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46)화 (46/139)
  • 46화

    연회가 열리는 당일 날씨는 화창하고 맑았다. 처소 창문을 열어 잠시 쏟아지는 금빛 여름 햇살을 맞은 안나가 황급히 주방으로 향할 채비를 시작했다.

    “일찍 준비했네?”

    “응, 오늘은 바쁜 날이니까.”

    “어제 네가 카밀라 응급 처치해 준 얘기를 주방장님이 들으셨대. 연회가 끝나면 그 방법을 주방 시종들 모두에게 가르쳐 주라고 하셨다던데?”

    “그래? 뭐, 그거야 어렵지 않지.”

    그래. 주방일을 하려면 모두 똑바로 알고 있어야 하는 기본 응급 처치이지. 가만, 그러고 보니 심폐소생술이나 기본적인 응급 처치 방법을 함께 가르쳐 주는 것도 좋겠네. 이 시대에는 제대로 익히기 힘들었을 테니까.

    안나가 앞치마를 묶으며 식당에서 일할 때 틈틈이 교육받았던 심폐소생술의 단계를 떠올렸다.

    주방에 들어서 산더미처럼 쌓인 식자재를 보고 기함할 틈도 없이 일거리가 밀려들었다. 안나의 요리 실력을 높이 평가한 것인지 카라나 주방장은 그녀를 메인 음식 준비 인원에 포함 시켰는데, 음식의 맛뿐 아니라 세심한 플레이팅이 요구되는 자리였다.

    와. 어떻게 해. 처음 주방에서 일할 때만큼 떨리는데?

    기분 좋게 뛰는 심장을 가라앉힌 안나가 전날 준비해 놓은 소스를 적정 비율로 분배하기 시작했다. 자신을 향해 협박성 말을 뱉은 황녀를 위한 요리를 한다는 사실이 마냥 기쁜 것은 아니었지만, 비단 황녀 한 사람만을 위한 음식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 잠시 불안감은 미뤄 두고 요리에 집중하자. 메인 음식이라면 필리프도 맛을 볼 테니까.

    정신없이 시간이 흘렀다. 음식 담당 시종들이 만드는 요리를 중간중간 점검한 카라나와 놀만이 주방 밖에 서 있던 시종을 불러 접시와 커트러리를 나르게 했다. 평소와는 달리 시종들의 옷차림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자, 안나. 애피타이저는 너와 카밀라가 직접 들고 가도록 해라.”

    “예? 제, 제가요?”

    “혹시 일찍 도착한 분들이 음식에 관해 물으실 수 있으시니.”

    “아, 예. 알겠습니다.”

    놀만이 안나에게 식욕을 돋울 샐러드와 핑거푸드가 담긴 접시를 내밀었다. 연회가 시작되기 전 일찍 회장에 도착한 인원들을 위한 음식이었다. 안나와 카밀라가 차례로 접시를 받아 들고 주방을 나서는데, 연회장으로 향하는 길목에 빨간 비단보와 꽃잎이 깔려 있었다.

    “자, 이쪽으로 오거라.”

    “아, 예.”

    금빛 비로도 숄을 걸친 근위병을 따라 연회장으로 발을 옮기는데, 연습 중인 듯한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우와!”

    아직 준비가 끝나지 않은 연회장 내부에 들어서는 순간, 안나의 입에서 나지막한 감탄사가 흘렀다.

    황궁 내에서 가장 크기가 큰 연회장은 한 번에 약 천명 정도의 인원을 수용하는 것이 가능했다. 커다란 공간 곳곳에 화려한 조각상이 놓여 있었고, 천장에는 어마어마한 크기에 샹들리에가 설치되어, 자욱한 연기 사이로 밀랍 타는 냄새가 가득했다.

    “여기에 놓거라.”

    “예? 아, 예.”

    정신을 놓고 회장 구석구석을 둘러보던 안나가 근위병이 지시한 자리에 접시를 놓았다. 연회장을 좀 더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험상궂은 인상의 근위병이 허락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카밀라가 아쉬움에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안나의 옆을 바싹 따라붙었다.

    “앞으로 당분간 내가 너한테 음식을 가져다줄 거야.”

    “어? 그게 무슨 말.”

    “내 말만 들어.”

    고개를 돌리려는 안나의 팔을 강하게 당겨 정면을 보게 한 카밀라가 입술을 거의 떼어내지 않고 빠르게 말을 이었다.

    “핑계를 대고 내가 주는 음식을 먹지 마. 쏟든지, 아니면 입에만 머금고 있다가 뱉어버리던지. 지켜보는 눈이 어디에든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평소 카밀라답지 않은 목소리였다. 분명 경고의 의미였다.

    “저, 카밀라.”

    “너한테 받은 만큼만 갚을 거야. 더는 기대하지 마.”

    마지막 한 마디를 내뱉은 카밀라가 안나를 지나쳐 먼저 주방 안으로 들어섰다. 베르나 황녀가 자신에게 먹이려고 했던 약병을 떠올린 안나가 그 자리에 멈춰서 가빠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카밀라가 했던 말이 제대로 이해되며 누군가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안나가 불안감에 쿵쿵 뛰는 심장을 가라앉히며 태연한 표정으로 주방 안에 들어섰다. 사나워진 정신으로 일에 온전히 집중하는 것이 힘겨웠지만, 카밀라의 말대로 주변에 황녀가 심어 놓은 끄나풀의 감시를 받고 있을 수도 있었다.

    집중하자, 집중! 자, 종잇장처럼 얇게 구워 모양을 잡은 밀가루 반죽을 튀겨 먹을 수 있는 접시를 만들고, 그 위에 잘게 썬 해산물 볶음을 얹어야지. 그리고 깨끗한 천 가득 매콤한 소스를 넣고 천 끝을 잘라 하트 모양으로 소스를 뿌리면 완성이다.

    안나는 온 정신을 음식에 집중하며 마음속의 불안감을 떨쳐내려 애썼다. 커다란 접시 열 개를 빼곡하게 채울 수 있을 정도의 양을 완성하고 내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드니 잠시의 휴식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자, 저녁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으니 모두 분발해야 한다. 이십 분 후 다시 자리로 모이도록.”

    평소였으면 반가웠을 휴식 시간이 조금도 달갑지 않았다. 안나가 물에 절어 퉁퉁 부어오른 손가락을 앞치마에 닦아내는데, 작은 접시 하나를 든 카밀라가 그녀를 향해 가까이 다가왔다.

    말없이 안나의 손에 접시를 들려준 카밀라가 눈도 마주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안이 오목한 접시 안에는 김이 나는 해산물 스튜가 담겨 있었다. 의심을 사지 않고 음식을 먹지 않는 법. 최대한 태연한 표정을 가장한 안나가 주방 구석으로 자리를 옮겨 숟가락을 들었다.

    “켁, 케켁!”

    입맛을 다시는 표정을 지으며 숟가락 가득 스튜를 덜어낸 안나가 헛구역질을 한 뒤, 입안에 넣었던 음식물을 모두 접시에 뱉어냈다. 주변에 있던 시종 두 명 정도가 달려와 기색을 살피는 사이 들고 있던 접시를 자연스럽게 바닥으로 떨구었다. 빠르게 주변을 돌아본 안나가 잔기침하며 바닥에 흘린 음식물 위로 행주를 덮었다.

    “아니, 안나. 너 괜찮은 거야?”

    “예, 부주방장님. 괜찮습니다. 급하게 먹다가 그만.”

    “접시 이리 주렴. 음식을 좀 더 줄 테니.”

    “아닙니다. 거의 다 먹고 남은 것 조금을 흘린 것이라서요.”

    황급히 음식물을 닦아낸 안나가 더러워진 행주를 들고 주방을 나섰다. 주변에 뒤 따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실히 확인한 후에야 입안에 남아 있는 음식물을 완전히 게워냈다.

    그런데 대체 언제까지 이런 눈속임을 해야 하지? 황녀가 떠나는 날까지만 버티면 되려나. 한숨을 삼킨 안나가 꼬르륵 소리가 나는 배 위에 손을 얹었다.

    * * *

    “폐하?”

    수행원을 호출한 필리프가 입을 열기 직전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 경계해야 할 대상은 베르나만이 아니었다. 타론 대공과 그를 따르는 수많은 인원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을 텐데, 무모한 행동은 삼가는 것이 좋았다. 안나를 위해서도.

    “아니야. 의복을 준비해.”

    “알겠습니다, 폐하.”

    안나를 따로 불러내 함께 둘만의 시간을 가지려 계획했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사과주를 나누어 마시며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별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도 그녀의 입을 통하면 어쩐지 너무나 즐겁고 재미있게 느껴지곤 했다. 이야기를 종알거리는 안나의 빨간 입술을 떠올리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데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폐하, 의복이 준비되었습니다.”

    “들어와.”

    풍성한 퍼프 슬리브 위로 금색 조끼와 재킷을 매치하고, 다이아몬드와 루비가 촘촘하게 박혀 있는 실크 크라바트를 둘렀다. 황제의 전용 재단사가 조각같이 화려한 필리프의 모습을 감상하듯 바라보며 탄성을 삼켰다.

    “황녀와 타론 대공은 언제 등장하기로 했지?”

    “악사들이 연주를 시작하면 함께 등장해 브랑슬을 추시기로 하셨습니다.”

    “초대받은 인원은 전부 자리했나?”

    “예. 크리스토 백작을 마지막으로 전부 입장을 마쳤습니다.”

    짧게 고개를 끄덕인 필리프가 침실을 나서 황궁 서쪽 복도로 접어들었다. 침실에서 연회장까지의 최단거리는 남쪽 계단을 통한 길이었지만, 서쪽 복도를 통해야만 황궁 주방을 지나칠 수 있었다.

    급하게 움직이던 필리프의 발걸음이 조금씩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황궁 주방 근처에 있던 주방 시종들이 필리프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예를 갖추었다. 필리프가 안나의 얼굴을 찾아 부지런히 눈동자를 굴렸다. 수많은 시종의 얼굴을 빠르게 훑었지만, 그녀의 얼굴은 보이질 않았다.

    주방 안에 있는 모양이군. 잠시 얼굴을 봤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움을 삼키며 발걸음을 돌리려는데, 복도 끝자락에서 커다란 소쿠리를 품에 안은 안나의 모습을 발견했다. 제 몸집의 두 배는 되어 보이는 소쿠리를 꼭 품고 바삐 달려오는 안나의 모습을 바라보는 필리프의 눈가가 사르르 접혀 들기 시작했다.

    “저, 폐하.”

    “쉿.”

    사람들의 시선을 피할 수 있는 커다란 기둥 뒤편으로 자리를 옮긴 필리프가 안나의 움직임에 시선을 고정했다. 주방 앞에 멈춰서 잠시 숨을 고른 안나가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시선 끝에 필리프의 수행원이 들어왔다.

    점점 목을 늘리며 팔랑팔랑 고개를 돌리는 그녀의 모습에, 차마 숨기지 못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필리프가 기둥 밖으로 살짝 고개를 내어 안나와 눈을 맞추었다.

    무의식적으로 숨을 참은 안나가 침을 꿀꺽 삼키는 것이 보였다.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으로 필리프를 응시하던 그녀의 눈매가 느리게 휘어지더니, 숨이 막힐 정도로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희한한 기분이었다. 그녀의 웃는 얼굴이 시야 가득 들어차 그 이외의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조금씩 자신에게 집중되는 주변의 시선 따위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폐하. 이제 시간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는 수행원의 목소리를 들은 후에야 정신을 차린 필리프는, 자신이 안나가 있는 쪽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 이만 가지.”

    고개를 돌리기 전 안나를 향해 짧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자신의 마음을 전부 이해한다는 듯 그녀 역시 웃음기가 걸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새빨간 입술이 작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미치겠네, 정말.”

    어쩔 수 없이 발을 떼어 낸 필리프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곤란한 표정으로 눈썹을 찡그린 필리프가 수행원을 돌아보았다.

    “오늘 저녁 식사 이후 잠시 시간을 빼놓도록 해.”

    “알겠습니다, 폐하.”

    원치 않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수 시간을 버텨내야 하는 연회 자리였다. 필리프가 어떻게든 시간을 내어 안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하며 연회장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