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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49)화 (49/139)
  • 49화

    필리프가 수상한 낌새를 눈치챈 것은 베르나의 두 번째 댄스 신청 때문이었다.

    “한 곡으로 끝내기에는 너무 아쉽지 않으십니까? 저희를 바라보고 있는 수많은 이들에게 마지막으로 우애 좋은 남매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요.”

    베르나가 필리프의 손을 놓지 않은 채로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녀에게서 상체를 떼어 낸 필리프가 등 뒤 수행원에게 눈짓을 보냈다.

    “우리의 우애는 이미 충분히 보여준 것 같은데? 그만 그대를 기다리는 이에게 돌아가야지.”

    필리프가 타론 대공을 슬쩍 돌아보며 말했다. 타론 곁에 서 있던 시종이 그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이는 것이 보였다.

    “그럼 충분히 즐기고 돌아가도록 해.”

    “정말 이대로 자리를 떠나려 하십니까.”

    베르나는 평소와는 달리 끈질기게 필리프의 곁을 따라붙었다. 필리프가 베르나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숨길 수 없는 초조함을 드러내듯 그녀가 시선을 피하며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내가 더 자리하지 않아도 될 것 같군.”

    “폐하!”

    필리프가 제 재킷을 잡으려 뻗어오는 베르나의 손을 쳐내며 그녀에게서 빠르게 등을 돌렸다. 평정심을 잃은 검은 눈동자가 불안하게 일렁거렸다. 급히 연회장을 벗어난 필리프가 등 뒤를 바짝 따라붙는 수행원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안나 스완을 불러와. 지금 당장!”

    “알겠습니다, 폐하.”

    주변 시선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당장 확인해야 할 것은 안나의 안전이었다.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려 재킷 자락을 꾹 움켜쥔 필리프가 걸음의 방향을 바꾸며 주변 호위병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당장 황궁 수색대를 소집하고 마차를 준비해.”

    “예, 폐하!”

    황궁 동쪽 출입구로 향하기 직전, 필리프가 고개를 틀어 연회장 안을 들여다보았다. 열린 문틈 사이로 베르나와 타론 대공의 모습이 보였다. 고개를 바짝 맞대고 이야기를 주고받는 두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 때 수행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폐하. 안나 스완의 모습이 보이질 않습니다.”

    “뭐?”

    칼날 같은 필리프의 시선을 받은 수행원이 꿀꺽 마른침을 삼키고 말을 이었다.

    “연회 음식을 준비한 주방 시종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지만, 안나 스완의 모습만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그녀와 마지막으로 함께 있었던 시종의 말을 들어 보았는데…….”

    잠시 말을 멈춘 수행원이 망설이듯 주위를 돌아보았다.

    “케이든 기사와 함께 있었다고 합니다.”

    “…케이든?”

    안나와 자신은 사랑을 맹세한 사이라 뻔뻔하게 내뱉던 케이든과, 자신은 절대 케이든을 따라가지 않을 것이라 말하던 안나의 얼굴이 번갈아 떠올랐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마음을 주었던 시종에게 배신당한 아버지의 모습과 지금 자신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케이든이 연회엔 어쩐 일이지? 연회는 초대장을 받은 귀족만이 자리할 수 있었던 것 아닌가?”

    “저, 그것이…….”

    우물쭈물 말을 잇지 못하는 수행원의 입을 다물게 한 필리프가 빠르게 물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케이든이 어찌하여 황궁 연회에 참석했는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의 행방이 모두 파악되지 않는다?”

    “두 사람이 잠시 이야기를 나누겠다고 전했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황궁 밖으로 빠져나간 것으로 보입니다.”

    “그녀가 제 발로 케이든을 따라 나갔다는 이야기인가?”

    수행원이 입술이 달싹이다가 답 없이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폐하, 마차가 준비되었습니다.”

    필리프가 그 자리에 멈춰서 생각을 정리했다. 안나가 자신의 믿음을 배반하고 황궁이 시끄러운 틈을 타 케이든과 도주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었지만, 아직은 그렇게 믿고 싶지는 않았다. 이 모든 일의 배후에 베르나가 있다는 강한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 출항이 가능한 항구가 몇 곳이지?”

    “파이스 항구와 마린 항구입니다.”

    “지금 당장 두 곳으로 수색대를 보내도록.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자가 있으면 그 자리에서 체포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폐하.”

    도주로를 차단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광산 건설 문제로 도시 곳곳이 막혀 있는 지금, 항구는 가장 손쉬운 도주로였다. 문제는 파이만 제국의 선박이었다. 타론 대공은 총 다섯 척의 선박을 이끌고 제국을 방문하였는데, 자신이 직접 초청한 대공이 소유한 선박을 마음대로 수색할 명분이 없었다.

    하, 이번에는 꽤 머리를 썼군. 제대로 된 덫을 쳐 놓았어.

    조소를 뱉은 필리프가 다시 한번 연회장을 돌아보았다. 안나와 케이든의 도주가 오직 한 사람만의 의지였는지 확인할 수 없게 만듦과 동시에, 타론 대공을 끌어들여 빠져나갈 구멍을 확실히 마련해 놓은 것이었다.

    동쪽 출입구로 향하는 필리프의 발걸음에 점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머릿속이 복잡하게 엉켰지만, 이럴 때일수록 일의 선후를 정해 처리하는 것이 정석이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안나를 찾는 일이었다.

    * * *

    마차가 속도를 높여 날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케이든이 안나의 허리를 잡아 붙들어 심하게 흔들거리는 마차의 진동을 막아 주었다. 가뜩이나 불안한 머릿속이 까무룩 잠겨 들기 직전이었지만, 안나가 제 허벅지 안쪽을 꼬집으며 정신을 다잡았다.

    마차 안의 덜컹거림이 잦아드는 것으로 보아 목적지가 머지않았다는 것이 느껴졌다. 팔을 들어 케이든의 어깨를 밀어낸 안나가 입을 열었다.

    “…놓아주세요.”

    안나가 케이든에게서 조금씩 몸을 물렸다. 온몸에 조금도 힘이 실리질 않았고, 목구멍은 아프게 따끔거렸다. 바로 안나의 어깨를 잡은 케이든이 그녀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정신이 드십니까.”

    “저는 이대로 떠날 수 없습니다.”

    안나가 케이든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살짝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단호한 말투였다.

    “안나.”

    “만일 이대로 떠난다면, 제가 절대 기사님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말없이 안나의 이야기를 듣던 케이든이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얼굴에서 망설이는 기색을 읽은 안나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제가 기사님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간혹 예전 기사님과의 시간이 떠오를 때가 있지만.”

    잠시 말을 멈춘 안나가 가슴 왼쪽에 손을 얹었다.

    “가슴이, 마음이 반응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반드시 기억해 낼 것입니다! 우리의 시간은 단단했습니다. 그대는 분명 나를…….”

    케이든이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안나가 고개를 짧게 저었다. 간절한 표정으로 안나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케이든의 표정이 서서히 무표정으로 변해갔다.

    “저를 납치하려 하셨다는 사실만큼은 똑똑히 기억하게 되겠지요.”

    무장한 호위병들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에서 홀로 빠져나갈 방법은 없었다. 유일한 수는 케이든을 설득하는 일. 그가 원래의 안나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했다는 사실에 기대를 걸어 보는 수밖에 없었다.

    귓가에 울리던 노인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혼이 불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 잠시 이 몸을 떠나 있었던 원래의 혼이 제 몸을 차지한다면, 순순히 이 몸을 떠나 원래의 몸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방법을 찾아야 했다. 마음을 내준 상대의 곁에 머무를 방법을.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저도 기사님을 원망하고 싶지 않으니, 저를 황궁으로 돌려보내 주십시오.”

    케이든의 손을 잡은 안나가 간절하게 호소했다. 형형했던 그의 눈빛이 미세하게 풀어지는 것을 느끼는데 마차의 휘장이 걷혔다.

    “출항 준비되었습니다. 이제 배에 옮겨 타십시오.”

    마차의 검은 휘장을 걷은 사내가 다급히 말을 전했다. 사내의 말투는 황궁 사람들과 묘하게 차이가 있었고, 걸치고 있는 외투에 새겨진 문양도 낯선 것이었다. 재킷에서 꺼낸 작은 꾸러미 하나를 사내의 손에 건넨 케이든이 마차 휘장을 완전히 걷어내며 상체를 세웠다.

    “알겠소.”

    “기사님!”

    안나가 케이든의 재킷 자락을 붙들어 사정하는 눈빛을 보냈지만, 그가 내린 결론은 단호했다.

    “당신에게 용서받을 방법을 찾겠습니다. 기다림의 시간이 길지 않게 하겠습니다.”

    “잠시만!”

    안나가 등을 돌리는 케이든을 향해 손을 뻗음과 동시에 신발로 손을 뻗었다. 신발 안쪽에 실로 매달아 감춘 단검을 손바닥에 쥐기가 무섭게, 건장한 사내 두 명이 마차 안으로 손을 뻗었다.

    “이 손 놓으십시오!”

    안나가 발버둥을 치며 잠시 시간을 벌고, 그 사이에 손바닥 안 단도를 가슴 안쪽에 감췄다. 곧 단단한 손이 안나의 양손을 결박하듯 잡고 마차를 빠져나오게 했다. 마차를 나서자마자 비릿한 바다 향이 느껴졌고, 집채만 한 크기의 커다란 선박이 시야에 들어왔다.

    커다란 선박 앞에는 약 열 명의 건장한 체구의 사내들이 자리했는데, 모두 황궁에서 본 것과 다른 가죽 갑옷을 입고 있었다. 가죽 갑옷에는 파이만 제국의 포효하는 표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안나가 급하게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그 어디에도 도움을 구할 곳이 없었다.

    “소란을 떨면 이것을 입에 물리겠소.”

    안나가 입을 벌리려는 순간 그녀의 오른쪽 팔을 움켜쥔 사내가 들고 있던 나무 재갈을 내밀었다. 안나의 앞에 선 케이든은 좀 전 마차의 휘장을 걷은 사내가 입고 있던 것과 비슷한 종류의 외투를 걸치고 있었다.

    사내들이 멈춰선 곳은 눈앞에 보이는 커다란 선박이 아닌 그 뒤쪽의 작은 돛단배였다.

    “자, 내 손을 잡으십시오.”

    빠르게 돛단배에 올라탄 케이든이 안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잠시 숨을 멈추며 생각을 가다듬은 안나가 케이든이 내민 손바닥 위에 손을 얹었다.

    어차피 지금 당장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도, 단도 하나로 배에 탄 사내들 전부를 없애는 것도 불가능했다. 사람이 많지 않은 배에서의 탈출을 노리는 수밖에 없었다.

    배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바닷물에 뛰어들어야 해. 무모한 방법이지만 당장은 그 방법밖에 없어.

    돛단배에 올라탄 안나가 수면을 내려다보았다. 물살이 그리 세지 않아 보이는 것이,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었다.

    “시야를 가릴 수 있어 배가 항구를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는 눈에 띄지 않을 것입니다.”

    “안전거리까지 시간은 얼마나 걸리겠는가.”

    “물살을 살펴봐야 하겠지만, 약 한 시간 정도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배가 느릿하게 항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안나가 양옆에 바짝 자리한 사내 두 명의 시선이 잠시 자신에게서 떨어지길 기다렸지만, 쉽사리 기회가 나질 않았다. 초조함에 입술 안쪽이 바짝 말라 갔다.

    더 시간이 흐르면 물살이 세지고, 달아날 기회 자체를 놓칠 수도 있어.

    주변을 살피는 사내들을 차례로 돌아본 안나가 죽을힘을 다해 사내들의 손을 뿌리치는 순간, 저 멀리 어둠 속에 희미한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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