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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53)화 (53/139)
  • 53화

    창문 너머에서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붉은 빛을 확인한 안나가 바로 몸을 일으켰다. 머릿속이 너무나 혼란스러웠지만, 당장은 필리프를 안심시키는 것이 먼저였다.

    모든 것이 낯설었던 새로운 세계에서 유일하게 마음을 나눌 수 있다고 생각했던 친구, 마샤의 이마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던 두 개의 원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무언가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함께 생활하며 느꼈던 마샤는 절대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정확한 판단을 흐리게 했다. 고개를 크게 저으며 머릿속 생각을 지워낸 안나가 부지런히 발을 움직였다. 발이 향하는 곳은 황제의 집무실, 이레네가 정해 준 방향이었다.

    아무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했지만, 생각은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갔다. 만일 베르나가 마샤를 매수해 자신을 감시하라 한 것이 사실이라면, 자신이 그 어떤 수상한 낌새도 눈치채지 못하고 그녀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발을 멈춘 안나가 탄식을 뱉었다. 베르나에게 사주받은 사람이 얼마나 될지 가늠할 수 없어 마음이 복잡했다. 자신에게 남은 시간은 오직 보름. 자신이 떠나고 홀로 남겨질 필리프의 삶에 대한 우려가 깊어지기 시작했다.

    그 누구도 자신의 편이라고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제껏, 앞으로도 홀로 버텨내야만 하는 그의 삶이었다. 끝까지 필리프의 곁에 남아 힘을 보태주지 못하고 떠나야만 하는 상황이라면, 남은 시간 동안 어떻게든 필리프를 도울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멈추어라.”

    안나가 황제의 집무실로 향하는 복도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가죽 갑옷을 입은 사내들이 그녀의 주변을 둘러쌌다.

    “안나 스완.”

    안나의 주변을 둘러싼 무리 끝에 서 있던 남자가 안나의 바로 앞에 다가와 섰다. 안나에게도 낯이 익은 황궁의 호위대장이었다.

    “따라와.”

    차갑게 내뱉은 호위대장이 안나의 주변을 빙 둘러싼 사내들을 지나쳐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가 향하는 곳은 황제의 집무실 앞이었다.

    “폐하. 카일 파더른입니다.”

    “들어와.”

    집무실 문을 연 카일이 문밖으로 물러서며 안나에게 눈짓을 보냈다. 깊게 심호흡한 안나가 집무실 안에 들어서고 곧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폐하.”

    촛불 두어 개만 켜 놓은 공간이 어두컴컴했다. 필리프가 있는 곳이 보이지 않아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는데, 누군가 성큼성큼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창가에서 스며들어오는 푸른 빛이 그의 뺨에 날카로운 음영을 새기는 것이 보이고, 곧 단단한 두 팔이 안나의 온몸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대체.”

    귓가에 내려앉는 나직한 목소리. 그리웠던 따스한 체향.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고,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어디에 있었지? 네가 사라진 줄 알고 얼마나…….”

    차마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한 그가 으스러뜨릴 것처럼 강하게 안나의 허리를 안고 뜨거운 숨을 뱉었다. 등을 쓰다듬는 성마른 손길에서 절박함이 느껴졌다.

    “…죄송해요. 사정이 있었습니다.”

    예배당 창가 밑에 쪼그리고 앉아 그럴싸한 변명을 수백 개도 넘게 생각했었는데, 어떻게 된 것이 단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한참 안나를 품에 안고 거친 숨을 뱉던 그가 살짝 얼굴을 떼어내며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안 좋은 일을 당한 건 아니겠지?”

    물어오는 말투가 거칠었다. 고작 반나절이란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 살짝 야윈듯한 그의 얼굴에 마음이 아프게 조여들었다.

    “아닙니다. 보세요. 이렇게 멀쩡하니 걱정하지 마세요.”

    애써 밝은 미소를 지어 보인 안나가 이번엔 먼저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걱정시켜서 죄송해요. 그런데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요. 황궁 복도를 지나다가 귀족 시종들이 모여 있는 곳에 우연히 섞여들게 되었고, 길을 잘못 들어 한참을 헤매다가 예배당에 들어가게 되었어요.”

    “…….”

    “그대로 처소로 돌아가려다가… 혹시 폐하께서 걱정하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가만히 안나의 이야기를 듣던 필리프가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로 넣은 손가락을 느릿하게 움직였다.

    “…폐하.”

    “쉿. 잠시만.”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손이 안나의 턱밑으로 내려와 그녀의 얼굴을 들게 했다. 한참이나 그녀의 얼굴만을 뚫어지라 내려다보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느릿하게 눈꺼풀을 내리감는 순간, 안나의 양 뺨을 감싸 쥔 그가 그대로 입술을 겹쳤다.

    뜨거운 입술이 맞닿는 순간 몸에 힘이 풀려, 그의 어깨에 간신히 걸쳐 두었던 손이 힘없이 낙하했다.

    “읏!”

    조바심을 드러내듯 사정없이 거친 키스였다. 입안 붉은 속살을 전부 삼켜버리려는 듯, 아랫입술을 깨물어 드러난 안쪽 연한 살점을 끊임없이 빨고 핥았다. 입가에 퍼지는 숨결이 너무나도 뜨거웠다.

    “하으, 응…….”

    살짝 입술이 떨어져 나가 부족한 숨을 몰아쉬려는데, 각도를 바꾼 그가 다시 깊게 혀를 밀어 넣었다. 단단히 힘을 실은 그의 혀가, 둘 곳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안나의 혀를 낚아챘다. 겨우 더듬거리며 그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고, 키스가 처음인 사람처럼 서툴게 코로만 숨을 들이쉬었다.

    “영원히 내 곁에 머문다고 약속해.”

    필리프가 안나와 입술을 붙인 채로 낮게 속삭였다. 그의 숨소리도 한결 거칠어져 있었다.

    “어서.”

    즉각적인 대답이 나오지 않는 것이 괘씸하다는 듯 그가 열 오른 하체를 바짝 밀착하며 답을 재촉했다. 온몸이 그대로 녹아 버릴 것 같아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 와중에 하릴없이 거짓을 뱉었다.

    “…약속할게요.”

    맵시 있는 입술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안나의 이마에 가볍게 닿은 그의 입술이 다시 미끄러져 내려왔다. 원하는 답을 뱉은 것을 칭찬하듯, 다시 시작된 키스는 평소보다 훨씬 다정하고 부드러웠다.

    먼저 혀를 넣어 보라는 듯 살짝 벌어진 입 안의 틈새로 안나가 제 혀를 부드럽게 밀어 넣었다. 부끄러운 기분에 질끈 눈을 감고 뜨거운 그의 입안을 조심스레 핥았다. 현기증이 일 정도로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흣!”

    한참이 지나고 젖은 소리를 내며 입술이 떨어졌다. 열 오른 몸을 도저히 지탱하고 서 있을 수가 없어 그의 가슴에 몸을 밀착시키는데, 그가 자신의 목에 두른 안나의 손을 잡아 내렸다.

    “내일부터 주방에 나가지 마.”

    “…하지만.”

    그가 손가락을 올려 안나의 입술 위에 얹었다. 벌어진 입을 다문 안나가 필리프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명령이야.”

    내뱉은 음성에서 사나운 울림이 묻어났다. 입을 벌렸지만, 대답이 나오지 않아 살짝 고개를 끄덕였더니 그가 안나의 허리를 바짝 끌어당겼다. 그가 흥분했다는 증거가, 맞닿은 하체로 적나라하게 전해져왔다. 안나가 바르르 몸을 떨면서 고개를 숙였다.

    “침실로 갈까?”

    의문문이었지만, 제 의중을 물어오는 것이 아니란 것쯤은 느낄 수 있었다. 살짝 입술을 틀어 웃은 안나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은 듯 안나의 이마, 눈가, 뺨에 가볍고 달콤한 입맞춤을 내린 그가 그녀의 손목을 잡고 집무실 문손잡이를 잡아 돌렸다.

    * * *

    하얀 레이스와 연분홍 리본으로 장식한 진줏빛 드레스를 입은 베르나가 재단사를 닦달하며 잔소리를 퍼부어댔다.

    “마감이 형편없잖아! 그리고 이 해괴망측한 리본은 대체 뭐야? 내가 지방 남작 부인이나 입는 촌스러운 옷을 입고 식장에 들어서길 원하는 거야?”

    “죄, 죄송합니다, 황녀님.”

    깊이 고개를 조아린 재단사가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분명 어젯밤까지만 해도 새로운 드레스 디자인에 만족스러움을 표했던 황녀였기에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당장 새로운 드레스를 만들어 와. 이틀 주겠어.”

    고작 이틀 만에 황녀가 만족할 만한 웨딩드레스를 만들어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지만, 당장은 그러겠노라는 답변을 뱉을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황녀님. 바로 작업하겠습니다.”

    “꼴도 보기 싫으니까 그만 나가.”

    비단부채로 얼굴을 가린 황녀가 불편한 감정을 고스란히 내비치며 안락의자에 앉았다. 곱게 다려놓은 폴로네즈 드레스가 사정없이 구겨졌지만, 구겨진 드레스 따위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저, 황녀님. 타론 대공이 뵙기를 청합니다.”

    대공이 방을 찾았다는 사실을 알리는 시종의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소식을 전한 시종을 응시한 베르나가 나지막한 욕설을 내뱉으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안으로 모셔.”

    “예, 황녀님.”

    구겨진 치맛자락을 빠르게 정돈한 베르나가 서너 시간에 걸쳐 치장한 머리 장식과 드레스를 거실 정 중앙 전신 거울에 비쳐 보았다.

    “준비되었소?”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타론이 방 안에 발을 들여놓았다.

    “준비가 좀 늦어졌어요. 자, 안으로 드세요.”

    화사한 미소로 타론을 맞이한 베르나가 그를 좀 전까지 자신이 앉아있던 안락의자로 안내했다.

    “뭔가 이야기가 새어 나간 것이 틀림없어요.”

    베르나가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새어 나오는 찻잔을 타론의 앞으로 밀어주고, 방 안에 머물던 시종을 모두 무른 후에야 입을 열었다.

    “음…….”

    차 한 모금을 머금은 타론이 수긍하는 것도, 반대하는 것도 아닌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느긋한 그의 태도에 울화통이 터졌지만, 온전히 자신의 편이 되어 줄 남자 앞에서 본모습을 전부 드러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왜,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글쎄. 혹시라도 이야기가 새어나갔다면, 우리 쪽 사람을 통해서는 아닐 거야.”

    타론이 침착하게 답했다. 물론 베르나 역시도 어느 정도 수긍하는 부분이었다. 잠시 제국을 방문한 파이만 제국 쪽 사람이 황제의 끄나풀과 접촉했을 가능성은 현격히 적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야기가 새어나간 것이 사실이라도, 당장 그 첩자를 찾는 것이 급한 일은 아니에요.”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던 베르나가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우리가 관련되었다는 사실을 절대 들킬 일이 없도록, 우선은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의 입단속이 우선이겠죠.”

    타론이 반쯤 비워 낸 찻잔을 테이블 끝으로 밀어 놓은 베르나가 미리 준비한 크리스털 술잔에 과실주를 따랐다. 최음 성분이 함유된 약초를 넣은, 당도 높은 과실주였다.

    “수도원에서 결혼 선물로 준비해 준 과실주에요. 향이 너무 좋던데요?”

    술잔을 받아든 타론이 코앞으로 다가온 베르나의 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물었다.

    “당신도 같이하지.”

    “아니, 난 괜찮아요.”

    베르나가 타론의 이마 밖으로 빠져나온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며 답했다.

    “우리 이제 곧 아이를 가져야 할 테니, 술은 좀 자제하는 것이 좋겠죠.”

    예상하지 못한 베르나의 답이 흡족한지, 타론이 깊고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베르나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급하게 술잔을 비운 그가 베르나의 치맛자락 사이로 손을 넣었다.

    “아이, 정말.”

    못 말리겠다는 듯 교태로운 미소를 뱉은 베르나가 타론의 어깨 위에 두 손을 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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