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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51)화 (51/139)

51화

차가운 바닥에서 흐르는 냉기가 온몸에 차곡차곡 고여 드는 느낌이 들었다. 안나가 안간힘을 쓰며 눈꺼풀을 들어 올리려 했지만,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눈꺼풀 전체를 붉고 축축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사지가 축축하게 젖은 것만은 확연하게 느껴졌다. 눈을 뜨려는 시도를 멈춘 안나가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손발을 조금씩 움직여 보았다. 어렵사리 움직인 손가락에 나뭇가지와 젖은 흙이 만져졌다.

여기가 어디지? 설마 이대로 죽어 버린 건가?

싸늘한 바람이 젖은 몸을 때렸다. 지독한 한기에 몸을 움츠리고 싶었지만, 도저히 상체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침을 모아 삼킨 안나가 입술을 떼어냈다.

“…누구…….”

목 안이 있는 대로 부은 것인지, 목소리가 심하게 갈라져 나왔다. 잠시 입을 다문 안나가 두어 차례 숨을 고르고 다시 입을 열었다.

“…누구… 없습니까. 도와주십시오.”

죽을힘을 다해 목소리를 내었지만, 주변은 여전히 고요했다. 허탈한 탄식을 뱉은 안나가 눈을 감기 직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내려다본 물살이 그리 심하지 않았고, 제 주위를 둘러싼 사내들의 시선은 저 멀리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불빛을 향해 있었다. 온몸에 힘을 빼고 축 늘어져 사내들의 의심을 피한 안나가 바로 몸을 일으켜 세우며 바닷물로 뛰어들었다.

‘안 돼!’

케이든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안나를 따라 바닷물에 뛰어드는 순간, 거짓말처럼 물살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케이든이 급물살에 휩쓸린 안나의 몸을 잡으려 손을 뻗어왔지만, 그의 손가락은 안나의 옷자락을 스치며 지나갔다.

희한한 기분이었다. 온몸을 휘감는 차가운 물살이 마치 자신이 가야 할 곳으로 인도해 주는 느낌이 들었다. 허우적거리던 손의 움직임을 멈춘 안나가 온몸에 힘을 풀었다. 눈을 감기 직전, 자신이 더는 물속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캄캄한 어둠 속 조용하게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를 좀 더 자세히 듣고 싶었지만, 들려오는 소리는 말이 아닌 주문 같은 것이었다.

브에사미라 아리사미라

조금씩 목소리가 커졌다. 언젠가 들어본 적 있는 여자의 목소리였다. 목소리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바로 정신을 잃었다.

“…아무도… 안 계십니까.”

정신을 잃기 전 상황을 떠올리던 안나가 다시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제 의지대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서 정신을 잃기 전 목소리를 낸 여자의 도움이 절실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스르르.

간절한 외침을 들은 것인가? 바람이 옷깃을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거기! 거기 계십니까? 거기 계시지요? 제발 도와주십시오!”

입술을 앙다문 안나가 있는 힘껏 손을 뻗었다. 여전히 힘이 실리지 않는 팔이 힘없이 공중에 나부끼는데, 손가락 끝에 부드러운 천이 와닿았다.

“아아아…….”

손가락에 천이 와닿기가 무섭게 온몸에 뜨거운 열기가 찾아들었다. 피부가 지글지글 익는 듯 너무나도 뜨거운 열기였다. 이상한 것은 온몸이 불에 타듯 뜨거운데, 아랫배에는 싸늘하게 찬 기운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이제 선택은 하나뿐입니다.”

어쩐지 조금은 한스러운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고 누군가 차가운 아랫배를 조심스럽게 쓰다듬는 것이 느껴졌다.

“그게 무슨… 대체 누구십니까!”

눈앞이 가물가물하더니 조금씩 시야가 밝아졌다. 바로 코앞에 누군가의 얼굴이 보였지만, 누구인지 쉽게 알아챌 수가 없었다.

“해야 할 선택을 한다고 약속하면, 당신을 돕겠습니다.”

차르르. 눈꺼풀 안쪽으로 밝은 빛이 쏟아져 내리고, 곧 뿌옇게 흐릿하던 시야가 밝아졌다. 눈앞에 있는 여자의 얼굴이 자세히 보이며 어디서 그녀를 보았는지 기억이 났다.

“당신은…….”

필리프와 함께 산에 올랐을 때 약초가 가득한 움집에 있던 여인, 황녀의 유모였던 이레네 칼리프였다. 그녀가 자신에게 해를 끼칠 사람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자 꼼짝할 수 없던 몸에 차츰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지금 이게 대체… 제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

“일어나십시오.”

이레네가 안나의 정수리 아래로 손을 넣어 몸을 일으키는 것을 도왔다. 여전히 온몸으로 느껴지는 뜨거운 열기에 제대로 숨을 내쉴 수가 없었다.

“제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

이레네는 답 없이 안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한참이나 안나의 얼굴에 머물러 있던 그녀의 시선이 천천히 밑으로 내려갔다.

“당신에게서 다른 향이 느껴졌습니다.”

“…예?”

이레네의 시선이 안나의 배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갑자기 정수리가 서늘해지며 쿵, 쿵, 쿵 미친 듯이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무슨 말씀이죠? 제게 다른 향이 느껴졌다니… 그리고 해야 할 선택을 해야 저를 돕겠다는 것이 대체 무슨 뜻입니까.”

이레네가 천천히 시선을 끌어올렸다. 그녀가 양손을 들어 안나의 어깨를 붙잡아 고정했다. 집요하게 마주해오는 서슬 퍼런 눈동자를 마주하자 몸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이제 당신에게 기회는 없습니다. 오로지 하나의 길이 남아있을 뿐입니다.”

“제발 알아듣게 설명해 주십시오.”

이레네가 잡고 있던 안나의 어깨를 놓으며 그녀의 머리를 제 가슴안으로 끌어당겼다. 곧 머릿속이 끓어오를 것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환영을 보기 전에 느꼈던 감각이었다.

머릿속에서 빠르게 진행되는 두 개의 잔상.

지금 현재 안나의 모습과 매우 닮은 여인과 베르나 황녀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절대 걱정하지 마십시오. 황녀님께 절대 피해가 가지 않을 것입니다.’

‘네 동생이 눈치챌 가능성이 있어.’

‘제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비난의 화살이 황제 폐하를 향하도록 할 것입니다.’

‘네가 무사하도록 힘을 쓰겠어.’

베르나를 바라보는 여자의 눈에 담긴 감정은 사랑이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혼란스러운 머릿속 생각을 정리할 시간도 없이 장면이 변환되었다.

‘화, 황제 폐하… 나를 이렇게 만든 사람은 화, 황제 폐…….’

‘…언니! 언니! 눈 좀 떠봐! 제발!’

축 늘어진 여자의 몸을 붙들고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내던 안나가 고개를 들고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브에사미라 아리사미라. 반드시 죗값을 치르게 할게.’

이레네의 품 안에 갇힌 채 안나가 감았던 눈을 떴다.

안나 스완의 언니가 목숨을 잃어가며 뱉었던 말들을 떠올렸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비난의 화살이 황제 폐하에게 향하도록 하겠다는 말을.

만약 안나 스완의 언니가 안나 스완에게 거짓을 말했던 것이라면? 철저히 언니의 이야기만을 믿었던 안나 스완이 잘못된 상대에게 복수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이용한 것이라면.

“그, 그럼 폐하께 언니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 언니의 말이 사실이 아니었다는 것을 모르고…….”

내뱉는 안나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우스운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요. 확실하지 않은 이야기를 믿고 영혼을 팔았으니.”

소리 내지 않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이레네가 커다란 돌 위에 올라서 가부좌를 틀었다.

“폐하를 돕고 싶었으나 이 모든 일을 꾸민 자가 단단한 결계를 쳐 놓아 제가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이 모든 일을 꾸민 자요?”

누군가를 떠올리듯 허공 어딘가를 응시하던 이레네가 고개를 저으며 빠르게 말을 뱉었다.

“지금 모든 것을 일일이 설명해 드릴 시간이 없습니다.”

“그,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하죠? 폐, 폐하의 곁에 돌아갈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이레네의 얼굴에 차가운 빛이 스몄다. 눈치채지 못한 사이 온몸을 뜨겁게 달구던 열기는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결계가 느슨해진 이유는 하나입니다.”

“…….”

이레네의 손가락이 안나의 배를 가리켰다.

“당신의 뱃속에서 숨 쉬고 있는 또 다른 생명.”

온몸에 두려움이 싸하게 번졌다.

“당신이 폐하의 아이를 가졌다는 말입니다.”

“…아이라면.”

안나가 아랫배로 손을 뻗었지만, 차마 배 위로 내려앉지 못한 손이 허공에서 벌벌 떨렸다. 그녀가 세차게 고개를 흔들며 덜덜 떨리는 몸을 웅크렸다.

아이를 가졌다고? 내가? 필리프의 아이를? 온전히 기뻐할 수 없는 상황이 원망스러워 눈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 아이가 당신을 이곳에 머물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게 무슨! 저는 이곳에 머물 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절대 필리프의 곁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레네의 얼굴에 선연한 분노의 감정이 드러났다.

“원래 당신의 삶을 되찾기 위해 더 노력했어야 합니다. 속하지 못한 세계의 삶을 흩뜨려 놓지 말았어야지요.”

“하지만!”

“당신에게 선택할 기회를 주겠습니다.”

공중에 손을 들어 안나의 입을 닫게 한 이레네가 입고 있던 드레스 안쪽에서 작은 약병 하나를 꺼내 들었다.

“폐하께 돌아가게 해 줄 테니, 보름 동안 평소와 다름없는 삶을 사십시오. 그리고 그 마지막 날, 이 약병의 든 약을 마시면 됩니다.”

“이 약을 마시면…….”

“원래 당신의 삶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곳에서의 기억을 간직한 채로.”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 안나가 입을 벌렸지만, 말이 되어 나오질 않았다.

“다른 하나는 지금 당장 이 약을 마시는 것입니다.”

이레네가 태연한 얼굴로 안나의 손에 약병을 쥐여 주었다.

“지금 약을 마시면 당신은 그 즉시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게 되고,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절대 기억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시린 바람이 축축하게 젖은 드레스 틈을 파고들었다. 멍한 얼굴로 입술을 떼어 내지 못하는 안나를 내려다보던 이레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시간이 없습니다.”

“저는…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돌아가지 않고 그의 곁에 머물 방법을 알고 싶습니다.”

몸을 일으킨 안나가 받은 약병을 이레네의 얼굴 가까이 들이밀며 말했다. 약병과 안나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던 이레네가 고저 없는 목소리를 뱉었다.

“저쪽을 보십시오.”

이레네의 손가락 끝이 가리킨 곳에 조금씩 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서서히 까만 어둠이 걷히고 넓은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선박 한 척이 보였다. 선박 정 중앙에 익숙한 카마르 제국의 문양이 보이고 갑판에 오른 필리프의 얼굴이 보였다.

“…필리프.”

어느 한 곳을 집요하게 바라보던 필리프가 급히 활을 내어 활시위를 당겼고, 곧 그가 있는 갑판 위로 불을 매단 횃불이 모여들었다. 나무 갑판에 붙은 불이 선박 전체로 옮겨지는 것은 순간이었다.

안나!!!

자신을 부르는 필리프의 처절한 외침이 날카롭게 귓가를 때렸다.

“안 돼!”

안나가 불이 붙기 시작한 선박이 보이는 곳으로 달려드는 순간 공간에 칠흑 같은 어둠이 찾아들었다.

“폐하를 구할 유일한 방법입니다.”

“…아니야.”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자리에 주저앉은 안나에게로 다가온 이레네가 다시 약병을 내밀었다.

“이제 1분. 곧 선박 전체에 불길이 번지고, 폐하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되겠지요.”

“…제발… 안… 안 돼.”

다시 안나의 손에 약병이 들렸다. 힘없이 약병을 잡은 안나의 손등으로 뜨거운 눈물이 뚝 뚝 떨어졌다.

“저는…….”

목 안쪽에서부터 뜨거운 무언가가 왈칵 솟구쳐 오르며,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저는…….”

후들후들 떨리는 무릎에 힘을 주어 몸을 일으킨 안나가 이레네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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