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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47)화 (47/139)

47화

지휘자의 손끝을 바라보고 있던 악사들이 아름다운 선율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바이올린과 에피네트, 하프의 어울림이 절정에 달했을 때, 타론 대공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베르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커다란 연회장 안 사람들의 시선이 화려한 보석으로 장식된 진줏빛 풀 드레스를 입은 베르나에게 집중되었다. 계단을 내려온 베르나가 악사와 짧게 시선을 교환했고, 곧 악사들이 변주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콜먼 백작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보인 베르나가 나붓한 동작으로 턴을 돌아 춤을 추기 시작했다. 드레스 곳곳에 촘촘히 박힌 보석이 샹들리에 불빛에 반사되어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폐하. 꿀벌 주가 준비되었습니다.”

“황녀의 테이블에 가져다 놔.”

“예, 폐하.”

카마르 제국 황가 사람의 결혼과 관련된 행사에는 늘 꿀벌 주가 함께했는데, 이 술이 신혼부부의 영원한 사랑의 맹세를 교환하는 술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춤을 추는 베르나 황녀와 타론 대공의 모습은, 서로가 열렬한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게 만들었다. 삼 분 정도의 곡이 끝을 향해갈 때쯤 타론 대공이 아쉽다는 듯 고개를 돌려 지휘자를 바라보았고, 그런 그의 마음을 눈치챈 지휘자가 곡이 끝나기 전 다시 음악을 변주했다.

“너무 길어.”

감흥 없는 눈동자로 베르나와 타론 대공의 댄스를 감상하던 필리프가 꿀벌 주가 아닌 사과주가 담긴 잔을 들어 입술을 적셨다. 향긋한 사과 향이 입안에 퍼지니, 자연스럽게 안나와 함께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우왓. 이 술은 엄청나게 맛있어요!’

처음 안나를 침실로 불렀을 때만 하더라도 술은 거의 입에도 대지 못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생각보다 그녀는 훨씬 술을 즐기는 편이었다. 함께 시간을 보내며 술을 권하면 거절하지 않았고, 자신보다 훨씬 빨리 술잔을 비우고 더 달라는 듯 술병을 향해 진득한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이제 보니까 독한 술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예? 이게 독하다니요. 그냥 향긋하기만 한걸요.’

홀짝홀짝 잔을 비워가는 안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은 필리프는 다음 날 파이르 영주를 통해 황궁에 사과주를 대량으로 공급할 것을 지시했다.

“폐하. 단상에 오를 시간이십니다.”

필리프가 한참 안나를 떠올리며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데, 그의 등 뒤에 서 있던 수행원이 댄스 플로어 바로 옆 단상을 가리키며 말을 전했다.

“어, 그래.”

귓가를 울리는 음악 선율이 멈춰 있었고, 베르나와 타론이 단상에서 내려와 그들을 위해 준비된 테이블로 이동하는 모습이 보였다.

술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선 필리프가 단상으로 걸어가며 꺼내야 할 말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앞으로 베르나의 결혼식과 피로연에서 또 한 번씩 반복해야 할, 두 사람의 앞날을 축복하는 의례적인 축하 인사였다.

“황녀의 결혼 전 함께 하는 마지막 연회에 참석해 준 모든 이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겠소.”

모두에게 제공된 꿀벌 주 잔을 든 귀족들이 황제의 얼굴로 시선을 고정했다. 차분한 표정의 필리프가 말을 이었다.

“그 어떠한 고난과 역경에도 변함없는 신뢰와 사랑을 약속하라는 말은 하지 않겠어. 어차피 결혼식 때 맹세해야 할 부분이니.”

필리프의 시선이 베르나와 타론에게로 향했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어주길 바라겠소.”

짧은 인사말을 전한 필리프가 들고 있던 술잔을 공중으로 들어 올리자, 필리프를 바라보던 귀족들이 모두 일제히 술잔을 높였다.

길었던 저녁 식사도 끝났고, 황녀를 위한 인사말도 전했으니 이제는 굳이 자리를 계속 지키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술을 마신 귀족들이 한데 어울려 왈츠를 즐기는 시간을 이용하기로 한 필리프가 악사의 연주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단상을 벗어난 필리프가 악사들이 향한 곳으로 향하려는데, 독한 향수 냄새와 함께 베르나가 등 뒤에 다가와 섰다.

“과분한 연회를 준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대공도 따로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더군요.”

“그대가 황궁에서 치르는 마지막 연회인데, 이 정도는 그리 과분한 것이 아니지.”

“오늘 처음으로 곧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실감했습니다.”

곁눈으로 주변을 훑은 베르나가 상냥한 얼굴로 웃었다.

“제국을 떠나는 여동생과 마지막으로 왈츠 한 곡 추시겠습니까.”

살짝 무릎을 굽힌 베르나가 댄스를 청한 순간 악사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곤란한 표정을 지은 필리프가 마땅찮은 심정으로 베르나가 내민 손을 잡았다.

* * *

“그래서 어떤 춤을 추는데? 상대는 정해진 상대랑만 함께 할 수 있는 거야?”

“글쎄. 나도 사실 귀족분들이 춤을 추는 걸 제대로 본 적이 없어서.”

연회장 바로 앞까지 음식을 나르고, 회장 안 시종들이 문밖으로 내놓은 빈 접시를 옮기던 안나와 마샤가 들려오는 음악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듣고만 있어도 몸이 들썩일 정도로 경쾌한 선율이었다.

뭐지? 왈츠곡인가? 엄청 신나는데?

저도 모르게 어깨를 들썩인 안나가 살짝 열린 문틈으로 댄스에 여념이 없는 귀족들의 모습을 훔쳐보았다.

“뭐 하는 거야, 안나! 들키면 큰일이야. 어서 가자.”

“자, 이쪽으로 와, 마샤. 살짝만 구경하다 가자.”

회장 밖에는 음식 접시를 올려놓을 큼지막한 테이블이 놓여 있었는데, 테이블 뒤쪽에는 두 사람이 몸을 숨길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이 있었다. 마지 못한 표정으로 안나의 옆에 자리한 마샤가 숨을 죽이며 문틈 안을 주시했다.

“우와! 드레스가 다 엄청 화려해. 보석이 불빛을 받으니까 너무너무 예쁘다.”

안나가 귀족 가의 영애와 귀부인들이 입은 화려한 드레스를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필리프를 찾아 바삐 눈동자를 굴렸다.

“폐하는 춤은 안 추시나.”

낮게 읊조리는 마샤의 말에 화들짝 놀란 안나가 두 손을 내저었다.

“아니, 난 그냥.”

“뭘. 네가 누굴 찾는지 모를 것 같아?”

벌겋게 달아오른 안나의 얼굴을 보며 미소 지은 마샤가 안나의 어깨를 잡아 끌었다.

“어, 저기! 저기 저분, 폐하 맞지?”

안나가 고개를 한계까지 빼내었지만, 보일 듯 말 듯 그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아, 조금만 문이 열리면 보일 것 같은데. 그가 춤추는 모습은 꼭 한번 보고 싶었는데.

“이제 가야 해, 안나. 더 시간 끌면 잔소리를 들을 게 뻔해.”

“응.”

아쉬움에 잘 떨어지지 않는 엉덩이를 들어 흰 천으로 덮인 공간을 빠져나오는데, 검은 그림자 하나가 두 사람의 앞을 가로막았다.

“거기서 뭐 하는 거지?”

연회장 곳곳을 순찰 중인 황궁 소속 근위병이었다.

“아, 저… 저희는 주방 시종인데, 접시 하나가 요 밑으로 떨어져서요.”

“두 명이 함께 접시를 주웠다는 말인가?”

안나가 대충 둘러댄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머리를 굴려봤지만, 마땅한 핑곗거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어떡하지? 그냥 사실대로 말할까? 아니, 솔직히 연회장 구경 조금 했다고 뭐 큰일이야 생기겠어?

대리석 바닥에 떨어뜨렸던 시선을 끌어올린 안나가 입을 벌리는데, 단단한 팔이 그녀와 근위병 사이를 파고들었다.

“무슨 일인가.”

케이든 아들레드. 한동안 얼굴이 보이지 않아 황궁 멀리 떠났겠거니 생각했던 남자가 다시 안나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기사님.”

“내가 잊어버린 것이 있어 찾아달라고 부탁했는데, 혹시 무슨 문제가 있나?”

“아, 아닙니다.”

케이든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인 근위병이 회장 반대쪽으로 사라지자 케이든이 조심스레 안나의 얼굴빛을 살폈다.

“괜찮습니까.”

“예.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마샤를 돌아보며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은 안나가 급히 자리를 피하는데, 걸음 폭이 큰 케이든은 손쉽게 안나의 뒤를 따라붙었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저는 바로 주방으로 돌아가 봐야 합니다.”

심상치 않아 보이는 안나와 케이든 사이의 기류를 눈치챈 듯, 마샤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저기, 안나. 나 먼저 가 있을게. 주방에서 봐.”

케이든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인 마샤가 빠르게 황궁 복도를 가로질렀다. 케이든이 자신을 향해 등을 돌리는 안나의 얼굴을 바라보다 차분히 눈을 내리깔았다.

“소란을 떠는 것을 원하십니까.”

“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사람을 불러 당신을 데려갈 수도 있다는 말을 하는 겁니다.”

케이든의 등 뒤에 서 있던 시종 몇 명이 슬그머니 안나와 케이든 사이의 거리를 좁혀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진심이다, 이 남자는.

“지금은 보는 눈이 너무 많고, 잠시 후 연회가 끝나면 그 눈은 훨씬 더 늘어나겠지요. 잠시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것뿐입니다.”

“그럼 딱 십 분입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케이든이 손바닥을 뻗어 등 뒤를 바짝 따라붙은 시종들을 물러나게 했다.

혹시라도 수상한 시선을 받는 것이 부담스러운지 케이든이 발걸음의 보폭을 넓혀 걷기 시작했다. 그가 향하고 있는 곳은 황궁 동쪽 출입구 쪽이었는데, 황궁에 머무르는 황족과 귀족들이 이용하는 통로인 만큼 늘 일정 수의 근위병들이 지키고 서 있는 곳이었다.

“언제까지 가야 합니까.”

혹시라도 황궁을 벗어나게 될까 두려워 안나가 걸음을 멈추며 물었다. 분명 평소라면 문가를 지키고 있어야 할 문지기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에 불안감이 느껴졌다.

열 걸음 정도 안나를 앞서 걷던 케이든이 걸음을 멈추고 안나를 향해 뒤돌아섰다. 그는 느리고 가벼운 걸음으로 안나에게 다가와 섰다.

“당신과 결혼하고 싶습니다.”

케이든이 불쑥 꺼낸 이야기에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오로지 자신의 숨소리만이 남아 있는 고요 속에서 안나는 불현듯 깨달을 수 있었다. 이 남자를 따라온 것이 큰 실수였음을.

안나가 본능적인 두려움에 몸을 조금씩 뒤로 물리며 말했다.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려 나왔다.

“그, 그것은 제가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분명 다시 기억해낼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보다 귀하고 특별했던 사이였습니다. 도저히 이렇게 끝내 버릴 수는 없습니다.”

“물러서세요. 더 다가오면 소리 지를 거예요.”

케이든이 주춤주춤 몸을 물리는 안나의 코앞에 바짝 다가와 섰다. 있는 힘껏 그의 가슴팍을 떠밀어 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제게도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아, 아니… 이것 놓으세요!”

“오늘 일은 용서하십시오.”

눈가에 까만 어둠이 느껴지고 조금씩 의식이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기를 쓰고 정신을 놓지 않으려 애써 봐도 감기는 눈꺼풀과 힘이 빠져 흐물거리는 몸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몸이 공중으로 가볍게 들리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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