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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56)화 (56/139)
  • 56화

    예고 없이 들이닥친 황제의 호위병 무리가 항구 정찰대의 주위를 빙 둘러쌌다.

    “무슨 일입니까!”

    호위대장이 황제의 직인이 찍힌 종이를 모인 정찰대의 얼굴 앞으로 내밀었다.

    “지금부터 이곳을 수색하겠다. 수색이 끝날 때까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말도록!”

    웅성거리는 정찰대 인원이 미약한 반항을 해보았지만, 갑옷과 무기로 단단히 무장한 최정예 호위병들의 상대가 될 리 없었다.

    “대장님! 여기 있습니다!”

    호위병이 급하게 불에 태운 것으로 보이는 수십 장의 종잇조각을 발견했다. 불에 탄 종이를 받아든 호위대장이 정찰대 인원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들의 얼굴에서 당혹스러움이 읽혔다.

    “당장 모두를 잡아들여라. 이곳을 수색할 인원 몇을 남기고 즉시 황궁으로 돌아가겠다.”

    “예! 대장님.”

    필리프는 출항이 가능한 항구 두 곳에 각각 수십 명의 수색 인원을 보내 주변을 샅샅이 조사하라 명했다. 파이스 항구의 정찰대를 수색하던 중 수상한 증거를 발견한 호위병은 즉시 관련 인원을 잡아 황궁으로 향했다.

    기발병을 통해 항구 수색과 관련된 소식을 접한 필리프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수색대가 도착하면 정찰대 인원 전부를 서쪽 탑으로 데려가도록 해.”

    “알겠습니다, 폐하.”

    황궁 서쪽에 있는 베른 탑에 정찰대를 가두도록 지시한 필리프가 안나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저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들었다가 눈을 떴는데, 누군가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를 들었어요. 파이스 항구의 정찰대와 관련된 이야기였는데, 황제가 알아차리기 전, 증거를 없애라는 내용이었어요.’

    ‘상대가 누구였지?’

    ‘괜히 움직여서 정체를 들키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상대가 누구였는지 정확히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함께 침실로 자리를 옮기기 전, 안나가 필리프에게 다급하게 털어놓은 이야기였다. 그녀가 한 말의 사실 여부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필리프는 즉시 항구 근처에 잠복 중인 이들에게 전갈을 띄웠고, 항구 주변에 흩어져 잠복하며 정찰대를 찾는 이를 뒤따르라 명했다.

    만일 베르나에게 매수되었다면, 그 증거는 철저히 없애버렸을 가능성이 컸다. 정찰대를 즉시 지하 감옥에 가두지 않고 서쪽 탐으로 옮기라 지시한 이유는 베르나에게 메시지를 전하기 위함에서였다.

    “폐하. 황녀님이 알현을 청합니다.”

    굳은 낯의 필리프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응접실로 가지.”

    황제의 시종이 집무실과 연결된 응접실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집무실에서는 문 하나만 열면 되지만, 문밖에서는 황궁 통로를 가로질러 한참을 걸어야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응접실의 문이 열리고 모습을 드러낸 베르나가 나붓하게 절하며 상냥한 목소리를 내었다. 창가 옆 의자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던 필리프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폐하. 차를 준비해오겠습니다.”

    “아니, 그럴 것 없어. 황녀는 이곳에 오래 머물지 않을 테니.”

    찬 바람이 쌩쌩 부는 황제의 태도에도 굴하지 않은 베르나가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지으며 입을 열었다.

    “설마 자리에 앉는 것도 허락하지 않으시는 건가요?”

    “글쎄. 그건 그대가 나를 찾은 이유에 따라 달라질 것 같은데.”

    살짝 열어둔 창문 밖에서 희미한 말발굽 소리가 울렸다. 베르나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밖으로 황제의 호위대가 보이고 곧 끈으로 사지가 결박된 사내 여럿이 호위대의 뒤를 따르는 것이 보였다. 결박된 자들의 얼굴을 확인한 베르나가 살짝 미간을 구겼다.

    “결혼식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창가에서 시선을 떼어 낸 베르나가 화제를 돌렸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베르나를 바라보던 필리프가 창가에 기대고 있던 몸을 세웠다.

    “결혼식이 왜.”

    “대공께서 피로연은 생략하자고 하셨습니다. 제 생각도 같았습니다.”

    이야기를 듣는 필리프의 얼굴은 한 점 흐트러짐이 없었다. 생각할 틈을 주지 않은 베르나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예정된 시간보다 이르게 제국을 떠나게 될 것 같습니다.”

    필리프의 입가에서 피식하는 웃음이 샜다.

    뭐야. 생각보다 시시하군. 쉽게 물러서는 척 상대를 안심시키고 뒤통수를 치려는 전략은 너무 뻔하잖아.

    “그래. 그대들의 생각이 그렇다면 나도 그에 따르도록 하지.”

    담담하게 답한 필리프가 더 할 말이 남았냐는 듯 턱을 까딱거렸다.

    “그럼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치맛자락을 쥔 베르나가 고개를 숙이는데, 눈앞에 하얀 종이가 팔랑거리며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종이에 적힌 내용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고개를 숙이는데 필리프가 먼저 떨어진 종이를 집어 들었다.

    “이만 물러간다고 하지 않았나?”

    무감한 필리프의 말에 베르나가 잡고 있던 치맛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물러가겠습니다.”

    응접실을 나선 베르나가 종이에 적힌 한 남자의 이름을 읊조렸다.

    “마이르 라인발트.”

    * * *

    안나가 바로 앞에서 길을 안내하는 황제의 호위병을 부지런히 따라붙어, 황궁 롱 갤러리를 지나 폭이 좁은 복도에 접어들었다. 복도를 10미터쯤 걸어 황궁 내 비밀 통로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황궁 내 비밀 통로가 존재하는 것을 아는 사람은 필리프와 그가 신뢰할 수 있는 시종 몇 명뿐이었다. 필리프는 마샤의 이야기를 들어보겠다는 안나의 청을 들어주었지만, 그가 원하는 시간과 장소여야 한다는 조건을 걸어두었다.

    좁고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 작은 횃불이 켜져 있는 작은 밀실에 도착한 안나가 내내 참고 있던 숨을 몰아쉬었다.

    “잠시 기다리십시오.”

    밀실 안을 꼼꼼히 살핀 호위병이 밀실 방문을 닫아주었다. 방 안에는 동그란 테이블 하나와 자그마한 나무 의자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자리에 앉지 못하고 주변을 서성이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방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샤의 눈가에는 검은 천이 둘려져 있었고, 안나를 밀실로 안내한 호위병이 마샤를 의자에 앉힌 후에 그녀의 눈가를 가린 천을 풀어주었다.

    “아, 안나?”

    잔뜩 겁에 질린 마샤를 마주한 안나가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호위병을 돌아보았다. 마샤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문 바로 앞에 자리한 호위병은 부동자세로 자리를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대체 여, 여기가 어디야?”

    “…….”

    “안나?”

    어떻게 말을 꺼내는 것이 좋을까. 만일 마샤가 베르나에게 매수되어 자신을 감시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 사실은 그대로 필리프의 귀에 들어갈 것이고 마샤는 중벌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마샤.”

    의자에 앉은 안나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꿀꺽 마른침을 삼킨 마샤가 눈동자의 크기를 키우며 안나를 응시했다.

    “사실대로 말해 줘.”

    “뭘? 대체 무슨 말이야. 여긴, 여긴 대체 어디고!”

    흥분한 마샤의 목소리 톤이 올라갔다. 마샤의 손목을 잡은 안나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나 너와 케이든 기사님이 함께 있는 것을 봤어. 두 사람이 나누던 대화도 들었고.”

    안나의 신경은 오직 마샤의 반응에 쏠려 있었다.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마샤의 표정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것이 보였다.

    “…안나.”

    “너는 나에게 소중한 친구니까, 먼저 네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어.”

    눈을 한번 질끈 감았다가 뜬 마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분명 네 목숨은 살려주신다고 했어. 나는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어. 나와… 그리고 내 가족의 목숨줄이 걸려 있기도 했고.”

    모든 것을 체념한 듯 힘이 쭉 빠진 목소리였다. 안나의 예상과 정확히 맞아 떨어지는 이야기였다. 감시의 목적으로 자신과 가장 가까운 이를 매수했을 것이고, 잘못은 그 사실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자신의 아둔함에 있었다.

    “언제, 언제부터야?”

    “수확제를 한 달 정도 앞둔 날이었어. 처음엔 그냥 네가 따로 처소를 빠져나가지 않는지만 알아보라고 하셨어. 네게 문제가 생기는 일은 결코 없을 거라고.”

    마샤의 말이 사실일까? 그녀의 말을 믿는 것이 좋을까? 머릿속이 점점 혼란스럽게 얽혀갔다.

    “정말… 미안해, 안나. 하지만! 내가 하지 않으면 다른 이에게 그 역할을 맡길 거라고 하셨어. 나는… 그래도 내가 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어.”

    고개를 숙인 마샤가 사과의 말을 뱉었다. 싸한 침묵 끝에 안나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녀의 시선은 문 앞 호위병을 향해있었다.

    “마샤가 이곳에 온 것을 알아차린 사람은 없겠죠?”

    불시에 질문을 받은 호위병이 얼굴에서 당황스러움을 지워내며 답했다.

    “없습니다.”

    확신이 담긴 대답을 들은 안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마샤를 내려다보았다.

    “마샤. 황녀님께서 네게 시키신 것과 네가 황녀님께 말씀드린 것 모두를 털어놔야 해. 그리고 황녀님의 명을 따르는 대가로 네게 약조해주신 것도 전부.”

    안나의 목소리가 빨라졌다. 다급한 마음에 목구멍에 뜨거운 것이 차올랐다.

    “그게 네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마샤가 자신을 속였다는 것이 확실해진 이상 그녀를 예전처럼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이 불가능해졌지만, 마샤를 이용하여 필리프에게 힘을 실어 줄 수 있었다. 마샤가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행동하며 베르나를 안심시키고, 베르나가 취할 행동을 예측하는 것이었다.

    * * *

    마샤와의 짧은 만남을 마무리하고 다시 필리프의 침실로 돌아온 안나가 생각을 정리하며 찻물을 들이켰다. 최대한 음식을 피하고 있는 안나가 허기를 달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두 잔의 차를 말끔히 비워냈을 때 침실 문이 열리고 필리프가 모습을 드러냈다. 빠르게 안나의 곁으로 다가선 필리프가 그녀의 이마를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왜 식사를 하지 않고.”

    “입맛이 없어서 오늘은 차를 마셨어요. 그리 배가 고프지 않아서요.”

    안나가 얼굴 가득 웃음을 담아 보였지만, 어쩐지 그녀가 진심으로 웃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리프가 제 손을 잡아 오는 안나의 손등을 느리게 쓰다듬었다.

    하루 사이에 그녀의 얼굴이 조금 야위어 있었다. 가뜩이나 날렵한 턱선이 더 날카로워졌고, 늘 생기 있던 붉은 입술 표면에 거친 것이 돋아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필리프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안나가 행복해하고 있지 않다는 느낌이었다.

    “오늘 저녁은 함께 먹도록 하지. 오랜만에 술도 한잔하고.”

    “오늘 대신들과 식사 자리가 있다고 하셨잖아요.”

    “며칠 미뤄도 상관없는 자리니 걱정할 것 없어.”

    “하지만.”

    필리프가 괜찮다는 이야기를 뱉을 것이 뻔한 안나의 입술 위로 급하게 입술을 겹쳤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스르르 벌어지는 입안으로 다급하게 혀를 밀어 넣고, 조심스럽게 얽혀오는 혀를 잡아 가두며 그녀의 뜨거운 입안 전체를 유영하듯 훑었다.

    슬금슬금 다가와 그대로 제 목을 조여버릴 것만 같은 불안감을 없애는 유일한 시간은, 그녀와 호흡을 교환하는 순간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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