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눈을 감고 하나부터 열까지 천천히 헤아리십시오. 열까지 센 뒤 눈을 뜨면 황궁 연회장 근처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바로 제가 말씀드린 황궁 예배당으로 가서 날이 밝을 때까지 몸을 숨기십시오. 우측 창문을 주시하고, 창문 밖으로 붉은빛이 피어오르기 시작하면 즉시 폐하를 찾으시면 됩니다.
일곱, 여덟, 아홉…….
아홉까지 수를 센 안나가 차마 열을 세지 못하고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고작 보름만이 남아있는 그와의 삶. 말미가 정해진 이별을 받아들일 자신이 없었다. 망설임에 입을 떼지 못하는 사이,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갔다.
안나는 필리프와의 기억을 안고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을 선택했다. 어쩌면 전부 잊는 것이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처음으로 마음을 준 이와 하루라도 더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이기적인 결정일 수 있었지만, 그와의 시간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폐하께서도 당신과의 시간을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오랫동안 좌절하고 힘들어하시게 되겠지요. 하지만 그리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기억은 점점 희미해질 것이고, 시간이 지나면 그는 지금보다 훨씬 더 단단한 성군의 모습을 갖추시게 될 것이니.’
이레네는 홀로 남겨진 필리프를 걱정하는 안나를 안심시켰지만, 그 말이 위안으로 다가온 것은 아니었다. 서글펐다. 결국에는 그에게 희미한 기억으로만 남게 될 자신의 모습이.
…열.
아무리 미루려 해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안나가 망설임에 꾹 닫혀 있던 입술을 떼어내고 마지막 숫자를 셌다. 뱉어 놓고도 눈을 떼기가 무서워 무릎 안에 얼굴을 가두었다.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들었다.
“안나! 왜 이러고 있어. 어서 돌아가자.”
누군가 자신의 손목을 잡아끄는 것이 느껴져 닫혀있는 눈꺼풀을 들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마샤의 얼굴이 보였다.
“…어, 마샤.”
“주방장님이 이것만 가져다 놓고 빨리 돌아오라고 하셨잖아. 어서 가자.”
자신이 서 있는 것은 연회장 밖, 음식 접시를 올려놓을 큼지막한 테이블이 있는 곳이었다. 그래. 이 테이블 밑에 숨어 필리프의 모습을 찾았었지. 그리고 곧 케이든이 나타났었어.
케이든이 모습을 드러낼 시간이 머지않았기에 머뭇거리고 있을 수가 없었다. 빠르게 주변을 살핀 안나가 들고 있던 쟁반을 마샤의 손에 건네며 말했다.
“마샤. 먼저 주방에 돌아가 있어. 나 잠깐 들를 곳이 있어서.”
안나가 마샤의 답을 듣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렸다. 목적지는 정해져 있었다. 중요한 것은 베르나 황녀가 고용한 감시자의 눈을 따돌리는 일이었다.
‘말씀드린 주문을 외운 뒤 사람들의 이마를 살피십시오. 원이 두 개 겹친 모양이 이마에 새겨진 사람은 모두 베르나 황녀님의 사람입니다. 단, 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건 오직 십 분이니, 걸음을 서두르셔야 합니다.’
이레네가 일러준 주문을 외운 안나가 황궁 예배당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빠르게 발을 내디디면서도 유심히 사람들의 이마를 살폈다. 황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수의 인원을 매수한 것인지 길 곳곳 그녀의 감시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안나가 기다란 머리를 한데 모아 목도리처럼 목과 턱을 감싸고, 멀리 감시자가 보이면 바로 근처 석상이나 구조물 뒤로 몸을 숨기기를 반복했다. 시야 끄트머리에 예배당 입구가 보여 안도의 숨을 내쉬려는데, 자신이 서 있는 반대쪽 복도에서 걸어 나오는 케이든의 모습이 보여 그대로 숨을 멈추었다.
커다란 석상 뒤로 잽싸게 몸을 감춘 안나가 케이든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그의 등 뒤를 따르는 여자 한 명이 있었는데, 커다란 덩치에 가려 여자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었다.
잠시의 시간이 흐르고 조금씩 두 사람의 목소리가 가까이 들리기 시작했다.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제 입을 손바닥으로 가린 안나가 그대로 숨을 멈추었다.
“그래서,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는 말인가.”
“갑자기 갈 곳이 있다고 하면서 급히 자리를 떠났습니다. 너무 빨리 자리를 떠나 차마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기사님.”
들려오는 여자의 목소리는 안나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것이었다.
“주방에 돌아가 있어. 혹 그녀를 발견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곁에 두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기사님. 그럼 가 보겠습니다.”
안나가 살짝 고개만 움직여 석상 틈을 바라보았다. 케이든을 향해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마샤의 모습이 보이고, 그녀의 이마에 확연히 새겨진 두 개의 동그란 원 모양이 보였다.
* * *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이 돼? 고작 시종 한 명 하나 찾지 못해 이 소란을 떤다는 게?”
시종의 보고를 듣던 베르나가 미소가 걸린 표정을 최대한 유지하며 날카로운 말을 뱉어냈다.
“죄송합니다, 황녀님.”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으로 어깨를 조아린 시종을 눈빛으로 내친 베르나가 분노에 몸을 떨었다.
황제의 의심을 완전히 피하면서 안나 스완을 눈앞에서 없애버리기 위해 케이든 기사를 끌어들였고, 계획에 완벽하게 성공하기 위해 타론 대공의 도움을 받았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사랑에 눈먼 어리석은 사내들을 조정하는 일은 그녀에게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당장 계획을 미룬다는 서신을 보내세요.”
타론의 곁으로 다가선 베르나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안나 스완을 찾는 것에 시간을 쏟고 있을 수가 없었다. 두 번째 댄스 신청을 거절하고 부리나케 연회장을 빠져나가는 필리프가 곧 안나를 찾을 것이 뻔했다. 순조롭게 성공하리라 확신했던 계획을 중단해야 할 시점이었다.
“순찰대의 복귀도 서두르라 전하세요. 그 외 의심을 살만할 일 모두 철저하게 점검해야 해요.”
“알겠소.”
고개를 끄덕인 타론이 등 뒤 시종에게 무언가를 지시하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대로 회장을 나서려는 타론의 손목을 붙잡아 세운 베르나가 그의 가슴에 은근히 상체를 붙였다.
“아직 아닙니다.”
“내가 직접 나서 확인하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
“우리는 끝까지 연회를 즐겨야 해요. 그쪽이 훨씬 안전합니다. 제 말, 믿으시죠?”
타론이 답을 하려 입을 벌리는 순간, 바짝 몸을 밀착시켜온 베르나가 다리 한쪽을 그의 허벅지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살짝 벌어진 타론의 입가에서 더운 숨이 뿜어졌다.
“으음.”
“연회를 충분히 즐기고 우리의 방으로 돌아가요. 알았죠?”
베르나의 다리가 반응하기 시작한 그의 중심을 스칠 듯 말 듯 건드렸다. 타론의 눈동자에 맺힌 붉은 욕정을 읽은 베르나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래. 그러지요.”
부푼 중심을 진정시키려 자리에 앉은 타론이 길게 심호흡하며 흥분을 잠재웠다. 마른침을 삼키는 목울대가 다급하게 꿀렁거렸다. 자연스럽게 타론의 옆자리에 앉은 베르나가 은은한 미소를 머금으며 꿀벌주 한 모금을 머금었다.
안나 스완이 갑자기 자취를 감춘 탓에 예상대로 일을 진행할 수 없게 되었지만, 섣불리 일을 진행해 더 큰 화를 자초할 수는 없었다.
아무 이유 없이 사라졌을 리가 없어. 그래, 분명 누군가 말을 흘린 거야. 쥐새끼처럼 말을 흘린 작자를 찾아내고, 더 신중히 일을 진행해야 하겠어.
여유로운 표정으로 술잔을 비운 베르나가 사랑스러운 눈빛을 꾸며내며 타론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 * *
“폐하, 바로 침실에 드시겠습니까.”
평소답지 않게 두 번 연속 댄스를 권하는 베르나를 떼어놓고 연회장을 나선 필리프가 회장 주변을 완전히 벗어났다. 등 뒤를 따르던 수행원의 질문에 걸음을 멈춰선 그가 잠시 황궁 서쪽을 응시했다.
“연회장 안에 남은 인원이 얼마 정도지?”
“현재 오백여 명 정도 남아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혹시 모를 일격에 대비해 필리프는 베르나 쪽에서 눈치채지 못한 끄나풀 몇을 회장 안에 심어 놓았다. 베르나가 안나에게 손을 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안나의 곁에도 수행원을 붙여 두었지만, 그녀는 그것이 오히려 황녀의 이목을 끌 수 있다는 이유로 수행원을 거둬줄 것을 청했다.
“안나 스완을 침실로 불러와. 지금 당장.”
베르나와 댄스를 추던 순간부터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몰아닥쳤다. 안나의 안전을 위한다는 이유로 황궁 곳곳 인원을 배치해 놓았지만, 오늘은 그 어느 날보다 황궁이 소란스러운 날이었다.
“알겠습니다, 폐하.”
수행원이 즉시 등을 돌려 복도 끝으로 사라지자, 수행원의 뒤를 따르던 황제의 호위병이 황제의 등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필리프가 빠르게 복도를 통과하려는데 복도 저편에서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는 장신의 사내가 보였다.
케이든 아들레드.
초조한 눈빛으로 사방을 둘러보던 그가 뒤를 따르던 시종과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는 것이 보였다. 그대로 발길을 돌리려던 필리프가 빠르게 복도를 가로질러 케이든의 뒤를 따라붙었다.
“멈춰.”
필리프가 간단하게 케이든의 발을 멈춰 세웠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핏발 선 눈으로 제 얼굴을 응시하는 황제와 눈을 맞춘 케이든이 바로 무릎을 굽히며 예를 표했다.
“초청장을 받은 사람만이 참석할 수 있는 연회에, 자네가 어쩐 일이지?”
필리프가 긴 손가락을 대충 까딱거려 케이든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초청장을 받았습니다.”
느리게 답한 케이든이 재킷 안 주머니에서 미색의 편지 봉투를 꺼내 필리프에게로 내밀었다. 가지런한 손가락 사이로 편지 봉투를 받은 필리프가 무성의한 표정으로 봉투 속을 들여다보았다.
“여기 연회가 열리는 시간과 황궁 연회장 위치가 적혀있군. 자세한 지도와 함께.”
“…….”
“설마 글을 읽지 못하거나 지도를 보지 못하는 것을 아닐 텐데, 이곳엔 무슨 일이지?”
“…….”
“이 짧은 질문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아둔한 사내였던가?”
케이든이 시선을 올려 필리프를 바라보았다. 한 점의 온기 없는 새까만 눈동자에 그대로 압도되는 기분이었다. 비스듬히 올라간 입꼬리에 시선을 고정하며 입을 열었다.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 그 사람을 찾던 중이었습니다.”
동요하지 않고 내뱉은 케이든의 답에 필리프가 거칠게 미간을 찌푸렸다.
“폐하께서도 기억하시겠지요. 제가 사랑한다고 말씀드렸던 연인을 찾던 중이었습니다.”
“…연인이라.”
“예. 안나 스완을 찾고 있었습니다.”
미간을 좁히고 케이든의 얼굴을 응시하던 필리프가 실소를 뱉었다.
“이제 자네가 그녀를 만나는 일 따위 없을 거야.”
당연한 사실을 이야기하듯 태연한 말투였다. 케이든이 바로 입을 벌렸지만, 필리프가 손가락 하나로 그의 입을 다물게 했다.
“다시는 자네의 입에서 내 여자의 이름을 듣고 싶지 않다면, 이해가 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