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아니, 안나. 그게 정말이야?”
“쉿! 마샤, 비밀이라니까.”
앉은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킨 마샤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안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을 잡아 자리에 앉힌 안나가 주위를 휘휘 둘러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너만 알고 있어야 해. 알겠지?”
“하지만, 아니 물론 그렇긴 한데. 아니, 그런데 대체 언제?”
“어, 그게…….”
안나가 다리를 다친 이후 필리프는 아침 식사 준비 전 황궁 주치의를 만날 것을 명했다. 언제나 마샤와 함께 주방으로 향하곤 했던 안나였기에, 마샤에게 벌어진 일을 털어놓지 않을 수 없었다.
“어제 음식을 가지러 주방에 들렀다가 좀 심하게 넘어졌거든. 마침 폐하께서 내가 넘어지는 걸 보시고 치료받는 곳에 데려다주셨어.”
“치료받는 곳? 그곳이 어딘데?”
“어. 황궁 밖인데 나도 어디였는지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아. 아마 내가 너무 불쌍해 보이셨나 봐.”
“어…….”
여전히 벌어진 마샤의 입은 다물어지지 않았다. 하긴 한낱 주방 시녀가 다리를 좀 다쳤다고 황제가 선뜻 황궁 주치의를 내어 주다니, 제가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이긴 했다. 미심쩍은 마샤의 표정에 안나가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내가 때가 되면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해 줄게. 지금은 보는 눈이 너무 많아서.”
준비를 마친 시녀들이 황궁 주방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묻고 싶은 말들을 그대로 꿀꺽 삼킨 마샤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며 채소 더미로 손을 뻗었다.
조금만 기다려, 마샤. 황녀가 황궁을 떠나면 내가 전부 설명해 줄게.
답답함과 미안함이 섞인 마음으로 마샤를 바라본 안나가 채소 손질을 거들었다.
“자, 모두 모이거라.”
카라나와 놀만이 흩어져 있던 시녀들을 한데 불러 모았다.
“폐하께서 오늘 아침 식사는 간단히 샐러드만 준비하라고 하셨다. 지금 호명하는 이들은 모두 나를 따라 정원으로 모이고, 나머지는 놀만과 샐러드를 준비하도록.”
“예, 주방장님.”
“다음 주에는 황녀님의 결혼 기념 연회가 예정되어 있다. 큰 행사이니만큼 모두 긴장을 놓지 않아야 할 것이야.”
드디어 연회가 열리는구나. 그럼 이제 황녀가 황궁을 떠날 날이 머지않았다는 뜻이겠지. 아, 황녀만 눈앞에서 사라진다고 해도 마음속 시름이 좀 씻길 것도 같은데.
“마샤 카밀, 안나 스완 그리고 카밀라 한센.”
카밀라. 그래, 쟤도 황녀와 한 세트였지. 조금만 더 참자. 저 얼굴이 사라지면 그래도 좀 살만해지지 않겠어?
이름이 불린 시녀들이 카라나의 앞에 모여 해야 할 일을 지정받았다.
“안나와 카밀라는 훈제 고기에 어울리는 소스를 만들어보도록 해라. 카밀라, 네가 황녀님이 좋아하시는 음식을 잘 알고 있으니, 안나에게 잘 가르쳐 주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주방장님.”
다른 사람도 아닌 카밀라와 함께 일해야 한다니. 안나가 절박한 표정으로 카라나 주방장의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안나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바로 다른 시녀들을 향해 등을 돌렸다.
“뭘 그렇게 서 있어? 주방장님 말씀 못 들었어? 오늘은 나한테 잘 배워야 할 거야.”
한껏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은 카밀라가 안나의 얼굴 쪽으로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어쩜 쟤는 하는 행동마다 저렇게 꼴 보기 싫을까? 정말 밉상이다, 밉상.
“황녀님은 고기를 드실 때 보통 소스를 곁들이지 않는 편이야. 고기 본연의 맛을 해친다고 생각하시지.”
약초 정원을 둘러보던 카밀라가 잘 자란 로즈메리 앞에서 걸음을 멈춰 섰다.
“그래도 로즈메리 정도는 준비하는 게 좋겠지?”
뭐야, 나보고 따라는 건가? 짝다리를 짚은 카밀라가 로즈메리를 가리켰다.
“뭐해? 안 따고.”
“네가 직접 따면 되잖아.”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거드름을 피우는 것까지는 이해한다고 해도, 자신을 시녀 부리듯 행동하는 것까지 참아 줄 마음은 없었다.
“나는 너와 온종일 이러고 있을 수도 있어. 그걸 원하는 거야?”
안나의 입가에서 깊은 한숨이 흘렀다. 카밀라가 애초에 음식을 만드는 것에 큰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그녀와 괜한 기 싸움을 하며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 똥이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냐. 곧 사라질 인물이니 오늘은 내가 참는다.
로즈메리를 향해 허리를 굽힌 안나가 잘 익은 잎을 따기 시작했다. 승리의 미소를 띠고 있을 카밀라의 얼굴이 보지 않아도 생생히 그려졌다.
“자, 이제 됐지? 그럼 어서 소스를 준비하자.”
“아니, 아직. 허브를 좀 더 사용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자, 이쪽으로 따라와.”
안나의 손에서 로즈메리를 빼앗아 든 카밀라가 약초 정원 우측으로 이동했다. 앞으로 일주일 동안 저 여자와 함께 일해야 한다니.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양손으로 꾹 누른 안나가 내키지 않는 발을 내디뎠다.
* * *
말없이 주치의의 보고를 듣던 필리프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게 무슨 말이지?”
“아, 예, 폐하. 저도 너무 이상하여 두 번이나 맥을 짚어보았지만, 정말 희한한 것이, 맥이 잘 잡히질 않았습니다.”
“멀쩡히 살아있는 여자의 맥이 잡히질 않는다니, 말이 되는 소리인가?”
황제의 주치의 마르크 헤밀이 고개를 조아렸다. 황궁에서 주치의로 생활한 지 삼십 년, 두 명의 황제를 모시고 황실 일가 전체의 진찰을 책임져 온 그가 이제껏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이었다.
“저도 그것이 이상하여 수 번이나 맥을 짚어 보았지만, 결과는 같았습니다.”
필리프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물었다.
“그 외에 특이 증상은 없었고?”
“…예?”
“건강 말이야. 맥이 짚이지 않는다면 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뜻 아닌가?”
“그것이 또 이상한 점이었습니다.”
마르크가 오전 안나 스완과의 만남을 떠올렸다. 황가 식구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의 사적인 진찰을 요청받은 적이 없었는데, 황제는 황궁 시종의 다친 다리 상처를 살필 것을 지시했다. 짧은 의문이 생겼지만, 이내 머릿속에서 의문을 지워냈다. 황가의 일에 너무 깊게 관여하지 않는 것이 마르크가 2대째 황실 주치의로 생활할 수 있었던 이유였기 때문이다.
안나의 다리 상처는 그리 심하지 않았지만, 문득 스친 그녀의 손에서 싸늘한 냉기가 느껴진 것이 마음에 걸려 맥을 짚었다.
이미 죽은 사람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약한 맥이 느껴졌지만,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서는 큰 이상이 드러나지 않았다.
“건강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걸리는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걸리는 부분이라.”
필리프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혹시라도 그녀의 몸에 이상이 있다면? 머릿속에 퍼지는 불길한 상상에 몸이 차게 굳는 것이 느껴졌다.
“시간을 주면 그녀의 몸 상태에 대해 자세히 알아내는 것이 가능하겠지.”
“예? 아, 예, 그렇습니다. 폐하.”
“다시 부르지. 이만 돌아가.”
“알겠습니다, 폐하.”
마르크가 집무실을 빠져나가자마자 수행원이 황제의 일정을 보고했다.
“폐하. 국무 회의 준비가 끝났습니다.”
짧게 고개를 끄덕인 필리프가 집무실을 나서기 전 수행원을 돌아보며 짧게 명했다.
“회의가 끝나면 바로 안나 스완을 불러오도록.”
“예, 폐하.”
불길한 상상은 상상으로만 끝나야 했다. 어지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듯 고개를 크게 흔든 필리프가 빠르게 집무실을 벗어났다.
* * *
오전 내내 카밀라에게 시달린 안나가 휴식 시간을 알리는 소리에 내내 삼키고 있던 깊은 한숨을 뱉어 냈다. 기회를 잡기라도 한 것처럼 카밀라는 안나의 행동에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꼬투리를 잡아댔다.
“하아… 정말 못 해 먹겠네.”
“안나, 여기. 오늘은 우리도 남은 샐러드를 먹으래.”
“응, 고마워, 마샤.”
마샤에게 샐러드 접시를 건네받았지만, 식욕이 있을 리 없었다. 안나가 풀 쪼가리를 뒤적거리며 간신히 접시의 반 정도를 비워냈다.
“참, 마샤. 내가 궁금한 게 있는데, 내가 잘 기억이 나질 않아서.”
“응, 뭔데?”
“나 혹시 만나던 남자가 있었어?”
“뭐?”
“너한테 얘기하려고 했는데 말할 시간이 없어서. 사실 얼마 전에 어떤 기사님을 만났는데, 그 기사님이 나와 만나던 사이였던 것 같더라고. 그런데 이상하게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아.”
마샤라면 케이든에 대해 무언가 아는 것이 있지 않을까? 만일 원래 이 몸의 주인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케이든이었다면, 무턱대고 냉정하게 그를 내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글쎄. 네가 나한테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어서.”
“그래?”
“응. 그런데 정말이야? 네가 그 기사님과 만나던 사이라는 게?”
“나도 모르겠어. 분위기로는 그런 것 같은데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으니까.”
“혹시라도 정말 좋아하던 사람이라면 기억해내게 되지 않을까? 그런데 어땠어? 막 심장이 뛰거나 그렇진 않았어? 확실하게 기억나진 않더라도 진짜 좋아했던 사람이면 심장은 반응하지 않을까?”
안나가 눈을 감으며 케이든을 마주할 때 느꼈던 감정을 떠올렸다.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안정감을 느끼긴 했지만, 심장은 조금도 반응하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지금 자신의 심장을 뛰게 하는 이는 다른 사람이니까.
“안나, 이쪽으로 좀 와 보거라.”
“아, 예!”
놀만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벌떡 몸을 일으키는데, 앞치마 안쪽에서 무언가 툭 떨어져 내렸다.
“…아니… 이게 어떻게…….”
바닥에 떨어진 수첩을 내려다보는 안나의 눈동자가 파르르 경련했다. 침대 매트리스 안에 꽁꽁 감추어 두었던 수첩을 어젯밤 분명히 불태워 버렸었는데. 재가 되어 사라지는 수첩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던 안나였다.
“뭐 하는 거야? 어서 오라니까.”
재촉하는 놀만의 목소리에도 쉽게 발을 뗄 수가 없었다. 아랫입술을 세게 깨문 안나가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안나, 너 괜찮아? 자, 여기.”
마샤가 대신 집어 준 수첩을 받아드는 안나의 손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수첩을 받아 쥐는 순간 머릿속이 새까맣게 변하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네 삶은 네 것이 아니야. 다른 사람의 삶을, 함부로 욕심내서는 안 돼.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채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야!”
바로 지금 제가 뱉는 목소리와 같았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은 안나가 무릎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