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몹시도 피곤한 하루였다. 오랫동안 욕조에 몸을 담그고 난 후 도수가 높은 증류주를 한가득 입에 머금은 베르나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생을 다하는 마지막까지 자신을 위한 충성심을 보인 가련하고 미천한 여인을 떠올렸다.
‘어쩌면 오늘이 우리가 만나는 마지막 날이 되겠구나.’
‘하지만 황녀님!’
‘만남이 더 길어졌다가는 필시 꼬리를 밟히게 될 것이다. 음독 시도의 배후에 내가 있다고 의심하지 못할 사람이 아니니, 나와 연관된 모든 이를 조사할 것이 뻔해.’
황제의 음식을 미리 맛보는 기미 시종이었던 루이사 스완에게 접근해 그녀를 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아주 손쉬운 일이었다. 고귀한 존재에게 처음 받아보는 관심, 누구에게도 존중받지 못하고 버러지처럼 살아온 시종에게 그 얼마나 값진 감정이었을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루이사 스완의 눈이 오로지 자신만을 담게 되었다는 것을 확신한 이후부터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흘러갔다.
겉으로는 성군처럼 보이는 황제가 자신에게만큼은 몹시도 냉정하고 잔혹한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베르나는 루이사의 머릿속에 끊임없이 주입했다.
응당 자신의 것이어야 할 모든 것을 빼앗고도 한 점 미안함조차 내비치지 않은 작자. 어리숙한 루이사의 마음속에도 황제를 향한 분노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황녀님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루이사가 베르나에게 먼저 이 말을 꺼낸 것은 루이사를 만나고 고작 보름이 지난 이후였다. 일찍부터 준비해 온 계획을 시작할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너도 곧 황제의 의심을 받게 될 것이란 소리야.’
망할 이레네 유모만 아니었더라도 확실하게 성공할 작전이었다. 하지만 이 음독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것에 분개하고 있을 때는 아니었다. 사건과 관련이 있는 모든 자에게 단단히 입단속을 시키고, 자신이 관여되었다는 의심을 피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죄를 전부 뒤집어쓰고 자백할 이는 미리 찾아 놓았다. 루이사의 충정을 알면서도 그녀에게 죄를 뒤집어씌우지 않은 것은, 그녀가 자신과 깊게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황녀님. 저는, 저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황녀님을 지켜드릴 것입니다.’
‘혹시 다른 이에게 나에 관해 이야기한 적이 있는가.’
‘없습니다, 황녀님! 동생에게도 단 한 번도 황녀님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습니다!’
루이사 스완이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동생에게 짧게라도 말을 흘렸을 가능성이 있었다.
‘황녀님에게 고통을 준 사람을, 저 역시 끝까지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제게 해야 할 일을 가르쳐 주시면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그러니!’
‘아니, 너는 이미 네 역할을 잘 해내었어.’
가엾은 여인은 절절하게 충심과 연정을 내보였다. 펑펑 눈물을 쏟는 루이사 스완의 얼굴을 짧게 쓰다듬은 베르나가 그녀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너와 함께 마시는 처음이자 마지막 술이 되겠구나.’
말 그대로 마지막 술.
술잔 안에 들어있는 독성이 몸 안에 스며들고 효과를 나타내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열두 시간이었다. 루이사 스완이 자신을 배신할 일은 없다고 확신한 베르나였지만, 그렇다고 찜찜함을 남겨 둘 수는 없었다.
‘너와 나를 위해서… 건배.’
베르나와 처음으로 마주하며 술잔을 기울이게 된 루이사가 황홀한 표정으로 술잔을 입술에 가져다 댔다. 입술 아래로 흐른 붉은 액체 방울을 바라보며, 베르나는 자신의 확실한 충신과의 마지막을 기념했다.
조금만 기다리면 동생을 만날 수 있을 테니, 그리 외로운 마지막은 아니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만큼 쓸 만한 이는 없었는데 말이지.”
번쩍 눈을 뜬 베르나가 혀를 차며 술잔을 비워냈다. 앞뒤 가리지 않고 오직 자신만을 위해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던 이. 온전히 믿고 일을 맡길 만한 사람을 찾기 힘들어진 지금, 루이사의 존재에 대한 아쉬움이 커지고 있었다.
“조금의 위험 부담을 감수하고서라도 살려둘 걸 그랬지? 이용가치가 남아 있는 인물이었는데.”
비운 잔 위에 다시 술을 따른 베르나가 안락의자에 깊게 몸을 기댔다.
“안나 스완…….”
제 언니를 닮은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 벌써 두 번이나 자신의 계획을 어그러뜨린 장본인이었다. 자신의 언니와 같은 독초를 먹고도 용케 살아남고, 갖은 술수를 써 황제의 눈에 들기까지 하다니.
거칠게 술잔을 내려놓은 베르나가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순간, 언젠가 루이사 스완이 해 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황녀님, 잘 찾아보면 직접 손을 쓰지 않고도 일을 꾸밀 방법이 있지 않을까요?’
‘어떤 방법을 말하는 거지?’
‘제 동생이 아주 어려서부터 연금술이나 분신술, 마법에 관심이 많아 들은 이야기가 많습니다. 지금이라도 이에 능통한 이를 찾는다면.’
‘어리석은 소리 집어치우거라!’
그때는 바보 같은 말이라 잘라내며 귀 기울여 듣지 않았던 이야기였다.
“설마 정말 이상한 술수로 목숨을 부지한 것이라면…….”
의자에서 단번에 몸을 일으킨 베르나가 시종을 호출했다. 조금 더 확실하게 안나 스완에 대한 조사를 해 두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 * *
정신이 들었지만, 감은 눈은 그대로였다. 눈을 뜨지 않아도 눈가에 밝은 빛깔이 느껴지는 것을 보니 어느새 날이 밝은 모양이었다. 비몽사몽 몽롱하던 안나의 의식이 순간 말똥말똥해진 것은 온몸을 부드럽게 감싸는 매트리스의 감촉 때문이었다.
“앗!”
반사적으로 번쩍 튕겨 오르는 몸이 단단한 무언가에 가로막혔다. 그제야 눈을 뜬 안나가 허리를 감아오는 손의 주인공을 확인했다.
“아직 괜찮아. 날이 완전히 밝지 않았어.”
“…폐하.”
그가 내뱉는 목소리도 얼굴도 방금 잠에서 깬 것 같지는 않은 모습이었다. 밝은 햇살을 맞아 더욱 빛이 나는 필리프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던 안나가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아… 저, 잠시만 비켜 주세요.”
“왜? 더 자도 된다니까. 어제 한 말 잊었어? 오늘부터 주방에 나갈 필요 없어.”
태연하게 말한 그가 안나의 머릿밑으로 손을 넣어 팔베개를 만들어주었다. 그의 팔이 허리에서 떨어져 나가는 순간을 기다렸다가 꾸물꾸물 그가 만든 울타리를 빠져나가려 해 보았지만, 강한 완력에 의해 손쉽게 제압당하고 말았다.
아니, 힘이 정말 왜 이렇게 센 거야. 도대체가 꼼짝을 할 수가 없네.
어차피 상대도 되지 않을 힘의 차이. 순순히 항복을 선언한 안나가 몸에 힘을 푸는데, 필리프가 상체를 비스듬히 세우며 안나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보니까, 잠꼬대를 꽤 많이 하는 편이던데.”
“제, 제가요?”
뭐야. 설마 이상한 말을 한 건 아니겠지? 바로 잠에서 깬 얼굴을 그에게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 창피해 내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그의 입꼬리가 매끄럽게 말려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어떤 소리를 했는지 궁금하지? 전부 다 말해 줄까?”
그의 얼굴에 장난스러운 빛이 스미는 것은 확실히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분명히 뭐라 이상한 말을 지껄인 것이 틀림없어.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안나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에요. 하나도 안 궁금해요.”
그대로 입을 꾹 다문 안나가 그의 품을 빠져나갈 빈틈을 찾아 눈동자를 굴렸지만, 상대는 호락호락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왜? 궁금할 것 같은데. 꿈도 무의식의 반영이라는 소리가 있잖아? 나는 네가 그런 생각을 하는 줄은 꿈에도 몰랐지 뭐야.”
“아, 아니… 무슨 그런…….”
필리프의 엄지손가락이 부드럽게 안나의 뺨을 쓸었다. 바로 잠에서 깬 얼굴이 너무나 사랑스럽기만 한데, 자꾸 눈빛을 피하는 것이 아쉬웠다.
잠이 든 그녀의 얼굴을 몇 시간 동안 그대로 지켜보았다. 말소리 하나 뱉지 않고 내내 곱게 잠든 모습이었지만, 깜짝 놀라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부러 꺼낸 말이었다.
“앗.”
허리가 필리프에게 바짝 밀착되는 순간 안나의 입에서 얕은 비명이 터졌다. 뒤늦게 다리 사이에 쓰라림이 느껴지며 간밤 있었던 일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왜, 어디 아파?”
“으악!”
얼굴에서 순식간에 장난기를 지워낸 필리프가 이불 안쪽으로 얼굴을 들이밀어 안나의 몸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졸지에 그에게 그대로 알몸을 노출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놀란 안나가 고함을 지르며 걷었던 이불을 끌어왔다. 필리프가 애벌레처럼 이불을 돌돌 감아 몸을 감싼 안나를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아니, 왜 그러는 거지? 어디가 아픈지 확인하려던 것뿐인데.”
“아, 안 아파요! 저, 저리 가세요.”
“갑자기 너무 태도를 바꾸는데? 분명 어젯밤만 해도 내 어깨에 달싹 매달려서…….”
“조, 조용히 하세요!”
안나가 손을 뻗어 필리프의 입을 가렸다. 가만히 두면 간밤에 있었던 일을 그대로 줄줄 읊을 기세였다. 벌겋게 달아오는 얼굴에 측은함을 느낀 것인지, 예상과는 달리 그가 순순히 말을 멈춰 주었다. 손바닥 안에 뜨끈한 숨이 고이는 것을 보니, 그가 웃고 있는 모양이었다.
필리프가 금세 태연한 얼굴로 안나의 허리를 끌어왔다. 작은 장난에도 파드득거리며 반응하는 것이 언제봐도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이, 이제 일어나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아직 괜찮아. 자, 그리니까 이리 누워.”
“아니, 저는 이제 잠이 다 깼는데…….”
“자, 여기를 베고.”
오른손을 안나의 등 뒤로 돌려 제 품으로 끌어당긴 필리프가 그녀의 얼굴을 억지로 제 가슴에 묻게 했다.
“자, 그럼 딱 30분만 더.”
머리 위에서 울리는 목소리가 다정하고 온화했다. 반항을 멈춘 안나가 얌전히 그의 품에 안긴 채 눈꺼풀을 사르르 내리감았다.
“이제부터는 아주 든든히 먹여야 할 것 같아. 고작 하룻밤 사이에 얼굴이 이렇게 핼쑥해진 것을 보니.”
안타까워하는 목소리를 낸 필리프가 다정한 손끝으로 안나의 뺨을 슬고 어루만졌다.
고작 하룻밤이라고 그렇게 간단히 얘기할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요? 아니, 그토록 짐승 같이 몰아붙였던 시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겁니까?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터졌지만, 뺨을 쓰다듬는 그의 부드러운 손길이 항의의 말을 내뱉는 것을 막아 주었다.
“계속 이렇게 있었으면 좋겠어.”
완전히 웃음기를 지워낸 진심 어린 목소리가 가슴을 저릿하게 했다. 서슴없이 다정한 눈빛과 목소리가 심장에 차곡차곡 고여 들었다. 용기 내어 고개를 든 안나가 필리프의 눈을 마주하며 답했다.
“저도 그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