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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50)화 (50/139)
  • 50화

    필리프는 벌어진 시간의 차이를 따라잡기 위해 라이젠 산 밑 강을 따라 이어진 해안 절벽을 지나는 길을 선택했다.

    “폐하. 길이 미끄럽습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지체하지 말고 앞서가도록.”

    가파른 절벽을 가로질러 거친 가시덤불을 지나야 하는 길이었지만, 항구로 향하는 지름길이었다. 케이든이 바닷길 이외의 길로 도주했을 가능성이 존재했지만, 지금 당장은 도주 가능성이 가장 높은 쪽을 선택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험악한 산길을 걷기를 한참, 눈앞에 완만한 경사의 해안선이 보이기 시작했다. 얕은 강 하나를 건너야 하는 길이었지만, 물살이 세지 않아 강을 건너는 것에 큰 문제는 없었다.

    “폐하. 파이만 제국의 선박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입니다.”

    “우리 쪽 정찰대의 위치는?”

    황제로 즉위하는 즉시 군사력 강화에 힘쓴 필리프는 특히 항구 주변에 많은 병력을 증강 배치했다.

    “현재 위치가 파악되지 않습니다, 폐하.”

    베르나의 술수였다. 이미 정찰대 인원 전부를 매수하고 손을 쓸 수 없게 처리했겠지. 어쩌면 너무 손을 놓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안나와 시간을 보내면서도 국정 일에 무리가 가지 않게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하지만, 베르나의 혼인이 멀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녀를 주시하는 일에 평상시보다 소홀했던 것이 실수였다.

    자신의 안일함을 탓하며 잠시 침음에 잠겨있던 필리프가 선박 앞 움직임을 주시했다.

    “바로 덮치면 움직임을 눈치채고 흩어질 것이다.”

    빠르게 선박을 둘러싼 인원을 헤아린 필리프가 등 뒤 수색병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건너편에 수색 인원이 도착했다는 신호를 받으면 먼저 불화살로 시선을 분산시키도록. 움직임이 조금이라도 분산되면 바로 진격한다.”

    “알겠습니다, 폐하.”

    발각될 가능성을 충분히 염두에 두고 일을 벌였을 베르나였기에 상대가 시간을 버는 것을 막는 것이 먼저였다.

    잡아 두었던 산새 한 마리가 공중으로 날아오르며 건너편 기슭에 수색대가 도착했다는 신호를 보냈다. 필리프가 공중에 손을 들어 올리자, 하늘 위로 불꽃을 매단 화살촉 하나가 솟아올랐다.

    불꽃을 눈치챈 이들이 하나둘 불꽃의 방향을 따라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때 반대쪽 하늘 위로 다시 화살촉이 떠올랐다. 선박을 둘러싼 인원들이 허둥지둥 무기로 손을 뻗으며 흩어지기 시작함과 동시에 동시다발적으로 화살을 날렸다.

    즉시 몸을 일으킨 필리프가 어둠 속에 모습을 드러냈다. 횃불 아래 그가 입은 외투의 문양을 읽은 사내들이 주변을 돌아보며 뽑아 들었던 무기를 거두었다.

    “황제 폐하.”

    몇몇 사내들이 필리프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예를 갖추는 사이, 반대쪽에 있던 수색대가 삽시간에 커다란 선박 곳곳을 둘러쌌다.

    “이 밤에 항구엔 무슨 일이지?”

    비단 재킷을 걸친 남자가 고개를 숙인 사내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파이만 제국의 마이르 라인발트입니다.”

    파이만 제국 라인발트 백작 가의 차남인 마이르는, 제국을 방문한 인원 중 타론 대공을 제외하고 가장 지위가 높은 이였다.

    “마이르 경이 이곳엔 어쩐 일이지? 황궁에서 연회를 즐기리라 생각했는데.”

    “타론 대공이 폐하께 드리려 했던 선물을 잊었다고 전하셨습니다. 대공이 내일 오전 중으로 전해드리고 싶다 하여 급히 항구를 찾았습니다.”

    마이르가 등을 돌리자 그의 등 뒤에 서 있던 사내들이 커다란 상자를 들고 필리프의 앞에 다가섰다.

    “대공께서 직접 전해 드리고 싶다고 하신 선물입니다.”

    실소를 삼킨 필리프가 상자를 내려다보며 답했다.

    “경도 알겠지만, 우리 제국의 항구를 이용하려면 정찰대의 허가가 필요한데.”

    “여기, 허가증입니다.”

    마이르가 기다렸다는 듯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필리프의 등 뒤에 서 있던 수색병이 종이 위로 횃불을 비춰 주었다. 종이에는 황제가 직접 만든 수색대의 낙인이 찍혀 있었다.

    밤중에 항구를 찾은 이유와 수색대의 허가를 받았음을 인정하는 증서가 분명히 존재하니 더 마이르를 잡아 심문할 이유가 없었다. 충분히 피해 나갈 방법을 마련해 놓았으리라 예상한 만큼, 기다렸다는 듯 내뱉는 답에 당황하지는 않았다.

    “폐하. 이쪽입니다!”

    필리프가 모여 있는 인원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마이르를 제 앞에 묶어놓은 이유는 자신의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다. 필리프의 맞은편에서 선박 쪽을 수색하던 수색대장이 공중으로 깃발을 들어 올렸다.

    “요즘 항구를 드나드는 타 제국의 정찰선이 늘어나고 있어.”

    필리프가 선박 쪽으로 발을 돌리며 말했다.

    “이에 정찰 인원을 늘렸는데, 안타깝게도 파리 새끼를 배치했던 모양이야.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으니.”

    필리프가 정찰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항구 우측을 바라보며 싸늘하게 내뱉었다.

    “지금 저희 선박을 조사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나에게 직접 선물을 전해주기 위해 이 늦은 밤 항구를 찾으라 말한 대공인데, 이 정도 일이야 너그러이 이해해 주지 않겠는가?”

    “저희가 카마르 제국으로부터 정식적인 초청을 받아 방문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필리프가 호락호락하게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이는 마이르의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발소리가 멈추고 필리프가 제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자 마이르가 내쉬려던 숨을 멈추었다. 가까이서 마주한 필리프에게서 압도적인 존재의 위압감이 느껴졌다.

    “카마르 제국의 마지막 전쟁을 기억하는가.”

    낮고 음산한 목소리가 울렸다. 다시 한 걸음, 필리프가 전진하자 반사적으로 마이르가 뒤로 몸을 물렸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떠올리듯 필리프의 눈썹이 느릿하게 들렸다.

    “프랑크. 힘없는 약소국이 조금씩 세력을 키우고 영토를 넓히더니, 결국 우리 제국에 침입해왔지.”

    필리프는 황태자 시절부터 공격적으로 군사력을 늘려갔던 프랑크 제국을 경계할 것을 주장해왔지만, 선왕은 그런 아들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고 주변국과 평화적인 동맹을 맺을 것을 선언했다.

    “약 5만의 연합세력을 야금야금 끌어모아 우리 제국에 쳐들어왔지. 황궁 전체가 포위당했던 만큼 모두 우리 제국이 패배할 것으로 생각했었어.”

    점점 날을 세우는 필리프의 눈빛에 마이르의 몸이 바짝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결과는 우리의 승리였지. 카마르의 최정예 군사를 얕잡아 본 결과였어.”

    보름이 넘는 혈전이 이어졌고, 5만의 하이만 연합세력은 채 2만이 되지 않는 카마르 정예군에게 거의 몰살당하게 되었다. 그런 카마르 정예군의 선두에는 신분을 감추고 전투에 참여했던 필리프 마티어스가 있었다.

    “내 뒤통수를 칠 생각이라면 일찌감치 접는 편이 좋을 거야.”

    필리프가 단단히 굳어 있는 마이르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필리프의 건조하고 담담한 말투가 그대로 숨통을 조여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광산 채굴권을 넘겨받은 지금, 내가 파이만 제국의 눈치를 볼 일이 뭐가 있겠는가.”

    “폐하의 여동생은 파이만 제국의 황후가 될지도 모르는 분입니다. 여동생과 적을 지겠다는 말씀입니까.”

    이번에는 참지 못한 실소가 필리프의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어차피 실제 피를 나눈 사이도 아닌데, 서로의 끈끈한 정 따위를 기대한 것은 아니겠지?”

    “…….”

    “내가 직접 칼을 빼는 일만은 만들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

    더 나눌 이야기가 없다는 듯 필리프가 마이르의 어깨를 스치며 발을 떼어냈다. 마이르의 등 뒤에 서 있던 사내 몇이 주춤 필리프의 앞으로 다가섰지만, 서슬 퍼런 필리프의 기세를 이겨내지 못하고 조금씩 몸을 물렸다.

    “폐하.”

    필리프와 마이르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선박 주변 정찰을 끝낸 수색대가 필리프의 앞으로 모여들었다.

    “선박은 전혀 출항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지만, 선박 주변에 배가 떠난 흔적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리 크기가 크지 않은 선박으로 보입니다.”

    이어지는 수색대의 보고를 듣던 필리프가 정박한 선박 안으로 수색 인원을 배치하고 잠시 말을 멈추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할 작은 배를 타고 시야에서 사라졌다면, 배를 따라잡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베르나가 얼마나 많은 수의 인원을 매수했느냐였다.

    “인접국 전체에 서찰을 보낼 테니 준비하도록.”

    “예, 폐하.”

    “그리고 지금 바로 출항할 수 있는 선박을 마련하도록 해. 갑옷과 무기를 준비하고.”

    “알겠습니다, 폐하!”

    수색대에 지시를 내린 필리프가 준비된 가죽 갑옷을 덧입으며 선박에 탑승했다. 때가 여름인 것이 다행이었다. 이른 해가 뜨면 수색이 좀 더 수월해질 테니, 그때까지 누군가 자신들을 쫓고 있다는 사실을 똑똑히 알아채게 해야 했다.

    “폐하. 파이만 제국 쪽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항구 주변에 흩어져 있던 파이만 제국 사람들이 일제히 항구를 떠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얼어붙은 필리프의 눈동자에 악이 서려 있었다. 황제의 눈빛을 확인한 수색 대장이 바르르 몸을 떨었다. 프랑크 제국과의 혈전 이후 처음 마주하는 황제의 살기 어린 눈동자였다.

    호위병에게 받은 편지지에 빠르게 글을 써 내려간 필리프가 수색 대장의 손에 편지지를 건네며 말했다.

    “당장 기마병에게 전해. 무슨 일이 있어도 해가 뜨기 전에 서신을 전달해야 해.”

    “알겠습니다, 폐하.”

    배가 급히 출항 준비를 마치고, 갑옷과 투구를 갖춰 입은 필리프가 갑판에 올랐다. 항해사의 바로 옆에 자리한 필리프가 칠흑 같은 어둠을 가만히 응시했다. 사방을 제대로 분간할 수 없는 어둠 속에 잔잔한 파도 소리만이 이따금 귓가를 때렸다.

    “모두 주변의 움직임을 주시하도록.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놓쳐서는 안 돼.”

    “알겠습니다, 폐하.”

    필리프가 허리춤 칼집에 올려져 있던 손을 재킷 주머니로 옮겼다. 주머니 안에서 언젠가 안나가 제 방에 두고 갔던 낡은 손수건 한 장이 잡혔다.

    안나 스완.

    속으로 안나의 이름을 읊조린 필리프가 잡은 손수건을 들어 코끝에 가져다 댔다. 손수건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안나의 체향을 있는 힘껏 들이마셨다. 머릿속에 차오르던 거친 분노가 조금씩 사그라지면서 그녀와 함께 한 시간이 하나둘 떠올랐다.

    안나와의 기억을 떠올리던 필리프가 단번에 얼굴에 미소를 지우며 칼집으로 손을 옮겼다. 꼼짝하지 않고 머물러 있을 것 같던 어둠이 걷히며 사방에 어슴푸레한 빛이 섞여들고 있었다. 필리프의 시선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한군데에 고정되어 있었다.

    “폐하.”

    “쉿!”

    수색대원의 입을 막은 필리프가 둘러메고 있던 활로 손을 옮겼다. 빠르게 표적을 조준한 그가 활시위를 당기는 순간, 붉은빛을 매단 화살촉 서너 개가 한꺼번에 갑판 위로 쏟아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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