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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45)화 (45/139)
  • 45화

    치렁치렁하게 늘어진 황녀의 치맛자락을 붙든 시녀들이 부지런히 발을 움직였다. 황녀의 발걸음에 정확히 속도를 맞추지 못하면 이후 어떤 불호령이 떨어질지 잘 알고 있기에, 황녀가 내딛는 발걸음의 보폭에 온 정신을 집중해야 했다.

    황궁 입구로 들어오는 황제와 타론 대공의 모습을 확인한 황녀의 발걸음이 조금씩 속도를 늦추었다. 사뿐사뿐. 우아한 걸음걸이로 황제를 향해 다가가는 황녀에 맞춰, 시종들의 발걸음 보폭이 조정되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타론과 먼저 눈이 마주쳤지만 빠르게 시선을 돌린 베르나가 필리프의 앞에 멈춰서 고개를 숙였다. 성의 없이 고개를 까딱거리는 황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뭐지? 설마 계획을 눈치챈 건가? 뭐, 눈치챘다고 하더라도 당장 손을 쓸 명분을 없을 테니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지만, 역시 이 아둔한 남자에게 좀 더 단단히 일러두어야 했어.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슬쩍 타론을 곁눈질로 응사한 베르나가 다시 황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베르나의 시선을 의도적으로 피한 필리프가 옆에 선 타론을 돌아보며 말했다.

    “두 사람이 오랜만에 만났을 텐데, 편히 회포를 풀 시간을 주겠네.”

    “감사합니다, 폐하.”

    “대공을 맞이하기 위해 성대한 식사를 준비했으니, 준비되면 만찬을 즐기도록 하지.”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폐하.”

    끝까지 베르나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필리프가 황궁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필리프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베르나가 타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어요.”

    간드러진 베르나의 목소리를 들은 타론이 베르나의 허리에 손을 얹었다. 손가락 끝은 그녀의 엉덩이에 살짝 걸쳐 있었다.

    “그대를 만나기 위함이라면 이보다 훨씬 더 먼 길이라도 기꺼이 갈 수 있소.”

    평소의 기분 상태였다면 적당히 귀엽게 받아줄 만한 말이었지만, 현재 베르나의 심기는 매우 불편한 상태였다. 간신히 웃는 얼굴을 유지한 베르나가 제 허리에 감겨 있는 타론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 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아직 보는 눈이 많습니다.”

    “시종들뿐인데 뭘 그리 신경을 씁니까. 그리고 우리는 곧 결혼할 사이인데.”

    제 손을 떼어내는 베르나에게 섭섭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 타론이 불퉁한 소리를 냈다.

    어떻게든 넘어가 보려고 했는데, 일이 성가시게 되었군.

    절로 찡그려지려던 미간에 바짝 힘을 준 베르나가 타론의 소맷자락을 살포시 움켜쥐며 속삭였다. 잔잔한 물결처럼 부드러운 목소리가 타론의 귓바퀴에 고여 들었다.

    “대공을 제대로 맞이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필요하지는 않겠죠. 어서 제 방으로 드시지요. 제대로 된 환영 인사를 보여드릴 테니까요.”

    베르나가 타론의 눈을 똑바로 마주한 채, 의도적으로 상체를 낮췄다. 살짝 드러나는 베르나의 가슴골로 시선을 내린 타론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 * *

    널찍한 타론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짚은 베르나가 요염하게 허리를 돌리기 시작했다. 남자의 얼굴에 흥분이 깃드는 것을 확인한 그녀가 고개를 한계까지 젖히며 새된 목소리를 내뱉었다. 베르나의 방에 들어온 이후 한시도 쉬지 않고, 벌써 세 차례 이어지고 있는 정사였다.

    “하아… 당신은 정말 대단해…….”

    “응, 아아…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시트에 등을 대고 누워 여자의 움직임을 즐기던 타론이 그녀의 허벅지를 잡아 순식간에 자세를 바꾸었다. 땀에 젖은 등을 편히 시트에 기댄 베르나가 타론의 어깨에 양팔을 얹었다.

    “아아아…….”

    허리의 움직임에 속도가 붙고, 여자의 교성에 비명이 섞이기 시작했다. 흐른 땀과 살이 마찰하는 소리가 커다랗게 울렸다. 타론이 베르나의 발목을 잡아 공중으로 들어 올리고, 하체에 가득 힘을 실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타론이 짐승이 포효하는 듯한 신음을 뱉으며 베르나의 가슴 위로 몸을 겹쳤다. 한 몸이 된 것처럼 찰싹 달라붙어 있던 베르나의 몸이 타론에게서 사르르 떨어져 나갔다.

    “하아아… 나 이제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어요.”

    헐떡임이 잦아들자 베르나가 타론의 뜨거운 어깨에 뺨을 비비며 말했다. 타론이 침대 끝에 간신히 걸쳐진 이불을 끌어와 베르나의 몸 위로 덮어주었다. 가볍게 가슴을 스치는 손길에 베르나가 갸르릉거리는 소리를 냈다. 부드럽고 풍만한 가슴을 그의 팔에 바짝 밀착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아까 황제에게 당신이 한 이야기를 그대로 전했는데, 반응이 좋지 않았어. 정략결혼에는 흥미가 없다고 잘라 말하기까지 하더군요.”

    “정말 그리 말씀하셨어요?”

    “음. 아무래도 마음에 품고 있는 여인이 있는 눈치야. 그렇게까지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것을 보니. 당신, 뭐 들은 건 없습니까?”

    “아… 뭐.”

    타론의 이야기를 듣던 베르나의 얼굴이 점점 흙빛으로 굳어가기 시작했다. 이거 뭐야. 생각보다도 훨씬 더 그 시녀를 더 깊이 마음에 품은 눈치인데? 하, 잘난 아버지가 제대로 뒤통수를 맞는 것을 지켜 보고도 배운 것이 없었던 모양이지? 무지한 인간 같으니라고.

    땀에 젖은 베르나의 얼굴을 부드럽게 쓸어내린 타론이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

    “너무 괘념치 말아요. 결국은 그도 제국의 이익을 위해 상대를 선택하게 될 테니까.”

    “우리가 손쉽게 주무를 수 있는 대상을 황비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황제가 눈치채지 못할 상대를 고르는 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어요.”

    타론과 베르나는 최근 서신을 통해 필리프의 반려로 적당한 인물을 고르기 시작했는데, 하이만 제국의 차녀보다 적합한 여인을 찾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내 그대를 위한 일이라면 뭐든 하겠다 약속하지 않았소.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베르나의 이마를 타고 내려온 땀방울이 그녀의 턱 끝에 맺히는 것을 본 타론이, 맺힌 땀이 굴러떨어진 그녀의 턱과 목덜미를 혀를 내어 핥았다. 끈적거리는 혓바닥이 엿가락처럼 목덜미에 달라붙는 느낌에, 베르나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아읏, 이제 더는 무리예요. 내일이 연회라는 사실을 잊으신 것은 아니겠죠? 귀족들 앞에서 아름답고 당당한 모습을 보이고 싶단 말이에요.”

    “당신은 언제나 아름답고 당당해 보이는걸.”

    베르나가 그녀의 품에 밀착하는 타론의 가슴을 밀어냈지만, 손바닥에 실린 힘은 미미한 정도였다. 베르나의 양 손목을 한 손으로 잡은 타론이 혀로 입술을 축이며 질척이는 목소리를 냈다.

    “정 힘들면, 내가 당신을 안고 입장할 수도 있는데.”

    “아이, 당신 정말. 이제 정말 무리라니까.”

    눈꼬리를 접어 웃은 베르나가 못 말리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몸에 힘을 풀었다. 베르나는 타론 대공을 만나기 전 비밀리에 사람을 풀어 그의 색사와 관련한 모든 정보를 수집했다. 그를 만나고 그의 취향에 맞는 정사를 즐기는 척 연기하며, 손쉽게 그의 몸과 마음을 사로잡는 것에 성공했다.

    절대 놓을 수 없는 것이 몸 정이라고, 베르나의 몸에 단단히 홀린 타론이 그녀의 말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의 신세가 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지치지 않고 제 몸에 달라붙는 타론의 손길을 받아내면서도, 베르나는 타론에게 주의를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으응. 내일은 폐하와 더 가까워질 수 있도록 해 봐요. 전에 내가 한 말 기억하죠?”

    “하아… 그래, 그래요.”

    “실수가 없어야 해요. 그쪽에서 먼저 눈치채서도 안 되고.”

    “그래… 알았어… 이제 다리를…….”

    어리석은 사람. 당신도 영원한 내 배필이 되기엔 한없이 부족한 사람이야. 게걸스럽게 자신의 육체를 탐하는 타론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베르나가 간신히 조소를 삼켰다. 그래도 지금은 제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니, 작은 칭찬 정도는 내려 주는 것이 맞는 일이겠지.

    “아흣!”

    남자가 만족스러움을 느낄 정도의 신음을 뱉는 것은 그녀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베르나의 반응에 만족한 듯 타론이 더 열정적으로 혀를 놀리기 시작했다. 제 몸에 닿는 굵직한 혀가 마치 몸집을 키운 애벌레 같다는 생각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타론의 얼굴을 보지 않기 위해 질끈 눈을 감은 베르나가 허리를 활처럼 접으며 타론의 어깨를 힘주어 잡았다.

    “으음… 좋아…….”

    유쾌하지 않은 이물감에 찌푸려지는 미간을 가까스로 단속하며 한껏 색스러운 표정을 꾸며내는데 침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황녀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정확한 타이밍이군. 시간만 있으면 몇 시간이고 제 몸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타론 대공의 기질을 잘 알고 있는 베르나였기에 미리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해 놓았었다.

    “방해하지 말라고 했잖아!”

    베르나가 억지로 목소리를 높이며 자신의 안을 채우던 타론에게서 조심스럽게 몸을 물렸다. 문밖에서 들려오는 시종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황녀님. 황녀님의 허락이 필요한 급한 일이라 그만. 용서해주십시오.”

    길게 한숨을 내쉰 베르나가 아쉬운 표정이 역력한 타론의 입술에 짧은 입맞춤을 남기며 얇은 비단 가운을 걸쳤다.

    “미안해요. 아무래도 급한 일인 것 같아 잠시 다녀와야 하겠어요. 당신은 좀 쉬고 있어요. 금방 돌아올 테니까.”

    “하아… 그래. 음. 기다리지. 다녀와요.”

    얄팍한 수였지만, 제 몸에 안달이 나 있는 둔한 남자는 그 수를 조금도 알아채지 못하는 듯했다. 고개를 끄덕인 베르나가 느릿하게 침실을 벗어나며 문밖에 서 있던 시종의 손에서 물수건을 받아들었다.

    “찝찝하게 정말.”

    타론의 타액으로 범벅이 되어 끈적거리는 몸을 구석구석 닦아낸 베르나가 별궁 중앙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장 불쾌한 향으로 범벅이 된 몸을 씻어내고 싶었지만,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카밀라는?”

    “말씀하신 곳에 불러 놓았습니다, 황녀님.”

    “아, 말해 놓은 서신은 기사에게 잘 전달했겠지?”

    “예. 어젯밤 무사히 전달했다고 연락 받았습니다.”

    가운을 여민 베르나가 시종에게서 검은색 천 꾸러미를 받아들었다. 잠시 멈춰서 앞으로의 계획을 찬찬히 되새긴 그녀가 발걸음을 떼어 냈다.

    “가지.”

    “예, 황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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