡은 그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이 정도는 되어야지.”

필리프가 끈을 묶어 리본 모양을 만들고 만족스럽다는 미소를 지었다. 필리프와 친밀한 관계가 된 후 안나가 새롭게 깨달은 사실은, 그에게도 은근히 어린아이 같은 면모가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지 말라며 으름장을 놓던 모습을 잠시 떠올렸다. 찬 바람이 쌩쌩 부는 냉정한 표정과 가시 돋친 말투는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안나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필리프와 시선이 부딪쳤다.

“아, 아니에요.”

“난 네가 내 앞에서 다른 생각을 하는 게 너무 싫은데.”

거침없이 드러나는 그의 소유욕과 애정 어린 질투가 이제는 익숙하게 느껴졌다. 단단한 그의 팔이 어깨를 훑고 내려가 안나의 옆구리를 쓸었다.

“무슨. 다른 생각 아니에요. 어서 내려가 보세요.”

“뭐야. 무슨 생각을 했는지 말해 봐.”

은근슬쩍 몸을 밀착해 오는 것을 보니, 제대로 된 대답을 듣기 전에는 절대 물러나지 않을 기세였다. 손쉽게 백기를 든 안나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폐하 생각이요. 문득 처음 폐하를 만났을 때가 생각나서요.”

“처음 만났을 때?”

“네. 그때랑 지금이… 너무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가 어이없다는 듯 옅게 웃으며 답했다.

“너무 당연한 소리 아닌가?”

“어쨌든 그런 거니까 이제 내려가 보세요.”

“그래서… 네가 봤을 때 내 변한 모습이 어떤데?”

그의 말끝에서 작은 웃음이 묻어났다. 귓가에 속삭여지는 달콤한 목소리의 주인은, 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확인하고 싶은 듯했다.

“어떻긴 뭐가 어때요. 아니, 가 봐야 한다고 하셨잖아요. 그만 이 손을 좀 놓으시고.”

“오늘따라 왜 자꾸 말을 돌리지? 내가 이렇게 궁금해 미칠 것 같은 기분으로 방을 나서야 네 속이 편하겠어?”

“아니, 뭘 또 미치기까지.”

“알잖아. 난 너에 대해서라면 아주 사소한 것까지 알고 싶은 사람이라는 걸.”

진심이 느껴지는 그의 말에 다시 온몸의 날이 사르르 무뎌지는 것을 느꼈다. 안나가 필리프의 재킷 자락을 꾹 움켜쥔 손에서 살며시 힘을 풀며 배시시 미소지었다.

“너무 좋아요. 좋아 죽겠습니다, 폐하.”

“뭐야. 다시 또 그 호칭이잖아. 폐하라는 호칭.”

“네?”

“내가 원하는 호칭은 따로 있는데, 몰라서 그러는 건가?”

정확하게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생각해 보니 그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그와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는 확신이 든 이후부터 폐하라는 호칭을 쓰는 것을 주저하게 되었다. 상하 관계가 아닌, 오직 사랑하는 상대로서의 그를 원하는 욕심 때문이었다.

처음 부를 때는 낯설었던 그 호칭이 어느새 폐하라는 호칭보다 더 익숙하게 느껴지는 요즘이었지만, 의식하지 않을 때는 문득 입에 붙은 호칭이 흐르곤 했다.

“그, 그게 아니고…….”

“잘 생각해 봐. 요즘은 폐하가 아닌 내 이름을 더 많이 불러 주었잖아?”

“네? 아니, 또 제가 언제 폐하의 이름을 그렇게 많이 불렀다고.”

“정말 기억 안 나? 어젯밤 침대에서도 몇 번이나…….”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황급히 주변을 돌아본 안나가 필리프의 입가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충분히 뿌리칠 수 있음에도 그대로 입을 내어준 필리프가 뭐라 알아듣지 못할 말을 웅얼거렸다. 즐거워 보이는 입매를 강하게 틀어막으며 말했다.

“예, 폐하! 잘 알겠습니다, 폐하! 앞으로 둘이 있을 땐 조금 더 신경 쓰겠습니다, 폐하! 이제 정말 내려가셔야지요, 폐하!”

필리프의 등을 문 쪽으로 밀던 안나가 슬쩍 창문을 돌아보았다. 대지를 반으로 갈라놓을 기세로 퍼부어대던 빗줄기가 어느새 많이 잦아들어 있었다.

“어, 비가 곧 그칠 것 같은데요?”

“음. 예정대로 출발할 수 있겠어.”

“예. 다행이네요.”

필리프와 안나가 함께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마침 방문을 두드리는 수행원의 노크가 들렸다.

“그래. 그럼 다녀올게.”

어린아이 쓰다듬듯 안나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은 필리프가 방문 고리를 잡아 돌렸다. 침실 앞에 대기하고 있던 호위병과 수행원들이 반으로 갈라서 황제가 지나갈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고도 한참 그가 떠난 자리를 내려다보던 안나가 빠르게 침실 문을 닫고 창가로 다가갔다.

창문 밖으로 고개를 쭉 내밀고 기다리기를 한참, 시끌벅적한 소리와 함께 황녀의 사절단이 황궁 밖에 모습을 드러냈다. 곧 황궁 입구에 황금과 비단으로 장식한 마차가 들어서고, 타론 대공의 손을 잡은 베르나 황녀가 마차에 올라탔다.

황녀의 마차 뒤로 제국 최상급 군마가 보였다. 단번에 군마에 올라탄 필리프 주변으로 수십 명의 호위병이 자리했다. 안나가 불안하게 일렁이는 가슴을 잡고 황녀를 태운 마차가 황궁을 완전히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황녀의 마차 뒤를 필리프와 그의 호위병 무리가 바짝 따라붙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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