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48)화 (48/139)
  • 48화

    의식이 흐릿했다. 안나가 두 눈에 힘을 주며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려보았지만, 사방은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 그대로 정신을 놓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어쩌면 꿈이 아닐까? 그래. 어쩌면 너무나 생생한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몰라. 안나가 눈꺼풀에 힘을 주며 사력을 다해 눈을 부릅뜨려 애썼지만, 눈앞은 여전히 빛 한줄기 보이지 않는 어둠이었다.

    온몸 어느 곳에도 쉽게 힘을 실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온몸에 한기가 돌고, 살아 있는 것이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때 달그락달그락 울리는 말발굽 소리가 들렸고, 덜컹거리는 마차의 진동이 느껴졌다.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에 안심한 안나가 코로 깊게 심호흡하며 아랫입술을 아프게 깨물어 흐려지는 의식을 다잡았다.

    “선박은 준비되었겠지.”

    “예. 황녀님께서 서쪽 마린 항구에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날이 좀 더 기울기를 기다렸다 바로 출발하겠네.”

    식은땀이 흘러 온몸이 젖어 들고 숨이 턱턱 막혀 숨을 쉬는 것조차 힘겨웠다. 안나가 살짝 손발을 움직여보았지만, 다행히 대화 중인 사람이 자신의 움직임을 눈치챈 것 같지는 않았다.

    “연회 때문인지 주변이 소란스러운 것이 다행입니다. 큰 문제 없이 오늘 안으로 제국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파이만 제국 쪽 사람들과의 접선은?”

    “샤를 강 앞에서 대기 중입니다.”

    안나가 들려오는 목소리에 주의를 기울였다. 케이든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내 한 명이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조금씩 주변의 소음이 잦아드는가 싶더니, 마차 안 덜컹거림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저, 아무래도 제국을 벗어날 때까지는 확실히 해두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아니. 약은 쓰지 않겠어.”

    케이든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소란을 떨지 않고 안나를 황궁 밖으로 빼내기 위해 소량의 마취 성분이 있는 약초를 사용해야 했다. 그녀의 몸에 무리가 가지 않을 정도의 양이었다.

    “하지만 약초의 효과가 그리 오래 가지 않아, 곧 정신을 차릴 것입니다.”

    “선박에 옮겨탈 때까지 깨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수밖에.”

    바로 얼마 전까지 사경을 헤맬 정도로 호되게 앓았던 그녀의 몸에 더 무리가 가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안나의 얼굴을 내려다본 케이든이 짧은 한숨을 뱉었다.

    “하지만 혹시라도 여자가 소란을 떤다면 제가 먼저 손을 쓸 것입니다.”

    경고를 담은 서늘한 목소리였다. 베어 문 안나의 입술 끝에서 피가 새어 나왔다. 눈을 떠 주변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검은 천이 얼굴 전체를 덮고 있어 제대로 된 상황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저쪽에 마차가 보입니다. 제가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그래.”

    급하게 달리던 마차가 점차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고, 곧 누군가 마차를 나서는 것이 느껴졌다. 의식을 차렸다는 것을 케이든이 눈치채게 해서는 안 된다. 안나가 최대한 고르게 호흡하며 경직된 몸에 힘을 풀었다.

    “미안합니다. 나도 이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뜨끈한 숨결이 안나의 오른쪽 뺨에 와 닿고, 곧 미지근한 온도를 지닌 손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케이든의 손끝이 얼굴에 닿는 순간 온몸의 솜털이 바짝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당신이 기억을 되찾고, 내 행동을 용서… 아니 이해해 주는 날이 오기를 기다리겠습니다.”

    케이든의 단단한 손바닥이 안나의 목덜미 밑을 조심스럽게 파고들었다.

    “예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당신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당장 자신을 안은 케이든의 손을 뿌리치고 싶었지만, 안나는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며 상황을 반전시킬 방법을 궁리했다.

    분명 황녀가 마련한 선박이라고 했으니, 이 모든 일의 배후에 황녀가 있다는 거야. 또 파이만 제국 쪽 사람들과 접선한다는 것으로 보아 황녀가 제 결혼 상대인 타론 대공의 도움을 받았다는 뜻이겠지.

    안나가 자신의 목에 날카로운 칼을 들이밀고, 독성이 있는 약을 먹이려 했었던 베르나를 떠올리며 치를 떨었다.

    반드시, 어떻게든 벗어나야 해.

    자신이 케이든과 함께 황궁을 나선 것이 확인된다면, 필리프는 분명 자신이 그를 배신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원래 자신이 살아왔던 삶을 깨끗이 포기하면서까지 함께하려 했던 필리프와의 삶이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놓아 버릴 수는 없었다. 의심하지 않고 케이든을 덜컥 따라나선 것이 실수였지만, 소용없는 후회를 곱씹을 시간이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선박에 옮겨타는 것만은 막아야 했지만,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만일 지금 케이든을 따돌리고 마차를 빠져나간다고 하더라도 홀로 처해있는 상황을 벗어나는 것은 무리였다. 선박에 타기 전 사람들이 방심한 틈을 타 달아날 방법을 찾아야 했다. 만일 이대로 제국을 벗어난다면, 영영 이곳으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머리를 굴리던 안나는 문득 신발 안쪽에 숨겨 두었던 손가락 정도 크기의 단도를 떠올렸다. 얼마 전 필리프가 자신에게 주었던 집게손가락 크기 정도의 검이었다.

    ‘왜 저에게 칼을 주십니까?’

    ‘이 정도 크기라면 언제라도 몸에 지니고 다닐 수 있지 않겠어?’

    ‘…제가 이 칼을 쓸 날이 올까요?’

    ‘물론 그런 날이 오지 않는 것이 좋겠지만, 내가 언제나 네 곁에 머물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필리프는 안나에게 친절히 단번에 사람의 목숨을 끊을 수 있는 급소를 가르쳐주고 직접 시범을 보여주었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무시한 말을 내뱉는 필리프의 얼굴을 바라보며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으니, 그가 곧 입가에 따스한 미소를 매달았다.

    ‘네 곁에 시종을 붙이는 것을 거절했으니, 이 정도는 허락하겠지?’

    ‘…예.’

    ‘감출 곳은 신발 안쪽이 어때? 발목이 워낙 가늘어 충분히 공간이 생길 것 같은데.’

    필리프가 안나의 발목을 손바닥에 잡아 가두며 물었다. 그의 손길 한 번에 발가락이 하얗게 오므라들어, 슬금슬금 그에게서 몸을 물리며 답했다.

    ‘…선물 감사합니다.’

    ‘선물? 진짜 선물은 따로 있는데?’

    안나는 입술에 닿았던 따뜻한 온기를 떠올렸다. 입술과 뺨을 쓸고 내려가, 가슴과 배 허벅지 안쪽, 종아리, 무릎 뒤쪽의 연한 피부에 차례로 닿았던 필리프의 숨결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어지럽게 쿵쾅거리던 심장이 진정되고 거짓말처럼 몸의 떨림이 잦아들었다. 안정감을 느끼는 것도 잠시, 다시 낯선 이의 음성이 들렸다.

    “항구로 향하는 마차가 준비되었습니다. 어서 옮겨 타시지요.”

    안나의 뒤통수와 허리에 손을 넣은 케이든이 그녀의 몸을 공중에 들어 올렸다. 마차를 빠져나가니 후끈한 여름밤 공기가 안나의 드레스 틈을 파고들었다.

    “저쪽입니다.”

    안나를 안은 케이든이 새로운 마차로 이동했다. 단단한 그의 무릎에 고개를 놓음과 동시에 얼굴을 가린 검은 천이 벗겨졌다.

    “잠시만 참으십시오.”

    얼굴 근육이 움직이지 않도록 안간힘을 써야 했다. 여전히 탈출할 방법을 궁리하며 안나가 일정한 호흡을 뱉어냈다. 얼굴 전체에 와 닿던 뜨거운 호흡이 조금씩 멀어지고 천이 마찰하는 소리와 함께 케이든이 어떤 사내와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만약 황제의 끄나풀에게 덜미를 잡힌다면 미리 준비한 내용을 읊도록 하시오. 절대 우리 쪽 도움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서는 안 됩니다.”

    “황녀님과 굳게 약조하였으니 걱정하지 마시오.”

    “만일 이 사실이 새어 나간다면, 보복은 오직 당신만을 향해있지는 않을 것이오.”

    “알겠소. 그럼 이만 출발하지.”

    케이든의 목소리를 끝으로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살짝 눈을 뜨고 상황을 살펴보려는데, 케이든의 손끝이 안나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기 시작했다. 톡, 톡톡, 톡톡톡. 그의 손끝이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순간이었다.

    ‘시간이 좀 필요합니다.’

    ‘확실히 구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어렵지만, 최선을 다 해보겠습니다.’

    안나의 턱을 매만지던 케이든의 손끝이 지금과 같은 리듬으로 움직였다. 케이든의 얼굴을 올려다보던 안나가 시선을 떨구며 말했다.

    ‘기사님은 여전히 제게 아무것도 묻지 않으시는군요.’

    ‘내게 필요한 사람은 당신뿐입니다. 그런 당신에게 필요한 것이라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구해주는 것이 당연합니다.’

    아주 빠르게 장면이 전환되고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장소가 보였다. 케이든과의 두 번째 만남이 있었을 때 석상 틈을 통과해 도착했던 어두운 동굴 같은 공간이었다. 어두컴컴한 공간에 서 있던 케이든이 재킷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안나의 얼굴 앞으로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이름을 알아냈습니다. 오피르수스. 이 이름을 기억하십시오.’

    ‘…감사합니다, 기사님.’

    안나의 손에는 커다란 크기의 미색 보자기가 들려 있었다.

    어? 저거, 언젠가 본 적이 있는 보자기인데. 어디에서 봤지? 안나가 필사적으로 보자기를 보았던 순간을 떠올려보았다.

    ‘억겁과 같은 시간의 흐름을 버티고 버터야 한다.’

    ‘상황을 의심하지 말고, 시간의 변화에 쉽게 적응할 수 있는 유연함을 가진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두고 온 삶에 큰 미련이 남지 않으려면, 적게 가지고 태어나 절대 많은 것을 가질 수 없는 삶이어야 하겠지.’

    꿈에서였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뱉으며 노인에게 미색 보자기를 건넸던 안나, 그리고 보자기에 담긴 내용물을 빛을 향해 던지고 바로 소년의 모습으로 변하던 노인의 모습이 생생히 떠올랐다.

    ‘편히 잠들거라. 너의 혼이 다시 불릴 때까지.’

    집중해야 했다. 이대로 정신을 놓아버리면 또 의문만을 남긴 채 사라져 버릴 환영이었다. 걷잡을 수 없는 피로가 몰려왔지만, 안나는 안간힘을 쓰며 버텨내려 애썼다.

    눈가에 희미한 빛이 스며들고, 곧 꿈속에서 보았던 소년의 얼굴을 한 노인의 모습이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던 소년이 안나를 향해 고개를 틀었다. 그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지더니, 매끈했던 그의 피부 이곳저곳에 굵은 주름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핏기가 사라진 입술이 살짝 벌어지고 서슬 퍼런 검은 눈동자가 안나의 얼굴에 직선으로 와 꽂혔다.

    ‘얼마 남지 않았구나. 네 혼이 다시 불릴 날이.’

    시뻘겋게 충혈된 노인의 두 눈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치는 순간 안나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