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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57)화 (57/139)
  • 57화

    “뭐?”

    회의 서류를 살펴보던 필리프가 짜증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사교계에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문제를 제기하는 귀족들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필리프가 들고 있던 서류철을 소리 내어 닫았다. 의자 등받이에 허리를 기대고 화를 삼키던 그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불만이 있는 자는 모두 내 눈앞으로 데려다 놔. 내가 직접 그들에게 이야기를 들을 테니.”

    “폐하.”

    빠르게 필리프의 옷매무새를 정돈한 수행원이 덧붙이려던 말을 삼키며 뒷걸음질 쳤다. 최근 황궁 시종과 황제가 염문을 나누고 있다는 소문이 사교계에 퍼지기 시작했고, 이로 인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는 상황이었다.

    “더 할 말은?”

    “…없습니다, 폐하.”

    안나의 일과 관련하면 이상할 정도로 감정적으로 변하는 황제였기에, 더 이야기를 꺼내 그의 화를 돋울 이유가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황제와 안나의 사이를 크게 의심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이야기가 달랐다. 단지 짐작일 뿐이지만, 수행원은 안나를 향한 황제의 마음의 크기가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안나는 어디에 있지?”

    “중앙 정원을 산책 중입니다.”

    황녀가 황궁을 떠나기 전까지 안나에게 최대한 몸을 사려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해 놓았지만, 답답함을 느낄 그녀를 위해 필리프는 하루 한 시간 호위병을 동반한 산책을 허락해 주었다.

    “회의까지 남은 시간은?”

    “삼십 분 정도 남아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필리프가 바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따로 묻지 않아도 황제가 향하는 곳이 어디일지를 알아챈 수행원이 말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정원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복도 끝에서 발을 멈춰선 필리프가 느릿하게 정원을 산책하고 있는 안나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분명 자신의 눈앞에 그녀의 모습이 보이는데, 그런 그녀가 잡을 수 없는 신기루처럼 느껴지는 건 왜일까. 알 수 없는 불안감은 매일 그 부피를 키워나가고 있었다.

    “폐하. 말씀하신 검술 수련자를 알아보았습니다. 황궁 기사단의 피터 파슨스가 적역일 것 같습니다.”

    “피터 파슨스?”

    필리프가 못마땅한 얼굴로 수행원을 돌아보았다.

    “예. 말씀해 주시면 일정을 알아보겠습니다.”

    자신의 불안감으로 언제까지 안나를 방안에만 가두어 놓을 수는 없었다. 그녀의 곁에 수 명의 호위병을 붙여 놓을 수도 있었지만, 언제나 예상하지 못한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야 했다. 이에 필리프는 안나에게 기본적인 호위 무술을 가르쳐줄 사람을 알아보라 명했었다.

    “그자가 혼인했던가?”

    “예? 아, 그것은 확인해 보지 못했습니다.”

    피터 파슨스가 안나의 몸에 바짝 밀착해 호위 기술을 가르쳐 주는 장면이 머릿속에 연상되자,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몰려왔다.

    “일단 내가 이야기할 때까지 미뤄 둬.”

    “알겠습니다, 폐하.”

    안나를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우려할 만한 일은 애초에 만들지 않는 편이 좋았다. 기본적인 호신술이야 자신이 직접 가르쳐 주어도 될 일이니.

    고개를 끄덕인 필리프가 안나가 있는 정원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폐하.”

    필리프의 얼굴을 확인한 안나가 볼을 붉게 물들이며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어쩐 일이세요?”

    “잠시 시간이 나서. 산책은 끝난 거야?”

    “아, 예. 이제 들어가려던 참이었어요.”

    제법 오래 산책한 것인지 안나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주변 시종을 모두 정원 밖으로 내보낸 필리프가 안나의 손을 가볍게 맞잡았다.

    “날이 꽤 더운데, 그만 들어가는 게 좋겠어.”

    활짝 열린 창문으로 눅눅한 공기가 밀려 들어왔다. 필리프가 왼손을 들어 안나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 주었다. 절로 수그러드는 고개와 발갛게 물드는 뺨이 예뻤다.

    “회의에 늦으시겠어요.”

    “아직 시간이 있어.”

    “아니, 그래도.”

    필리프의 얼굴이 안나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녀의 얼굴뿐 아니라 귓바퀴와 목덜미가 새빨갛게 물드는 것이 보이고, 느슨했던 그녀의 등줄기에 빳빳하게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하얀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도드라진 그녀의 목뼈를 따라 느릿하게 입술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변을 의식한 것인지 그녀가 입술을 앙다물고 신음을 참는 것이 느껴졌다. 입술을 말아 올려 웃은 필리프가 열 오른 그녀의 귓바퀴를 가볍게 물었다.

    “아아…….”

    도저히 참아낼 수 없었던 신음이 그녀의 빨간 입술 사이를 갈랐다. 예민한 부분에 내려앉은 뜨거운 숨소리에 어깨를 움칠거린 그녀가 안간힘을 쓰며 필리프에게서 몸을 물렸다.

    “그, 그만.”

    습한 소리를 내며 필리프의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안심하는 것도 잠시, 다시 그가 낯간지러운 소리를 내며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폐, 폐하. 여, 여기서는 그만.”

    아뿔싸. 급한 마음에 뱉어버리긴 했지만, 안나는 바로 자신의 말실수를 깨달았다.

    “여기서는 그만? 그럼 다른 곳에서는 괜찮고?”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아니, 잘 알아들었어.”

    안나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인 필리프가 고개를 돌려 수행원을 불렀다. 어쩔 수 없어 벌어졌던 입을 다문 안나의 정수리에 그의 손바닥이 내려앉았다.

    “먼저 돌아가 있어. 회의를 마치면 바로 갈 테니.”

    쓱쓱. 어린아이 쓰다듬듯 안나의 머리를 만지작거리던 필리프가 아쉬움을 삼키며 손을 거두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안나에게 평소와 다름없는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등을 돌린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와 떨어져야 하는 몇 시간이 지독하게 길게 느껴질 것 같았다.

    * * *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네.”

    필리프의 침실로 돌아온 안나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이 너무나도 빨랐다. 남아 있는 시간 내내 그와 잠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았지만, 제 욕심만을 채울 수는 없었다.

    ‘아직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어. 카밀라 쪽도 잠잠하고.’

    ‘나에 대해서는 뭐라고 해?’

    ‘소문은 널리 퍼진 상태이지만, 주방장님이 철저히 입단속을 하고 계셔. 아무래도 폐하께 무슨 말씀을 들은 모양이야.’

    안나는 매일 밤 마샤와 정해진 곳에서 만나 주변 상황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마샤가 정체를 들켰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황녀는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베르나가 허튼짓을 꾸미지 않고 조용히 황궁을 떠나는 것이 최상의 시나리오였지만, 그녀가 황궁을 떠난다고 위험 요소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필리프에게 그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낙담한 안나가 다시 깊은 한숨을 뱉었다.

    “잠시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안나가 테이블에 얼굴을 묻고 생각에 잠겨있는데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황제의 수행원의 목소리였다.

    “예, 들어오십시오.”

    수행원의 손에 커다란 쟁반이 들려 있었다.

    “이게…….”

    “폐하께서 준비하라 말씀하신 음식입니다.”

    최근 음식을 잘 먹지 못하는 안나를 걱정한 필리프는 간밤 주방에 특별한 음식을 조리하라 일렀다.

    “카라나 주방장이 만든 음식입니다.”

    “카라나 주방장님이요?”

    쟁반 안에는 고기와 채소를 함께 볶은 음식과 안나가 좋아하는 달콤한 초코케이크, 그리고 이 세계에 온 후로 처음 보는 오렌지가 담겨 있었다. 오렌지는 대륙에서 전량 수입해야 하는 과일로 그 가격이 몹시 비싸 황궁의 특별 행사에서만 볼 수 있는 과일이었다.

    “그럼.”

    “예, 감사합니다.”

    안나의 인사를 받은 수행원이 방을 나서고 테이블 앞에 앉은 안나가 김이 올라오는 음식을 내려다보았다. 최근 정원에서 직접 따 온 약초들과 나물로 근근이 허기를 달래고 있긴 했지만, 언제까지 풀로 버틸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배 속 아이에게 충분한 영양분을 주어야 할 시기라 걱정이 늘어났다.

    마샤까지 베르나에게 매수되었던 만큼, 필리프를 제외하고는 안나가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이 없었다. 자신에게 인자했던 카라나 주방장이라도 해도 마찬가지였다.

    “…먹을까?”

    포크를 쥔 안나가 배 가까이 고개를 숙였다. 요 며칠 제대로 먹은 음식이 없어 뱃가죽이 납작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래. 조금은 괜찮겠지. 너를 위해서도.”

    결심한 안나가 고기를 집어 입안에 넣었다. 오랜만에 간을 한 음식을 먹어서인지, 별로 세지 않은 간이 몹시 자극적으로 느껴졌다. 두어 번 더 음식을 집어 먹은 안나가 결국 포크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오렌지를 집어 들었다.

    “그래. 과일에는 따로 손을 쓸 방법이 없을 테니까.”

    이 세계에 발을 들이기 전에도 값이 비싸다는 이유로 과일을 즐기지 않았던 안나였다. 오렌지 과즙이 입안에 터지는 순간, 그야말로 눈이 번쩍 떠지는 느낌을 받았다. 빠르게 오렌지 두 개를 먹어 치운 그녀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접시 뚜껑을 닫았다.

    주변 자리를 정리한 그녀가 침대 밑에 숨겨놓은 꾸러미 하나를 꺼내 들었다. 꾸러미 안에는 필리프가 자신에게 주었던 푸른 손수건과 단검, 그리고 아무리 없애 버리려 해도 없어지지 않는 수첩이 들어있었다.

    안나가 꾸러미 가장 안쪽에 넣어 놓은 종이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자신이 필리프를 떠나기 전 해야 할 일을 꼼꼼하게 적어놓은 종이였다.

    생각을 정리한 안나가 차분히 글자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한 페이지를 가득 채운 종이를 꾸러미 안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문가에 서 있던 필리프가 미소를 지으며 안나에게로 다가왔다.

    “어, 언제 오셨어요?”

    “너무 집중하고 있어서 도저히 방해할 수가 없던데.”

    어느새 안나의 곁으로 바짝 다가와 선 필리프가 안나의 허리를 감쌌다. 그가 바로 들고 있는 꾸러미를 낚아챌 것 같은 불안감에 안나가 급히 화제를 돌렸다.

    “아, 오늘 음식을 준비하라고 하셨다고 들었어요.”

    “아, 그래. 좀 먹었어?”

    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테이블 옆 쟁반으로 옮겨졌다.

    “음식이 맛이 없었어?”

    반도 비우지 못한 접시를 내려다보던 필리프가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요. 음식은 맛있었는데 오렌지 두 개를 전부 먹었더니 배가 좀 불러서요.”

    “그래?”

    “네. 너무 맛있었어요, 정말.”

    “그럼 더 내오라 하지.”

    “아, 아니에요.”

    가만히 두면 오렌지를 상자째 들이라 지시할 기세였다. 필리프의 손목을 잡아 그를 멈춰 세운 안나가 빠르게 꾸러미를 등 뒤로 감추었다.

    “엄청 비싼 과일이라고 들었어요.”

    “네가 좋아한다면 금화를 통째로 쏟아부어야 한다고 해도 상관없어.”

    진심을 담은 그의 말에 심장이 쿵쿵 소리높여 뛰었다.

    “폐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제가 해드릴 것이 없는 것 같아요.”

    필리프가 고개를 떨군 안나의 턱밑으로 손가락을 넣어 얼굴을 들게 했다.

    “네가 내 곁에 머무는 것만으로 충분해.”

    다정한 그의 말을 듣는 순간 터지려는 울음을 가까스로 삼켜냈다. 서글펐다. 아무런 흔들림 없이 자신만을 바라봐주는 그를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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