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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44)화 (44/139)
  • 44화

    황녀의 부름에 황궁 복도를 걷던 안나가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황궁 곳곳이 평소보다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고, 계단과 통로 바닥에는 자수가 놓인 비단이 깔려있었다.

    “그래. 곧 황녀의 혼인 상대가 도착한다고 했었지. 그럼 주변에 보는 눈이 많을 테고, 아무리 황녀라도 함부로 일을 꾸밀 생각은 하지 못할 거야.”

    자기 자신에게 괜찮다고 주문을 거는 듯 고개를 크게 주억거린 안나가 황녀와 마지막 만났던 우측 복도 끝 가파른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기다란 복도를 지나 어두컴컴한 공간에 도착하니 다시 스멀스멀 불안감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또 무슨 일로 이곳에 부른 거지? 베르나와의 마지막 만남을 떠올린 안나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새어 나왔던 말 덕분에 간신히 상황을 모면했었지만, 이번에도 제 입이 절로 움직여 주길 바라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확실한 것부터 정리해 두자. 베르나 황녀는 필리프와 적대적인 관계에 있고, 필리프를 끌어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지금 제 몸이 빙의해 있는 상대의 언니와 필리프 사이에 무슨 사연이 있는 것 같긴 하지만, 그녀의 죽음에 필리프가 확실히 연관되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과연, 이 확신이 그저 마음을 품은 상대를 향한 맹목적인 믿음인 걸까?

    “뭘 그리 멍청하게 서 있어?”

    기척도 없이 안나의 등 뒤로 다가온 베르나가 차가운 말투로 내뱉었다. 그녀의 목소리에 흠칫 놀란 안나가 바로 고개를 숙였다.

    “아, 황녀님을 뵙습니다.”

    신경질적으로 안나의 인사를 받은 베르나가 복도 한쪽에 놓인 의자를 가리켰다.

    “저쪽에 앉아.”

    “…예, 황녀님.”

    뭐야. 원래도 친절한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오늘따라 더 찬 바람이 쌩쌩 부는 느낌이잖아? 그래도 다행인 것은 얼마 후면 이 여자의 얼굴을 마주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그래. 눈 딱 감고 며칠만 고개를 조아리자. 날카로운 말쯤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려버리면 그만이니까.

    “자, 시간은 줄 만큼 줬으니 제대로 된 결과를 보일 시간이겠지?”

    들고 있던 비단부채를 접은 베르나가 부채 끝으로 안나의 턱을 들어 올렸다. 안나가 이곳으로 걸어오며 머릿속으로 정리한 말을 속으로 빠르게 되뇌었다.

    “황녀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너를 신뢰할 수가 없어. 그게 문제야.”

    “…….”

    “결국, 너와는 손을 잡을 수 없겠다는 말이야.”

    베르나가 며칠 동안 고민하고 내린 결론은 처음과 같은 것이었다. 안나 스완을 철저히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인다고 하더라도 그녀가 평생 자신의 편이 되어 주리라 확신할 수 없었다. 괜한 기대로 안나 스완의 목숨을 살려둔 것이 실수였다. 베르나는 어젯밤 필리프가 자신에게 전한 말을 떠올렸다.

    ‘이제 곧 제국을 떠나게 될 텐데, 엉뚱한 일에 힘을 쏟는 일은 그만두는 게 좋을 거야.’

    ‘예? 폐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안나 스완에게 접근하지 마.’

    ‘저, 폐하. 제 말을 한 번 들어보시면.’

    ‘다시 한번 말하지. 그녀를 내버려 둬. 다음에는 경고만으로 끝나지 않을 거야.’

    제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음산한 목소리를 또박또박 게워내던 필리프의 목소리가 여전히 귓가에 맴돌며 사라지지 않았다.

    안나가 최근 황제의 관심을 끌고 있다는, 아니 황제의 마음 한구석에 똑바로 자리했음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두 사람의 관계가 더 깊어지기 전에 손을 썼어야 했다는 생각이 베르나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안나를 조용히 처리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지금 성급하게 움직인다면 꼬리를 밟힐 것이 뻔하니 모든 행동에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운명을 믿어?”

    “…예?”

    “피하려고 해도 결국은 맞닥뜨리게 되는 것. 운명 말이야.”

    베르나의 목소리가 한 톤 낮게 가라앉았다. 불길한 예감에 온몸이 조여드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순간 안나의 머릿속에 희미하게 남아 있던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누가! 대체 누가 그랬어! 대체 누가!!!’

    ‘…….’

    ‘제발 말해 줘, 언니. 응?’

    누군가의 몸을 붙들고 오열하는 현재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축 늘어진 몸을 강하게 끌어안고 무언가를 하염없이 속삭이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축 늘어져 있던 몸이 바르르 떨리고 검은 천으로 가려져 있던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지금 현재 자신의 모습과 너무나도 닮은 여인의 얼굴이 핏기없이 창백했다.

    ‘화, 황제 폐하… 나를 이렇게 만든 사람은 화, 황제 폐…….’

    ‘…언니! 언니! 눈 좀 떠봐! 제발!’

    머릿속에서 잔상이 사라지자 절대 아닐 것으로 생각했던 가능성이 수면 밑에서 느릿하게 솟아올랐다. 아니, 아닐 거야. 분명 오해가 있을 거야. 그럴 리 없어. 그럴 수 없어.

    “황제 폐하가 제 언니를 죽게 한 것이… 정말 사실입니까.”

    안나의 입에서는 놀랍게도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나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베르나의 입꼬리가 비스듬하게 상승했다.

    “왜, 또 무엇인가 생각난 모양이지? 하지만 이제 그런 것이 다 무슨 소용이겠어. 어차피 전부 지난 일일 뿐.”

    “말씀해주세요. 사실… 입니까.”

    “이 이야기는 이미 끝난 것이 아닌가? 네가 저번에 나에게 했던 이야기를 잘 떠올려 봐.”

    “…….”

    “그냥 상황을 모면하고자 아무 소리나 지껄인 거였어? 제국의 황녀인 내 앞에서? 감히?”

    새파랗게 질린 안나의 얼굴을 지켜보며 재미있다는 듯 희미하게 웃은 베르나가 등 뒤 시종의 손에서 작은 약병 하나를 건네받았다.

    “자. 당장 마셔.”

    “…….”

    “왜, 못 먹겠어?”

    일말의 웃음기도 없는 차가운 목소리였다. 베르나가 끝내 손을 뻗지 못하는 안나의 손에 억지로 약병을 쥐여 주었다. 약병이 손바닥에 닿는 순간 희한하게도 필리프와 함께 갔었던 숲속 움집의 약재상의 얼굴이 떠올랐다. 결국은 떠나야 할 운명이니, 떠날 곳에 너무 정을 두지 말라고 충고 섞인 경고를 내뱉었던 여자의 굳은 얼굴이 눈앞에 나타났다가 느릿하게 사라졌다.

    머리끝부터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약병을 쥔 손에서 그대로 힘이 풀리는데, 베르나가 안나의 손등을 덮어 잡았다. 안나의 코끝까지 바짝 다가온 베르나에게서 진한 향수 냄새가 풍겼다.

    “뭐해? 마시라는 말 못 들었어?”

    “…이게 무엇입니까.”

    간신히 약병을 쥐고 있는 안나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왜 그렇게 떨어. 내가 설마 여기서 널 죽이기야 하겠어? 내가 널 불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왜 이것을 제가…….”

    “원래 멍청한 걸까 아니면 멍청한 척하는 걸까.”

    코웃음 친 베르나가 안나의 손에서 다시 약병을 낚아챘다. 필리프에게 사용한 적이 있는 독성이 담긴 약병이었다. 단시간에 효과를 보이지는 않지만, 천천히 신체에 파고들어 자연스러운 죽음을 포장할 수 있게 하는 독.

    망할 놈의 유모만 아니었더라도 지금쯤 일이 훨씬 수월해졌을 텐데.

    이레네가 눈치채지만 않았어도, 손쉽게 필리프를 제거하고 모든 권력을 제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었을지 모른다. 과거를 떠올리며 이를 갈던 베르나가 약병 뚜껑을 열어 메마른 안나의 입술 가까이 가져다 댔다.

    “황제의 예쁨 좀 받게 되었다고, 네가 뭐라도 된 것 같아? 이유는 없어. 넌 내가 먹으라면 먹어야 하고, 죽으라면 죽는시늉까지 해야 하는 천박한 시종 신세니까.”

    겁을 먹으리라 생각했지만, 안나의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자신을 마주하고 있었다. 안나의 평온한 표정에 도리어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난 처음부터 네가 마음에 들지 않았어.”

    “…….”

    “천박한 시종 신세라면 시종답게 제대로 바닥에 엎드리는 편이 좋았잖아? 네 언니처럼.”

    안나는 제품 안에서 서서히 목숨을 잃어가던 여인의 얼굴을 떠올렸다. 머릿속이 새하얘지면서 아무 말도 꺼내 놓을 수가 없었다.

    “자, 이것의 몸을 결박해.”

    “예, 황녀님.”

    황녀의 등 뒤에 서 있던 시종 두 명이 안나의 어깨를 잡아 움직일 수 없게 고정했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안나가 어떻게든 제 어깨를 잡은 시종을 뿌리치려 했지만, 장정 두 명의 힘을 감당해낼 수가 없었다.

    “으읍!”

    안나의 입술을 힘주어 잡아 벌린 베르나가 그녀의 입술 안으로 약병 속 액체를 기울이는 순간이었다.

    “황녀님! 황제 폐하와 타론 대공이 황궁에 도착하셨습니다.”

    궁 안을 쩌렁쩌랑하게 울리는 커다란 소리에 놀라 약병 속 액체 절반 정도를 바닥에 쏟은 베르나가 시종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잡고 있던 안나의 어깨를 놔준 시종이 베르나의 등 뒤에 자리했다.

    “황제가 언제까지 너와의 소꿉놀이를 즐길 것 같아? 아, 바꿔 말하지. 황제가 너에게 질리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까? 일주일? 한 달?”

    아니. 당신은 나와 필리프의 관계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해. 그의 눈빛이, 몸짓이 진심을 말하고 있어. 장난이 아니야. 소꿉놀이 따위가 아니야.

    “알아서 떨어져 나가는 게 좋을 거야. 믿었던 사람에게 비참하게 내쳐지기 전에.”

    “…….”

    “누구든, 결국은 제게 어울리는 짝을 찾아가게 되어있으니까.”

    시종 두 명이 깨진 약병을 정리하는 사이, 베르나가 안나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기분 나쁜 향수 냄새가 코끝을 파고드는 순간 온몸에 날카로운 소름이 번졌다.

    “너는 내가 별로 겁나지 않은가 봐?”

    “…….”

    “이상하네. 나는.”

    잠시 말을 멈춘 베르나가 안나의 턱 아래로 손을 뻗었다. 가득 힘을 실은 손가락에 의해 안나의 턱이 거칠게 끌어올려 지고, 내내 피하고 있었던 악이 시린 눈동자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내가 겁나거든.”

    딱딱하게 굳은 안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은 베르나가 안나의 턱을 내던지듯 놔주었다. 그대로 등을 돌려 복도를 지나쳐 부지런히 발을 움직이던 그녀가 황궁 출입구가 있는 계단에 멈춰서 시종을 돌아보았다.

    “카밀라를 대기시켜. 대공을 만나고 바로 만날 수 있게.”

    “알겠습니다, 황녀님.”

    어차피 오늘은 그저 겁만 줄 생각이었으니 독초를 먹이지 못했다고 아쉬워할 일은 아니었다. 안나 스완의 접시에 독초를 섞는 일은 자신이 아닌 그 누구라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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