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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55)화 (55/139)
  • 55화

    안나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아쉬움에 필리프가 누워있던 자리를 느릿하게 쓰다듬고, 그의 체향이 남은 베개에 얼굴을 묻으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깊은 수면에 몸을 담그기 바로 직전, 조금의 틈도 없이 맞물렸던 따뜻한 입술의 감촉이 되살아났다.

    아주 소중하고 귀한 사람을 대하는 듯한 필리프의 손길과 눈빛이 여전히 생생하게 온몸을 적셨다. 나라는 사람이 엄청나게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 준 유일한 사람.

    “아, 이렇게 여유를 부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부르르 몸을 떨며 간밤의 여운을 즐기던 안나가 벌떡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오랜만에 꿈도 꾸지 않고 단잠을 잔 덕분인지 사지의 삐걱거림이 많이 나아져 있었다.

    안나가 흐트러진 이부자리를 깨끗하게 정리하고 침대 맞은편 안락의자 위에 가지런히 개켜져 있는 옷을 입었다. 거울에 대충 얼굴을 비쳐 본 후 빠르게 침실 문을 잡아 돌리는데, 문 바로 앞에 서 있던 호위병 두 명이 안나의 앞을 가로막았다.

    “방을 떠나시면 안 됩니다.”

    “아니, 잠시만 나갔다 오겠습니다. 처소에서 가져와야 할 것이 있어서요.”

    “제가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무엇이 필요한지 말씀해 주십시오.”

    늘 안나를 하대하던 호위병들의 태도가 놀랄 만큼 깍듯하게 변해있었다. 필리프의 지시를 받은 듯 보였다. 잠시 고민하며 입술을 달싹이던 안나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아닙니다. 나중에 가져와도 되니, 오늘은 방에 있겠습니다.”

    안나를 향해 묵례한 호위병이 직접 침실 방문을 닫아주었다. 텅 빈 방 안에 홀로 남은 안나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테이블 앞 의자에 앉았다.

    앞으로 그와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은 오직 9일. 자신이 떠날 것이라는 사실을 황제가 눈치채게 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이레네의 당부를 떠올리며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생각해 보았다.

    ‘그렇다면 다시, 다시 돌아올 방법은 있습니까. 다시 폐하의 곁에 돌아올 방법을 가르쳐 주시면…….’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절박하게 물은 질문에 대한 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질문에 대한 답 대신 돌아온 것은. 정해져 있는 시간에 꼭 약을 먹어야 한다는 협박이 섞인 경고였다.

    ‘명심하십시오. 당신의 배 속의 아이를 살리는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멍하니 테이블 위에 놓인 꽃병을 바라보던 안나가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남은 시간 동안 필리프에게 어떻게든 도움을 주고 싶었지만, 지금 자신의 신세로 마땅히 할 수 있는 일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 너무 서두르다 보면 오히려 일을 그르칠 수도 있어. 일단은 누구의 의심도 사지 않으면서 베르나 편에 선 사람들을 가려내는 것이 좋겠어. 그에게 어떤 식으로든 도움을 주어야 해.

    안나가 예배당으로 향할 때 보았던 사람 중 이마에 표식이 새겨져 있던 자의 인상착의를 떠올리는데,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들어와도 좋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예.”

    방 안에 들어선 이는 금빛 보자기가 덮인 은쟁반을 든 시종이었다. 황제의 곁에서 직접적인 시중을 드는 시종의 복장은 주방 시종들과는 차이가 있었는데, 발목까지 내려오는 흰색 앞치마를 두르는 주방 시종들과는 달리 무릎길이 정도의 푸른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식사를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아… 예. 감사합니다.”

    은쟁반에는 따끈한 김이 올라오는 수프와 흰 빵 한 조각, 잘 익은 커다란 사슴 구이 한 덩이와 볶은 채소 구이가 담긴 접시가 놓여 있었다. 커다란 방 안에 금세 고소한 향이 퍼졌다.

    “그럼, 나가보겠습니다.”

    안나가 있는 쪽으로 접시와 커트러리를 놓아준 시종이 묵례하고 방을 빠져나갔다.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마주하니, 갑자기 걷잡을 수 없는 허기가 몰아닥쳤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잊고 바로 포크를 들어 음식을 맛보려던 안나가 음식을 입에 넣기 직전 포크를 떨어뜨렸다.

    자신의 입가에 약병을 들이밀었던 베르나의 모습과 음식 접시를 건네며 음식에 대한 경고를 뱉었던 카밀라의 모습이 번갈아 떠올랐다. 아무리 황제의 명에 의해 음식을 준비해 가져다주었다고 해도, 음식이 안전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없었다. 거짓말처럼 식욕이 사라졌다.

    안 돼. 베르나라면 시종 한 명쯤 손쉽게 포섭할 수 있었을 거야. 이 음식이 안전하다는 보장이 없어.

    음식 접시를 멀찌감치 밀어놓은 안나가 테이블 밑으로 손을 내려 납작한 배 위에 손바닥을 얹었다. 별다른 변화가 느껴지지 않는 배를 살살 쓸어내리는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왜, 도대체 누가 이런 일을 꾸민 것입니까! 누가 이토록 잔인한 일을 꾸민 것입니까!’

    처절한 안나의 절규를 들은 이레네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변하는 것을 느꼈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분명히 표정 변화가 있었다. 어딘가 조금 서글퍼 보이는 표정이었다.

    ‘세상의 순리를 거스르려 한 자는 언제가 되었건 자신이 벌인 일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순리를 거스르는 자, 이해할 수 없는 이 일의 배후에 있는 자가 혹시 제 꿈에 나왔던 소년의 모습으로 변해버린 노인이라는 추측이 일었다. 알아내야 한다! 만약 이 길만이 답이 아니라면! 다른 길이 있다면!

    ‘그,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계십니까? 아,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찾아가 이곳에 머물 수 있을 방법을 물을 테니! 제발!’

    ‘당신은 그자의 관심을 끌 수 없습니다. 확실한 것은 저는 당신을 도우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더는 그 무엇에도 의문을 가지지 마십시오.’

    ‘유모님!!!’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자와 깊이 연관된 것이 확실하다. 어떻게? 어떤 식으로?

    안나의 절규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이레네는 빠르게 흐트러진 표정을 갈무리했다. 다시 원래의 냉정함을 되찾은 이레네가 최후통첩을 날렸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절대 결정에 번복을 두지 마십시오. 배 속 아이까지 잃고 싶지 않다면.’

    무시무시한 이레네의 경고에 결국 두 가지 길 중 하나의 길을 선택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자신이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없었다.

    이레네의 말을 온전히 신뢰할 수 없음에도 그녀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녀의 말이 사실일 것이란 가능성을 접어둘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필리프뿐 아닌 그와의 아이까지 잃을 수는 없었다.

    “정말… 정말이야?”

    허리를 숙여 배 가까이 고개를 들이댄 안나가 떨리는 목소리를 뱉었다.

    “정말… 내 안에 있는 거야?”

    대답할 리 없었지만, 안나는 거듭 질문하며 작은 반응을 보여주길 바랐다. 손바닥을 얹은 배에서는 작은 진동 하나 느껴지지 않았고, 긴 한숨을 내쉰 안나가 배에서 손을 거두었다.

    “…아아아.”

    신발에 숨겨 놓은 약병을 확인하려 고개를 숙이는데, 순간 아찔한 현기증이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린 안나가 배를 움켜쥐는데 문밖에서 희미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필리프.

    그의 이름을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불렀는지, 그저 머릿속으로만 떠올렸는지 알 수 없었다. 수천 개의 바늘이 머리통을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지고 삽시간에 시야에 암흑이 찾아들었다.

    “안나? 안나!”

    안나가 몽롱한 시선을 들어 올렸다. 필리프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들렸다. 온몸에 힘이 빠져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려는 순간, 단단한 팔이 자신의 몸을 꽉 잡아 붙들었다.

    안나를 침실에 두고 나온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던 필리프였다. 평소와는 전혀 다른 표정으로 저를 찾은 안나를 대하며 마음 한구석 작은 불안감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안나의 몸을 붙든 필리프의 오른손에 강하게 힘이 들어갔다.

    “저, 정신이 들어? 안나!”

    “…….”

    “당장 주치의를 불러와! 지금 당장!!!”

    “알겠습니다, 폐하!”

    포효하는 듯한 그의 목소리에 빠르게 정신이 돌아왔다. 안나가 다급한 목소리로 시종을 재촉하는 필리프의 재킷 자락을 꾹 잡아 쥐었다.

    “…전 괜찮습니다.”

    “자, 침대에 눕혀 줄 테니까 내 어깨에 손을 얹어 봐.”

    필리프가 그대로 안나의 몸을 안아 일으키기 직전, 안나가 있는 힘껏 몸에 힘을 실어 그의 품을 벗어났다.

    “걱정하실 것 없어요. 너무 오래 침대에 누워 있던 모양이에요. 그냥 살짝 현기증이 일었던 것뿐이니, 주치의는 부르지 않으셔도 돼요.”

    “안나!”

    “폐하. 저는 정말 괜찮으니까 제 말을 좀 들어주세요. 먼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주치의의 진료는 이야기를 전한 뒤 받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먼저 제 말을 들어주세요.”

    그의 얼굴에서 걱정스러운 빛이 사라지지 않았다. 어느새 방문 앞에 도착한 주치의에게 잠시 대기하라는 신호를 준 필리프가 안나가 의자에 앉는 것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녀가 멀쩡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그가 불안감을 삼키며 안나의 이마를 쓸어주었다. 이마에 닿은 손끝에 뜨거운 열기가 고였다.

    “말해 봐.”

    주치의의 진단을 받는 것은 피해야만 했다.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필리프가 알아차린다면, 그를 떠나는 것이 더 힘들어질 수도 있었다. 어떻게든 몸이 멀쩡하다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떨리는 필리프의 손끝에서 눈을 떼어낸 안나가 담담하게 물었다.

    “저는 이대로 폐하의 침실에만 머물러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황녀가 결혼식을 마치고 제국을 떠날 때까지는 조심하는 것이 좋아. 네가 내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이 모인 공간에 있으면, 나도 마음 놓고 업무를 볼 수 있고. 네가 내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있다면 불안해서 견딜 수 없을 것 같으니까.”

    애원하는 듯 간절한 목소리에 마음이 약해졌다. 안나가 필리프의 커다란 손을 잡으며 그와 눈을 맞추었다.

    “우연히 알게 된 사실인데, 생각보다도 많은 사람이 황녀님의 편에 서게 된 것 같습니다. 폐하께 제가 알고 있는 사실을 꼭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그 전에 저도 확실하게 해 둘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청을 들어주셨으면 해서요.”

    필리프가 손가락 끝에 매달린 안나의 손을 힘주어 잡아 깍지를 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차분하게 숨을 가다듬은 안나가 예배당으로 향하며 보았던 인물의 인상착의를 읊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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