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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순간 (42)화 (42/139)
  • 42화

    “평소에 위가 별로 좋지 않으시지 않습니까? 그러면 여기를 이렇게 꾹꾹 눌러 주면.”

    필리프의 손바닥을 편 안나가 손바닥 가장 위 손금이 지나는 자리 중앙을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지금 뭐 하는 거지?”

    간신히 둘이 같이 있을 시간을 내었는데, 필리프의 얼굴빛을 확인한 안나는 갑자기 손 마사지를 해주겠다며 팔을 걷어붙였다.

    “손은 19개의 뼈와 14개의 관절 그리고 수많은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간단한 마사지만으로도 몸 전체의 피로를 푸는 것이 가능해요.”

    고단한 식당일을 하며 쌓인 만성 피로를 홀로 풀어 볼 요량으로, 안나는 짬짬이 손과 발 마사지를 배워 놓았었다.

    “평소 잠은 얼마나 주무십니까?”

    “보통 서너 시간 정도.”

    “하아. 폐하의 눈이 자주 충혈된 이유가 있었네요. 인공 눈물이 있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뭐?”

    “아, 아닙니다.”

    중얼거림을 멈춘 안나가 필리프의 가운뎃손가락 양옆을 꾹꾹 누르더니, 지문 중앙을 손톱으로 지그시 누르며 자극하기 시작했다.

    “이게 정말 효과가 있다고?”

    “저만 믿으세요. 아, 손에 힘을 빼시라니까요?”

    미덥잖은 표정을 짓는 필리프를 향해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어 보인 안나가 필리프의 손목을 움켜쥐며 손에 힘을 풀게 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는 필리프의 입가에서 소리 없는 웃음이 샜다.

    자신의 앞에서 살랑살랑 듣기 좋은 말을 늘어놓는 것도 아니고, 애교가 뚝뚝 떨어지는 성격도 아니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 여자가 이토록 귀엽게 느껴지는 것일까? 한번 그런 생각을 품기 시작하면서 증상은 점점 심해지기 시작했다. 늘 함께 있고 싶고, 얼굴을 보고 싶으니 저 자신도 신기할 노릇이었다.

    “내가 마사지나 받자고 너를 부른 게 아닌데. 아,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황궁 안에 내 마사지사가 여러 명이 있거든?”

    “좀 편히 침대에 누우시겠습니까? 앉아 계시니 몸에 계속 힘이 들어가는 것 같아서요.”

    “침대에 누우라고? 나 혼자?”

    필리프가 안나에게 잡히지 않은 반대쪽 팔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넣었다.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를 헤집다가 스르르 미끄러져 내려온 손이 그녀의 귓불을 살살 꼬집듯 어루만졌다.

    “저번에 다 마시지 못한 과실주가 있는데, 함께 하겠어?”

    필리프의 얼굴이 안나의 얼굴에 느리게 가까워졌다. 그의 숨결이 섞인 낮은 목소리를 듣는 순간, 이대로 그의 페이스에 말려들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자, 잠시만요!”

    최근 며칠 사이 그의 낯빛이 좋지 않아진 점이 마음에 걸렸다. 누구보다 바쁜 일과를 소화하느라 제대로 쉴 시간이 없어 쌓인 피로와 스트레스를 조금이라도 풀어주고 싶은 마음에 시작한 마사지였다.

    “다 끝나면, 다 끝나고 마시겠습니다.”

    “다 끝나면?”

    “예. 별것 아닌 것으로 보이시겠지만, 이 마사지에도 나름대로 절차가 있어서요.”

    “그럼 다 끝나면 내 뜻에 따라주는 건가?”

    그 뜻이 대체 뭔데요. 필리프의 입가에 걸린 음흉한 미소를 보니 그가 말하는 뜻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감이 잡혔다. 여기서 왈가왈부해봤자, 입만 아플 것이 뻔했다. 안나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아이를 어르는 말투를 뱉었다.

    “예, 예. 전부 폐하의 뜻대로 할 테니, 어서 침대에 누우시지요.”

    입꼬리를 근사하게 말아 웃은 필리프가 안나의 말에 따라 침대로 향했다. 처음에 그를 봤을 때만 해도 피도 눈물도 없는 차가운 사람일 것이라 짐작했는데, 이렇게 아이 같은 면이 있을 줄은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다.

    “눈을 감고 몸에 힘을 빼 보세요. 끝나고 나면 몸이 한결 가벼워진 것을 느끼실 거예요.”

    재정 회의까지 남은 시간은 약 한 시간. 양 손발 전체를 마사지하기엔 살짝 빠듯한 시간이었다.

    “기분이 좋은데?”

    눈을 감고 조용히 안나의 마사지를 받던 필리프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이불을 잡아 필리프의 가슴 높이까지 끌어준 안나가 손에 힘을 세게 주지 않은 채 마사지를 이어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잡고 있던 그의 커다란 손이 조금 무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손에 움직임을 멈춘 안나가 필리프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맵시 좋은 입술이 다물려 있었고, 가슴이 규칙적인 속도로 들썩이고 있었다.

    아, 잠든 모습마저 어마어마하게 잘 생겼구나. 어쩜 입술이 저렇게 거스러미 하나 없이 매끈하지? 립밤도 없는 이 시대에 말이야. 잠든 그의 얼굴을 잠시 넋을 놓고 바라보던 안나가 소리 나지 않게 앉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제 회의까지 삼십 분. 그가 잠시라도 편히 잠을 잘 수 있기를 바라며 그대로 침실을 빠져나가려는데, 등 뒤에서 뻗어온 손이 안나의 손목을 낚아챘다.

    “어딜 가려고.”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더니 그의 눈꺼풀이 천천히 들리는 것이 보였다.

    “아, 일어나셨어요?”

    단단한 팔이 안나의 허리를 감아 그대로 힘을 실었다. 무엇을 어떻게 해볼 틈도 없이 그의 손에 이끌려간 몸이 낙하한 곳은 그의 넓은 품 안이었다.

    “어딜 가려고.”

    여전히 잠에 취한 듯 낮게 깔린 목소리였다.

    “피곤하시니까 좀 주무시라고…….”

    “피곤해? 누가.”

    당치도 않은 소리를 한다는 듯 필리프가 단번에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에 몸에 파묻혔던 안나의 몸이 그대로 함께 딸려 올라갔다.

    “나는 평생 피곤함을 느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야.”

    예나 지금이나, 남자들의 허세는 대단하구나. 터지려는 웃음을 삼킨 안나가 필리프의 뺨을 가볍게 쓸어내리며 답했다.

    “폐하 좀 전까지 코 골고 주무신 거 모르십니까?”

    어차피 잠든 사람은 기억하지 못할 테니 살짝 양념을 친다고 알아차리진 않겠지.

    “피곤함을 느껴 본 적 없는 분이 어찌 그리 심하게 코를 고시는지.”

    조금은 민망한 모습을 보일 것으로 생각했는데, 안나의 이야기를 듣는 필리프의 표정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안나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필리프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거짓말을 잘하는데?”

    “…네?”

    “내가 정말 잠들었다고 생각했나 봐?”

    “에? 아니, 그게 아니고 아까…….”

    뭐야. 잠든 것이 아니었어? 필리프의 뺨에 닿아있던 안나의 손이 스르르 미끄러져 내려왔다.

    “내가 코를 골았다고?”

    “아, 저기 그게…….”

    “눈을 감고 있는데도 나를 바라보는 네 시선이 느껴지던데.”

    “아하하하. 그런데 저… 저기, 이 손을 좀 놔 주시면…….”

    그가 양 손발로 안나의 몸을 결박하듯 감싸왔다. 그의 품을 벗어나려 어깨를 있는 힘껏 밀어보았지만,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는 피지컬의 소유자는 작은 미동 하나 보이질 않았다.

    아니, 이게 대체 어깨야, 돌이야.

    “공들여 내 마사지도 해 주었는데, 이제 내 차례인가?”

    “예? 아, 저는 괜찮으니까 저 이 손을 좀…….”

    “너에게 배운 대로 해 줄 테니까, 몸에 힘을 좀 빼 봐.”

    “아니, 저는 아픈 곳이 없다니까요? 으앗!”

    안나의 등을 손으로 받친 필리프가 그대고 상체를 숙였다. 반동으로 솟아오른 안나의 두 다리가 그의 허리를 자연스럽게 감았다. 등이 침대 시트에 닿는 순간 고개를 획 돌리는데, 그의 손이 안나의 뺨을 잡아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게 했다.

    “온종일 주방에서 일하는데, 아픈 곳이 얼마나 많겠어.”

    쯧쯧, 혀를 차며 안나의 허리를 쓸어내린 커다란 손이 허벅지로 미끄러져 내렸다. 코앞으로 바싹 다가와 있는 그의 얼굴이 부담스러워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그럴 때마다 뺨을 감싼 손에 가볍게 힘이 실렸다. 조금도 강압적이지 않았지만, 꼼짝을 할 수 없게 하는 손길이었다.

    “다리가 특히 아플 것 같은데. 안 그래?”

    “아, 저, 저기, 저는 괜찮은데… 아앗!”

    “저런. 많이 아픈 모양인데.”

    저기요. 제가 해 드린 안마와는 다소 다른 것 같은데요.

    안나가 입고 있던 드레스 사이를 파고든 필리프의 손이 그녀의 허벅지 안쪽으로 옮겨졌다. 그가 예민한 피부를 손톱을 세워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매만졌다. 안나가 몸을 벌벌 떨면서 발끝을 오므렸지만, 다리에 도통 힘이 실리질 않았다.

    “여기 이쪽 근육이 좀 뭉친 것 같아. 어때, 좀 시원해?”

    “아, 아니… 거, 거긴.”

    허벅지를 훑는 손가락이 점점 노골적인 의도를 담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손끝이 허벅지 안쪽을 긁으며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아, 미쳤지. 왜 안마를 해 주겠다고 덤벼서는. 아, 어떻게 하지? 무조건 안 되지. 이제 곧 그는 회의에 가야 하고, 나도 주방에 돌아가야 하는데. 이대로라면 그대로 거사를 치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이얏!”

    안나가 이를 악물고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강철 같은 그의 어깨는 꼼짝을 하지 않았지만, 노력을 가상하게 여긴 것인지 그가 살짝 상체를 물려 주었다.

    “이, 이제 곧 회, 회의에 가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 어서 일어나서 준비하셔야지요. 저도 주방에 돌아가야 합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대충 쓱쓱 쓸어내린 안나가 침대에서 엉덩이를 떼어 냈다.

    “아직 시간은 충분히 남았는데.”

    “예? 아니요. 벌써 시간이 꽤 흘렀습니다. 이제 십 분 후에는.”

    “왜, 키스할 시간은 충분하지 않아?”

    대담하게 물어오는 말에 뭐라 답을 해 줄 수가 없어 입을 어버버 거리니, 눈꺼풀을 느리게 깜빡이던 필리프가 이를 하얗게 드러내며 웃었다.

    “그 정도 시간은 내 주었으면 좋겠는데.”

    “저기…….”

    “키스해도 될까?”

    언제는 물어보고 하셨나요. 뾰로통하게 쏘아붙이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괜히 불퉁한 감정을 내보여 오랜만에 함께 하는 시간을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안나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기다렸다는 듯 입술이 겹쳐졌다.

    “으으…….”

    뜨거운 숨결과 함께 매끄러운 혀가 입술 사이로 밀려 들어왔다. 다시 안나의 몸이 침대 위로 눕혀졌고, 그가 바르작거리는 안나의 몸을 체중으로 누르며 더욱더 깊게 혀를 밀어 넣었다. 혀끝이 강하게 비벼지며 몸 전체에 열기가 번졌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가는 순간,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간신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시간을 확인했다. 그녀의 입안에서 혀를 빼낸 필리프가 그녀의 입술 위를 길게 핥으며 깜빡이는 그녀의 눈꺼풀을 감아 내리게 했다.

    “괜찮아. 전부.”

    잠시 입술을 떼어 낸 그가 낮게 속삭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초조했던 마음이 놀랄 만큼 평온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래. 전부 괜찮아질 거야. 전부.

    몸이 더 가까이 당겨지며 다시 입술이 겹쳐졌다. 필리프의 허리 즈음에서 방황하던 안나의 두 손이 그의 어깨 위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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