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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43)화 (43/139)
  • 43화

    “어째 아무래도 좀 불안한데.”

    주변을 살피며 주방에 들어선 안나가 한숨 섞인 혼잣말을 뱉었다.

    “자, 모두 메뉴에 대한 설명은 들었겠지?”

    “예, 주방장님.”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 않으니, 바로 음식 준비를 시작하도록 해라.”

    입을 모아 답한 주방 시종들이 일사불란하게 흩어지며 자리를 잡았다. 베르나 황녀의 결혼 기념 연회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황녀가 자신을 호출해 무언가를 지시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안나는 요 며칠 주변 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웠지만, 필리프 이외에 그녀를 찾는 이는 없었다.

    안나는 자신의 마음을 인정하고, 필리프의 곁에 머물기로 다짐했다. 필리프에게 악감정을 품고 있는 황녀에게 말려들지 않으려 하루에도 수십 번 자신에게 주문을 걸었지만, 지난번처럼 의지와는 다른 말들이 입가를 가르고 터져 나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쩐지 폭풍 전야처럼 느껴진단 말이지.”

    “응? 안나, 나한테 한 말이야?”

    “어? 어, 아니야, 마샤.”

    늦은 밤 몰래 숙소를 빠져나와 필리프의 침실을 찾는 일이 많아졌다. 언제까지 마샤를 속일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안나는 어젯밤 자신과 황제의 사이를 간략하게 털어놓았다.

    “그런데 안나, 설마 오늘도?”

    “응? 아니. 내일은 아침 일찍부터 준비해야 하니까.”

    마샤가 알았다는 듯 눈썹을 찡긋거렸다. 안나가 생각했던 것보다 마샤는 훨씬 담담하게 상황을 받아들이는 듯했다. 아마도 관계를 끝까지 지속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앞서서였는지 모른다.

    “욱! 욱!”

    마샤와 한참 채소 손질을 하고 있던 안나가 등 뒤에서 들려오는 구역질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여기, 주방장님! 카밀라가!”

    들고 있던 순무를 내던진 안나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카밀라의 앞으로 달려나갔다.

    “왜, 무슨 일이야?”

    “고, 고기가 익었는지 확인한다고 하다가 목에 걸렸나 봐. 어떻게 해!”

    “잠깐만.”

    안나가 한식당에서 일하며 두어 번 겪어 본 적이 있는 일이었고, 이에 대비해 하임리히 요법을 충분히 익혀 두었었다.

    안나의 얼굴을 확인한 카밀라가 간신히 손을 내저었지만, 조금도 개의치 않고 그녀의 등 뒤에 자리했다. 두 팔로 카밀라의 갈비뼈 아래를 감싸고 배꼽 윗부분을 강하게 밀쳐 올려주기를 몇 차례 반복했다.

    “우욱!”

    카밀라의 목구멍에 걸려있던 커다란 고기 조각이 입 밖으로 툭 튀어나왔고, 새파랗게 질려 있던 그녀의 안색이 조금씩 정상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하, 하아…….”

    “따뜻한 물을 좀 가져다줄래?”

    “어? 어, 어.”

    안나와 카밀라의 주변을 빙 둘러싸고 있던 시종 중 하나가 황급히 주방 안쪽으로 향했다. 카밀라의 숨이 진정되기를 기다린 안나가 그녀의 등을 쓸어주며 말했다.

    “음식을 급하게 먹다 보면 종종 일어날 수 있는 일이야. 금방 빼냈으니까 아무 일 없을 거야. 따뜻한 물을 마시고 잠시 쉬는 게 좋겠어.”

    카밀라가 안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어차피 그녀에게서 고맙다는 인사를 들으려 한 일이 아니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돌아선 안나가 채소 더미 앞으로 돌아갔다.

    “안나. 너 언제 그런 기술을 익혀 놓은 거야?”

    “어? 아, 이거. 별것 아닌데.”

    “별 것 아니긴. 작년에 주방 시종 한 명이 제대로 처치를 받지 못해서 큰일 날 뻔했잖아. 어? 그런데 그때 너도 같이 있지 않았나? 왜 그땐 오늘처럼 하지 않았어?”

    “어? 어… 내가 그때 같이 있었다고? 어… 글쎄 기억이 잘 안 나네.”

    “넌 없었나?”

    안나가 고개를 갸우뚱하는 마샤의 손에 반으로 자른 순무를 건네주었다.

    “순무는 이렇게 얇게 썰라고 하셨어. 그리고 나머지는 손톱 크기만 하게 자르래.”

    “응.”

    시간이 흐르자 등 뒤에서 안나의 이야기를 수군거리던 시종들의 목소리가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채소 손질을 마무리한 안나와 마샤가 나머지 시종들을 도와 해산물 손질을 마치자 오전 일과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자, 간단하게 식사하고 삼십 분 후에 다시 모이도록.”

    “네, 주방장님.”

    빡빡한 일정 때문인지 평소보다 짧은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오목한 접시에 호밀 빵 두 조각과 채소 볶음 조금을 배식받은 안나가 주방 구석에 털썩 자리를 잡았다.

    아, 이제 빵이 너무 물린다. 쌀밥에 김치만 있어도 앉은 자리에서 밥 세 그릇 정도는 뚝딱 해치울 수 있을 것 같은데.

    해외여행도 한 번 간 적이 없고, 한식당에 취업한 이후 식사 대부분을 식당 밥으로 해결해 온 안나에게 삼시 세끼 서양식은 너무나도 버거웠다.

    필리프에게 살짝 이야기해 볼까? 일반 김치는 냄새가 날 수 있으니까, 그래 물김치 정도는 괜찮잖아. 그 비슷한 음식이 먹고 싶다고 주방장님께 이야기를 전해달라고 하면. 아냐, 아냐. 그럴 수는 없지. 미쳤어, 미쳤어. 벌써 베갯머리 송사할 생각이나 하고. 정신 차리자. 정신!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안나가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마른 빵을 씹어 넘기는데, 머쓱한 표정을 지은 카밀라가 느릿하게 다가왔다.

    “왜? 뭐 할 말 있어?”

    “저기.”

    빈 접시를 한쪽에 밀어놓은 안나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네. 카밀라가 제 눈치 보는 것을 다 보고.

    “저… 황녀님이 부르셔.”

    “…지금?”

    “지금 바로 오라고 하셨어. 지난번에 이야기를 나누었던 곳이라고 하면 알 거라고.”

    지난번에 이야기를 나누었던 곳이라. 안나가 황녀와의 마지막 만남을 떠올렸다. 우측 복도 끝 가파른 계단을 올라 도착했던 좁고 기다란 복도를 떠올리는 순간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알았어.”

    불안감이 느껴진다는 이유로 황녀의 부름을 따르지 않을 수는 없었다. 안나가 힘없이 발걸음을 내딛는데, 카밀라가 안나의 어깨를 잡아 그녀를 멈춰 세웠다.

    “저기…….”

    “어?”

    “…아, 아니야.”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한 눈치로 뜸을 들이던 카밀라가 문 앞에서 몸을 물려 주었다. 오늘 얘가 새로운 모습을 자주 보여 주네. 실없는 웃음을 뱉은 안나가 황궁 우측 복도로 발을 옮겼다.

    * * *

    “도착하신 것 같습니다, 폐하.”

    “그래.”

    마차에서 내린 필리프가 항구 우측에 정박한 배를 바라보았다. 황제의 마차 주변을 빼곡하게 둘러싸고 있던 수십 명의 호위병이 일제히 양옆으로 갈라지며 길을 만들었다.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파이만 제국의 호위병들은 화려한 재킷을 입고 금과 은으로 장식된 투구를 쓰고 있었다. 한참 후 호위병 무리의 끝이 보이고, 바람에 흩날리는 푸른 비단 외투를 걸친 타론 대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골격이 큰, 남자다운 외모의 사내였다. 그의 오른쪽 눈 윗부분부터 뺨 중간까지 희미한 칼자국이 나 있었는데, 공작 가가 세력을 넓히는 것을 경계한 귀족 가문이 보낸 살수를 상대하며 생긴 상처였다.

    “먼 길 오느라 수고가 많았습니다.”

    “아닙니다, 폐하.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필리프의 앞에선 타론이 무릎을 굽히며 예를 표했다. 타론과 짧게 악수한 필리프가 준비된 마차를 가리켰다.

    “혹시 둘러보고 싶은 곳이 있습니까? 피곤하면 바로 황궁으로 이동하지요. 아 황녀는 급한 일이 있어 마중을 나오지 못했습니다.”

    “아, 예. 그녀가 미리 서신을 보내 알고 있었습니다.”

    미리 서신을 보냈다? 분명 아침에 급한 일이 생겼다며 당황한 표정을 짓던 베르나였는데. 필리프의 미간에 깊은 금이 그어졌다.

    “황궁으로.”

    “예, 폐하.”

    마차에 오른 필리프가 급히 목적지를 외쳤다. 필리프의 맞은편에 자리한 타론이 재킷 안쪽에 손을 넣어 작은 봉투 하나를 꺼내 들었다.

    “자, 이것을 먼저 받으십시오.”

    “이게 뭡니까.”

    “광산 채굴권을 포기한다는 내용이 적힌 증서입니다.”

    “아.”

    봉투를 받아든 필리프가 서류의 내용을 꼼꼼히 확인하고 자신의 재킷 안쪽 주머니에 끼워 넣었다.

    “친해지기 힘들 것이라 이야기하더군요.”

    “…예?”

    “자신의 오라비와 친해지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어쩐지 오기가 생겼습니다.”

    “…….”

    “제국 시장 내에 근사한 선술집이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먼저 들러 한잔해도 괜찮겠습니까.”

    타론은 탄탄한 군사력을 가진 파이만 제국의 황위 계승권을 가진 사내였다. 선황 때 이미 두 번의 전쟁을 치러 동맹국의 군사력 지원이 필수가 된 지금, 타론이 뻗어오는 손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필리프가 손짓으로 마부를 멈춰 세웠다.

    “맥주 맛만큼은 인정할 만한 곳이 있습니다. 괜찮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방향을 바꾼 마차가 시내로 접어들었다. 황제가 탄 마차의 문양을 읽은 시민들이 길가에 멈춰 중간중간 황제의 이름을 연호했다.

    “자, 이곳입니다.”

    먼저 선술집 안으로 들어선 호위병들이 황제가 종종 술 한잔을 즐기곤 했던 술집 가장 안쪽 천막이 드리운 곳에 자리 잡았다.

    일반 시민들이 거의 출입하지 않는 늦은 밤에만 주로 시장 선술집을 찾곤 했던 황제였기에, 황제의 얼굴을 가까이서 보길 원하는 시민들이 선술집 주변을 빼곡히 둘러싸기 시작했다.

    “맛이 훌륭합니다. 우리 제국의 맥주와는 그 맛이 전혀 다르군요.”

    “그렇습니까.”

    유리잔에 담긴 맥주를 단 두 번 만에 비워낸 타론이 빈 잔을 밀어놓으며 필리프에게 가까이 상체를 기울였다.

    “황녀의 걱정이 깊어 보였습니다. 오라비보다 먼저 식을 치른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는 것 같았습니다.”

    필리프가 터지려는 웃음을 간신히 삼켜냈다. 베르나가 또 무언가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모양이군.

    “그렇습니까.”

    “예. 그래서 주제넘지만, 제가 괜찮은 혼처를 몇 군데 찾아보았습니다.”

    불쾌한 주제의 대화를 나눌 때 표정 관리를 하는 방법에 익숙한 필리프였다. 아직 채 반이 줄지 않은 유리잔을 들어 입술을 적신 그가 타론과 똑바로 시선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주제넘은 것은 아니지만, 과한 친절이 아닐까 싶은데. 호의만 감사하게 받는 것으로 하지요.”

    “어차피 결혼은 가문의 결합이며, 하나의 계약 아니겠습니까. 이제 곧 폐하와 저는 가족이 될 사이이니 부담 느끼시지 말고 들어주십시오.”

    순순히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이는 타론의 태도에 필리프가 이야기해 보라는 듯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하이만 제국의 차녀입니다. 그쪽에서는 폐하만 괜찮으시다면 식을 서두르고 싶어하는 눈치였습니다. 지참금도 원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이만 제국…….”

    “예. 카마르 제국과 오랜 전쟁을 치른 곳이지만, 종전을 선언한 만큼 큰 문제는 되지 않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잠자코 타론의 이야기를 듣던 필리프가 잔에 남은 술을 깨끗이 비워 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간이 늦었으니 그만 황궁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 그리고 나는 정략결혼에는 큰 흥미가 없다는 것을 알아두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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